분명 영결식을 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슬픔에 그저 눈물이 났고 머리속이 텅 비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정권은 사람들의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틈에 불온한 고대녀 김지윤씨를 긴급체포했다. 용산 재개발 현장을 지키고 있던 문정현 신부는 용역에게 개끌리듯 끌려 나오고 경찰은 용역을 지휘하며 강제 철거를 진행했다. 그 길을 그의 주검이 지나갔다. 대법원은 삼성그룹에게 편법경영승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고 경찰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광장의 시민들을 방패날로 찍어 가며 밀어 냈다. 면전에 대고 '살인마' 라고 소리치고 사과만으로 되지도 않는 일이지만 '사죄하라' 고 소리도 쳐보았다. 수십만명이 또 다시 거리로 나와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런 광경을 온전히 보여주었다. 여기까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공동체라는 곳이다. 판단은 알아서들 하셔라... 좆같은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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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텍스트를 응시하다가도 울화와 주위 깊지 못한 분노를 소비한다. 소비적일지라도 이것은 분명 공분의 퇴적일 것이라 믿는다. 이 명백한 사회적, 민중적 트라우마가 강력한 분출을 준비하는 꿈을 꾸며 야릇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객관적 답답함, 슬픔 따위로 정신이 지친다. 힘들다. 그의 감상적 이미지들이 더더욱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술에 취한 밤, 그의 지지자였던 와이프도 힘들어 하길래 백세주 한병과 냉동닭을 사들고 가서 한잔 했다. 뜬금 없이 봉화에 함 가자던 남편한테 핀잔을 준다. 못갈 것에 술객기를 부리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는 금새 골아 떨어졌다. 이런 경우엔 정신을 차리고 짐짓 똑똑한 척, 다 아는 척, 사리를 따져가며 말하는 것이 부질 없다. 분명한 건 분노다. 미담을 퍼뜨리며 인간적 슬픔에 젖는 사람들조차 근원의 분노를 찾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성급한 화해, 어리석은 망각, 선별적인 기억 따위로 분노를 용해시키는 일만 우리 스스로 조장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은 부질 없고, 허무... 권태로움까지... 알수 없는 일이다. 노무현을 열열이 지지하지도 않았고 그의 정책은 나에게 비웃음꺼리 였는데 이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내가 노무현이라도 된 것 같은 이 슬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분노일까?
대통령이었을 때는 탄핵으로 죽이고, 자연인이 되니 진짜로 죽여 버린 놈들이 가장 먼저 애도하는 야만의 시대를 보라. 그가 대추리, 한미FTA, 좌파신자유주의로 죽기 전까지 뇌물스캔들로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수백명을 학살하고 수천억원을 해먹은 전두환, 노태우도, 지금 이 시간에도 민중을 탄압하는 이명박도 인간이랍시고 살아 있는데. 그는 오늘 아침에 뛰어 내렸으나 이미 그전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다. 5명을 산채로 불속에 떠밀어 태워버리더니 이제는 집 뒤 절벽에서도 밀어 버린다. 인간을 이렇게 악랄하게 다룰 수 있는 인간성이 과연 인간성이란 말인가. 아무말도 필요 없다. 그의 죽음이 슬프다. 스스로를 버린 그의 깨끗한 영혼 때문에 눈물이 난다.
동네북이 생겼다. 황석영이라고. 김문수 이후에(신지호는 좀 약해...) 제대로 서프라이즈 해 준 장사꾼이 없었는데 그 고되다는 장돌뱅이의 길을 친히 가주셨다. 유라시아로 몽골로 알타이의 신화를 찾아 칙칙폭폭 흡사 은하철도 999 를 닮은 기차를 타고 '영원한 권력'을 찾아 가주시겠단다. 세계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분단을 넘고 경계를 넘어 알타이에 매료된 수십명의 문인들이 방문하는 고장에는 그 지방 연예인과 밴드들이 나와 쿵짝쿵짝 그들을 맞으며 흥겨워 할 것이란다. "이명박과 긴밀히 얘기해보니 중도" 라 할때까진 노망이라 생각했는데 블로그에 싸질러 놓은 해괴한 시나리오를 읽어 보니 영혼이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로워서 그런가, 시궁창인줄도 모르고 잘도 첨벙댄다. 이명박이 중도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자국민 학살을 외면하더니 5.18을 앞두고 '광주... 까이꺼' 해버린다. 한번 그 방향으로 가기로 맘 먹었으면 독해져야 그 바닥에서 살아 남는다. 자기 개발과 관리가 철저하다. 앞으로 어떤 것을 재해석해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주둥아리 속이 온통 쌍욕으로 십자포화다. 목수정은 '늙은 광대들의 슬픈 코미디는 그만' 을 쓰며 자연스레 나오는 쌍욕을 어떻게 참았을까.(안참았겠지 뭐) 광주며 민주화로 화장을 하고 지식인인양 행세를 하던 황석영과 김지하가 어떤 인간인지 그 퀄리티가 까발려 진 건 이제라도 다행이다. 이광수는 아직도 친일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하는 말과 써내린 글을 보아 하니 중도니까 큰틀에서 협력하고 2코리아+몽골인가 하는 컨셉에 알타이 연합을 정치적으로 묶으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이벤트가 필요하니까 기차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이런 사업계획을 이 늙은 광대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사업계획이란 모름지기 돈을 대는 쪽과 쓰는 쪽이 있어서 뭘 벌 것인지가 확실해야 하는데 영혼이 자유로우면 사업계획은 잘 안되는게 이 분야의 상식이다. 근데 그런걸 한다. 뇌구조가 임상적으로 정상은 아닌게 분명하다. 그러하니 이 늙은 광대를 이용해서 마지막 꼭두각시춤 한판을 무대에 올리려는 연출자가 있을 듯. 무대에 올리는 거라면 이명박 정권에서 유인촌이 전문가 아닌가 싶다. 2코리아+몽골이 아니라 2앞잡이+MB 가 딱 떨어지는 공식이 아닐까 싶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도 짤랐겠다 황석영이 적임자 인 듯. 아니다, 황석영은 기차를 타야 한다. 황석영이 유라시아를 여행하며 영원한 권력을 찾아 오지 못하는 날엔 유인촌은 유승준될 수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 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는 염려가 있다. '혹시 이 아이가 갑자기 죽지나 않을까, 병에 걸려서, 한창 걸음마 중에 넘어져서 사고로..' 심히 불경한, 나아가 분열증에 가까운 염려 때문에 아이가 방에서 혼자 자고 있으면 아이의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가끔 확인도 한다. 아이가 금새 13개월이 됐다. 아이는 옹아리를 언어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온갖 외계어로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잡고 어미에게 건내기도 하고 빨대로 물을 마시며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넘어가는 과정을 차례차례 아비와 어미에게 시연해 보인다. 아이가 13개월이면 사고를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소유의 개념은 모르겠지만 손아귀에서 빼앗기는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아서 울고 소리를 지른다. 나아가 그야 말로 조직적으로, 이렇게 울고 소리를 지르면 아비든 어미든 빼앗은 상황을 돌이키려 애쓴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는 워낙에 부산스러워서 안고 있어도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아비는 아이에게 '그만' 이란 지구어로 말하고 아이는 안드로메다를 향한 외계 소통을 시작한다.
가족의 달, '사랑' 이란 주제로 MBC 가 휴먼다큐멘타리를 방송하고 있다. 요즘엔 이런 다큐를 보는 것도 곤욕이다. 아이와 부모가 얽힌 회복되기 힘든 상황 속에서 가족, 사랑 같은 일상에선 단물 다 빠진 감정이 얼마나 숭고하게 작동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눈물 몇 방울로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소심해졌다. 내가 저럴까봐 겁나고 어미가 혹시나? 해서 더 겁나고 우리 아이는 어떻게.. 여기까지면 우울과 분열증이 융단 폭격을 가해버린다. 이쯤되면 사랑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조악한 상상의 결과겠지만 아이를 빌미 하는 모든 것에 허약해진 이성이나 자존감을 발견하는 일은 흔하디 흔해 빠진 스토리다.
육아는 아이가 자라면서 아비, 어미를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인가 보다. 세상이 아무리 흉악하여도 수천년동안 인류가 겪어 오며 그나마 사람 사는 곳 처럼 보일 수 있던 이유가 육아의 과정이 염색체 인자로 인류에게 자리 잡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아비, 어머가 아이를 위해 현대 의학이 규정하는 정신적, 육체적 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임상적으로 그런 경우를 민족적 특성을 빌어 '화병' 이라 WHO 조차 규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 있다. 물론, 육아 과정에 반드시 임상적 화병이 동반된다거나 화병 자체의 인과관계가 육아에만 국지된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이 환자들을 민족적으로 내지는 국제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만, 희생이란 숭고한 수사로 위로가 가능하다. 이 악랄한 세상에서 부모가 아이를 사고로 부터 회피 내지는 지켜내는 것에 어떤 정치나 사회성이 가미될리 없다. 미혼일 때 이른바 개차판이었더라도 기혼과 출산의 상황이 벌어지면 육아와 희생의 유전자가 복원되는 것이 일반적인 영장류다. 사실 환자가 되는 지점은 아비와 어미가 스스로를 지혜롭고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발병한다. 어이 없게도 호모사피엔스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잠복기를 거치고 호모사피엔스가 되었을 때 발병 악화된다. 육아의 단계에선 부모가 환자가 되는 시기를 '교육' 이라 부른다.
외계어를 구사하는 13개월 영장류에게도 지구어와 지구의 온갖 이미지로 편집된 책이 필요 하다. 아이를 지구로 불러 오는 작업인데 방식이 다르다. 한국어로 불러 오느냐 영어로 불러 오느냐 차이가 난다. 아니, 난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아이가 어떤 언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된다. 다들 알겠지만, 한국어를 알기 전에 영어을 알아야 하는, 알도록 하는 교육의 방식이 오늘날 부모들에겐 중흥의 역사를 쓰는 사명이 됐다. 지혜로운 부모들 중에서도 더 지혜로우려면 더 빨리 아이의 입에서 "에이", "비", "쒸" 를 나오게 만드는 방식을 도입한 부모가 되면 된다.
아직도 '어륀쥐' 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울러 '학원 영업을 10시까지만 허용하겠다' 는 지배구조를 헤아리지 못한 멍청한 선언도 여전히 비웃을만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현상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 맘껏 비웃고 조롱해도 개개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륀쥐와 학원의 메카니즘은 현실 정치의 아류나 다름이 없다. 정치는 정치고 교육은 교육인 것, 애써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뤼쥐를 못해 사회적으로 낙오 되는 끔찍한 공포에 대결할 수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 아비, 어미는 좌파가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이명박이 만들었을까? 도처에 깔린 학원의 선동 때문일까? 아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됐다.
아이에게 선택의 폭을 넓게 주지 않는 파렴치한 부모들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폭이다. 정치적 신념이 아닌 것이다. 아이의 적성이 대통령이나 과학자 보다 더 다양한 스팩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직한 부모들의 희생이다. 그 요로에 영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영어는 선택의 폭 따위도 아니고 그냥 언어의 일 뿐이다. 좀 더 무게를 둔다면 수능의 골격 쯤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게 이런 잣대가 어울리기나 한가. 영어는 자본주의, 글로벌 지향 사회의 선악과 다. 한번 베어 물면 경각심, 공포, 할아버지의 땅, 어륀쥐, 이명박, 학원 이 줄줄이 새 나온다. 아이가 선택을 생각하기 전에 아비, 어미가 베어 문다. 문제는 유전자다. 이것을 베어 물지 않으면 호모사피언스가 되지 못한다. 아니, 아이를 망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아이를 위해 희생 하지 않는 부모는 강제연행감이다.
영어를 하게 되면 외국인을 편하게 만날 수 있다. 가끔 연애질에도 도움이 된다. 취업? 당연히 도움이 된다. 영어는 유용하다. 단지 유용할 뿐이다. 강제연행된 부모들을 좌파로 몰아 넣는 논리가 여기에서 작용한다. 즉, 영어불용, 내지는 영어척결을 주장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조서를 꾸민다. 나는 한번도 영어를 배워서는 안되는 언어,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조서에는 언제나 선처를 바래야 한다. 영어의 지위가 이쯤되면 상류층이고 이러한 지위는 고스란히 각 가정에 전가된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그 고유의 스팩트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영어 교육을 받느냐 못받느냐 차이로 발생하게 된다. 받는 축에서도 몰입식, 문화 체험형, 조기유학형, 부띠끄형 그 다양한 패턴에 따라 계층적 차이를 보인다. 영어 교육의 질적 차별이 사회적 인간적 계급으로 승화되는 현실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영어가 언어이고 수능의 골격이라면 공교육이 문법과 회화를 가르치면 되고 가르친 대로만 시험 문제가 출제되면 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유전자가 문제다.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교육 기관의 대표이사의 말에서 어쩔 수 없는 벽을 본다. 유전자가 문제인데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는 당연함을 당연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것을 받아 들이면 역시 좌파다. 노래방 도우미를 나가건,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하던 어떻게든 유전자를 극복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희생의 범주는 아이를 병이나 사고로 부터 보호하고 회피하는 일련의 본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되어야 한다. 유전자를 바꾸는 일인데 정상적인 상태에서 할 수 있을꺼란 생각은 한가롭기만 하다. 사교육의 시작은 대게가 영어다. 언어가 감수성, 소통, 계몽의 수단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 이상 영어의 지위는 날로 향상된다. 부모들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영어로 잘 말하려면 사유체계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 부분을 간파한 강남에 살고 석.박사이면서 경제력도 되는 부모들의 영어사교육은 놀랍긴 하지만 이들은 환자가 아니다. 이들은 유전자가 그렇다. 대한민국 1%의 유전자,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날로 영어의 지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영어를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고 영어가 자신이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정치성향과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환자다.
한국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니다. 영어에 관한 교육적 문제는 정치적 신념이며 사회 구조다. 영어는 우리 사회의 엄연한 계급적 문제다. 영어로 인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무산와 유산의 명확한 경계가 가능하다. 영어가 계급적 문제가 된 사회, 수백년전 한문으로 소통하던 사회, 수십년전 일본어로 사유하던 세대와 오늘날 부모들의 광기에서 어떤 은밀한 맥락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지나친 비약이라 볼 수 있을까.
- 13개월된 딸에게 영어로 된 동화 전집을 사주겠다는 집안 문제? 로 인해 두서 없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호들갑 떨일이 아닌 것이 그가 언제부터 좌파 작가 였던가 말이다. 1989년 방북했다가 옥고를 치뤄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해 과대포장된 규정이 좌파 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게 조중동을 통해 야시시하고 세련되게 1면기사로 다뤄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MB 가 백번 라디오 방송하는 것보다 휠씬 보기 좋은 전향서가 되고도 남음이다. 여운형과 이승만도 해내지 못한 '21세기 남조선 좌우합작' 의 결정체로 찬양을 싸질러댈 사설이 벌써 부터 기다려진다.
그의 나이 66세다. 이제 부터 나이 값을 하겠다는데, 참고로 '나이값' 은 국어 사전에 없어서 '나이' 와 '값' 을 띄어 써야 한다. 어느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돈 돈 한다' 고 했던데 이제 부터 할 나이 값의 값은 얼마일까 궁금해지고 그 값이 저금리 내지는 한창 떨어지고 있는 환율에 적용 받는 값인지 부가세는 포함된 것인지 언제까지 나이 값을 할 예정인지 확실히 값어치를 먹이고 그래프로 추이 동향도 제공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잘난 민중들은 등록금이 없어서, 가스비가 없어서 제발 짜르지나 말고 연봉 조금만 올려 달라며 제 나이 값을 못해 맨날 돈 돈 하는데.. 왜 그런지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면 집구석에서 좆잡고 생각 좀 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남북문제, 통일 따위의 소설적 낭만은 그가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 첨언할 리얼리티의 문제다.(몽골? 알타이 문화권? 우끼고 있네...)
구글이 인터넷실명제를 거부하고 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법률적 제재' 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마땅한 법률적 제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방통위의 곤란 내지는 곤혹을 보며 조심스러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개운치가 않다. 구글이 한국의 민주주의 중 가장 낙후된 표현의 자유를 지켜줄리 없다. 다만, 최시중의 뒷통수를 갈기는 자위적인 상상만이 즐거울 뿐이다. 차라리 '이런 비민주적인 나라에서 더 이상 사업하고 싶지 않다' 선언하고 철수해버렸으면 신체적인 것보다 휠씬 통쾌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구글도 자본주의 기업 아닌가. 구글이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도 고도의 정치다. 댓글 시스템을 주접스럽게 열었다 닫았다가 과감히 삭제를 감행하는 토종포탈에 비하면 이런 정치적 수사는 구글에겐 막강한 비즈니스 무기가 된다. 구글을 좀 아는 사람들이면 금새 'Don't be evil' 따위의 구글 모토를 떠올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을테니 말이다.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한미FTA 비준안이 상임위를 날치기 통과하여 곧 본회의에도 날치기 상정될텐데 한미 양국이 FTA 를 비준하고도 방통위는 구글에게 '법률적 제재' 와 같은 상스러운 도발을 감행할 수 있을까. 2006년에 구글은 산업자원부, 코트라 인사들과 한국에 천만달러 규모의 R&D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 했다. 실제로 삼성동 아셈타워에 구글 R&D 센터가 들어섰다. 인터넷실명제가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구글이 한미FTA 의 협정 대로 '투자자 국가 제소권'을 발동하여 민주주의고 그 할아비건 간에 투자된 만큼 사업을 못하게 한다고 세계은행에 꼰지르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최시중은 국회에 나와 세계은행에 가서 이기고 돌아 오겠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최시중은 설마 구글이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 것, 이란 계시적 믿음이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 그도 Don't be evil 을 떠올리며...? 에이 설마...
나는 공교육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또는 얼마나 멍청한지 알지 못하지만 사교육이 꽤나 영리하다는 것을 지난 9개월동안 알게 됐다. 사적 교육 기관은 더 이상 어설프게 단위 과목을 팔지 않는 대신 온갖 아름다운 수사를 다 동원하여 '아이들의 미래' 를 얘기 한다. 투박하게 얘기해도 아이들의 미래는 좌빨이나 우꼴통이나 공통적으로 먹히는 주제다. 도대체 아이들의 미래 란 무엇일까. 정작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입을 벌리고 닫는 학부모들에게서 미래란 찾아 보기 힘들다. 온갖 염려와 현실 불만 투성인 푸념을 철수, 영희 엄마에게 들은 대로 늘어 놓는다. 다들 학원에서 듣고 온 아이들의 미래 때문에 아빠의 무능과 할아버지의 상속에 대해서 진지한 정보를 나눈다. 한국 교육에서 아이의 미래는 아이로 부터 나오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 나가고, 나처럼만 안살면 된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서너시간 수다를 일삼는 학부모들이 장담컨데 7할 이상이다. 나처럼만 안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설득은 페이소스 비슷한 것과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남보다 앞서야 하는 사회적 구조와 나처럼만 아니면 된다는 눈물 겨운 히스토리에 무너지지 않을 아이가 있을까. 아이는 양자택일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잠자코 이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에 따라야 하는지, 지금부터 담배나 꼬나 물고 공원을 때지어 쏘다니며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하는지. 사교육 기관, 아니 사교육 기업은 이 지점의 요로를 영악하게 파고 든다. 서울대 합격 몇명 플랭카드를 학원 건물에 내다 거는 동네 보습, 단과 학원 얘기가 아니다.
학원은 어떻게 기업이 되었나, 영어, 자본은 예상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결정적 방아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교조가 거리에 누워 수호하는 고교평준화의 확대 때문이다. 이게 없었다면 휴~ 학원기업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고교평준화는 어떻게 소비하며 살까 고민하는 계급의 부모들을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어느 학교 다닌다, 는 변별력이 사라진 아파트 단지는 침묵에 휩싸였다. 이때, 공고, 예술고 쯤으로 알고 있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외고, 자사고가 등장한다. 이들의 무기는 당연히 변별력과 수월성이다. 부모들은 환호한다. 학군을 쫒아 다니며 이사를 가던 번거로움도 덜어 진 듯 했다. 하지만, 이사는 여전히 다녀야 한다. 이른바 학원가 버블8 지역이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 짓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3불정책의 하나인 고교평준화가 학원을 기업화 시켰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줄 안다. 물론,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고교등급화, 내지는 고교평준화 해체로 가야 하는 논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일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단과 학원을 다니는 것과 특목고에 가기 위해 버블 8 지역의 학원을 다니는 것은 구분지어야 한다. 한해 입시생이 대략 60만이다. 이 구분은 40만 대 20만 정도로 분리된다. 40만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라도 가려는 학생, 20만은 학원 버블 8 에서 특목고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한해에 특목고 정원이 대략 1만명이다. 1만명에 들기 위해 20만명이 학원을 다니고 이것이 학원기업의 시장규모다. 반항할 것인지 현실을 따를 것인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기는 고등학교 때가 아니다. 중학교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부터다. 40만인지 20만인지 초등학교 3학년이면 결정된다. 밤10시 이후 학원교습을 금지 시키건 말건 학원은 다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준비하니까, 2학년때부터 준비하라고 선전하면 된다. 차라리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피아노, 태권도 학원 외에 사교육을 금지 시키는 편이 덜 순진한 정책이다.
해마다 인구는 줄어 들고 있다. 사교육 기업은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인구 수에 더 집착한다. 이에 맞는 마케팅 전략은 자정까지 영업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계층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더 어리거나 운전면허학원이 유일한 사교육이 되던 계층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대학은 정해져 있다. 신생 대학이 갑자기 SKY 반열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대교협에 앉아 있는 꼰대들이 절대 용납치 않는다. 하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된다. 자립형, 자율형 사립고라고 선언만 하면 된다. 이명박은 300개 자사고를 만들어 경쟁을 줄여 사교육을 안정화시키겠다고 했다. 이런 학교 건설이 진행되면 산술적으로 일반고에 진학하려던 40만에 대한 사교육 마케팅이 가능해진다. 동네 보습학원의 플랭카드가 아니라 대형 버스를 대절하고 근사한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강남 사교육 기업의 마케팅이 스타벅스 퍼지듯 한다는 얘기다. 이 지점에서 암초를 만난다. 온갖 것에 다 핑계가 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재정적자가 그것이다. 시민단체나 전교조의 반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해마다 인구는 줄어 드는데 시장이 넓어 질리가 없다. 단위 과목이나 학생마다 더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도록 하기에는 정부의 사교육비 제한이란 유일한 명분에 너무 맞서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인구통계적으로 더 어리거나, 더 늙거나 이다. 마케팅의 기본이다.
10시 이후에도 장사를 하는 학원이 있다면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겠다고 한 곽승준은 홍준표에게 얻어 맞을 만 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명박 한테는 엎드려 뻗쳐 당했을 일이다. 공정택 교육감 당선을 통해 위기감에 연대할 줄도 알게된 이 지역 유권자들은 이명박정권의 핵심이다. 이 곳에 경찰력을 투입한다? 그것도 아이들을 간접적 대상으로 하여... 말도 안되는 얘기다. 그렇다고 학원기업의 마케팅을 정지 시킬 수도 없다. 이른바 진보적 개념 연예인이라 믿던 신해철이 대표적인 학원기업의 CF 모델로 '자녀에게 맞는 학습 방법과 목표를 확인하라' 고 독설을 외치는 것이 개념적인지 진보적인지 따위로 논리의 추상성을 확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학원의 배울만한 마케팅 전략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인구통계를 넘어 정치성향적 시장 확대를 노리는 영리한 행보다. 아이의 삶에 질이나 계급 상승의 교육적 욕구는 진보나 보수의 경계가 따로 없다는 리얼리티의 결산인 셈이다. 입이 달토록 이명박을 비난하는 아비도 쉬쉬하며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정치성향과 교육의 미묘한 입장차이를 양심불량으로 까지 몰아 가지 않아도 되는 절묘함으로 가득찬 함축이라 하겠다.
주위의 학부모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학교 선생을 비웃는다. 전교조 선생을 만나면 마인드는 있는데 기술이 안되고, 교총 선생을 만나면 기술은 있는데 마인드가 없다는 식이다. 공적 교육을 받는 12년은 누구나 동의하듯 아이들의 삶에 행복과 더불어 사는 인간성을 배우는 시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기술이 없고 마인드가 있고 또는 그 반대로의 경우처럼 그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교육적 이해를 키워야 한다는 이 땅의 아비들에게 교육의 근원적 물음이나 저 우주적 간극의 대립속에서 어떤 판단을 구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다행이 아이들의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이명박 정권을 때려 부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용기가 쉽사리 들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아비들은 괴롭다. 아이가 공교육만으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걸까. 어떤 진보주의자는 지금의 교육적 현실이 비현실적이 라고 말한다. 이런 순수한 선언에 선동될 학부모가 도대체 이 땅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런 순수한 학부모는 공룡에 가깝다. 한집 걸러 한집에서 날마다 발생하는 교육과 경제력과 이해력의 갈등을 온 신체로 느끼는 현실을 비현실이라고 요약하는 어떤 진보주의자들의 근본주의야 말로 전혀 리얼리티 하지 않다. 공교육을 살리자 는 총론의 각론에는 사교육의 규제와 놀라움이 마구 뒤엉킨 지옥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공교육은 도리어 공허한 선생들의 간극으로만 남아 인신공격을 해댄다. 무엇이 제정신인지 알 도리가 없다.
미국이 금융기관을 국유화 하려는 것처럼 나는 학원기업을 국유화하지 않고서는 사교육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공교육을 살리는데 사교육의 규제가 필수라고 생각하는 혐오스러운 정책논리에 조금이라도 조응하고자 한다면 더더욱 국유화가 실체성을 띈다고 본다.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가장 비슷한 현실감각을 따르는 교육의 현실에 있어서 이 또한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따라서 사교육 자체의 문제는 사회 내지는 체제 변혁적 문제로 승화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어 낼 수 없다. 정치성향도 바꾸지 못하는 이 정직함 앞에, 계몽이란 언어 조차 용기가 필요한 마당에 정말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저항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국유화 따위의 무정부적 비웃음을 비켜 나가 그저 아이에게 "그래도 네 꿈은 뭐니?" 라고 물어 볼 수 있는 아비라도 되려면 아이 뿐만 아니라 아비도 자신만의 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마도 아비의 그 꿈이 아이를 아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꿈을 대신 꿔주면서 아이를 지배하던 교육이란 이름의 제도를 벗어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제발 그 꿈을 헛갈리게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해철이 사교육 광고를 하는 것 까진 쩐의 논리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지 개념을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았으면 하고, 행복과 인간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들의 책값, 딸의 등록금을 위해 어미는 식당일을 아비는 대리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선전하는 이명박의 라디오 방송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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