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약국 가다가

2008/12/29 16:52 / 생각

참 이상도 하지.
회사 다니는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면
넌 선생이니까 세상 물정 모르지 하며
건네는 술잔에 내가 먼저 취해
새벽 여섯 시 반이면
출구 없는 어항 속에 몰려드는 물고기 떼마냥
꼬리 물고 등교하는 우리 아이들 얘기도
밤별마저 회초리에 쫒겨 운동장 멀리 떠 있는
이 나라 아이들 야간자율학습 얘기도 꺼내보지 못하고
다음 날이면 새벽자율학습을 감독하러 출근하는
고3 담임인 나는 참 이상도 하지.
서울의 동쪽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은 우리 학교는
고3 교실들이 건물 맨 위층에 자리잡아
교실 위창문엔 가을 하늘이 매달리기 일쑤고
아래창문엔 늘 서울 거리가 하나 가득 찬다.
가까이 중곡동 네거리 국민 은행 건물이
파란 띠 간판을 두르고 한 다발 지폐 뭉치로 서있고
그 옆 건물 오선지같이 나란한 창문에 붙은
우리 반 아이 집이라는 노래방 간판도 보인다.
건물 옥상에 고개 내민 십자가, 노란 물탱크들을 보며 나는
구름 덮힌 서울 하늘을 날고있는 커다란 공룡새가
은총 충만한 이 땅 건물마다
알을 하나씩 떨구고 간 것이라 생각도 하면서
조금 멀리 중랑천 하구를 배추벌레처럼 푸르게 넘는
을지로 행 전철을  바라보곤 한다.
더러는 비가 갠 맑은 날 멀리 남산 타워 뒤쪽으로
어깨를 낮춘 63 빌딩 너머 관악산이 눈에 들어오고
한강 건너 강남의 무역센타까지 한 발짝 다가오면
나는 마치 저기 건물 사이에 섬으로 떠있는
어린이 대공원 회전 관람차에 탄 기분으로
복도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창 밖을 보기도 한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내려다 보는 서울 야경은
크고 작은 세상의 불빛들이 한꺼번에 진군해 와
장안벌을 뒤덮은 고구려 적 싸움터에서
우리들 교실에 움츠린 형광등 불빛과 대치하고
잠실 종합 운동장 조명등이 함성만큼 부풀어
둥둥 북을 울릴 적마다 아이들은
점점 팽팽해지는 화살이 된다.
그럴 때면 물정 모르는 선생인 나도
저 아래 풍경이 무척이나 작게 보여서
세상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려니 생각해본다.
칠판 옆의 입시 달력 한 장 한 장 찢어낼 때마다
뒷산에서 낙옆들이 뒤따라 지고
낙엽만큼 쌓여가는 문제집들이
아이들 가슴 속에 꼭꼭 숨을 때
이제 아이들이 떠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느끼는 우리들은
마지막 수능 모의 고사를 마친 날
참으로 오랜만에 햇빛 속으로 아이들을 귀가시키고
스산한 가을 바람과 함께 세상 속에 내려가 술을 마신다.
약속 호프 위층 식당에서
한달 남은 수능 시험을 위해 잔을 부딪치고
그 아래 노래방에서 악쓰듯 노래도 하며
때로는 조선족 아줌마 낭창낭창한 노래 소리에 취해
노랫말 깊어질수록 간드러지는 미소 속에서
감춰진 먼 눈빛을 훔쳐보기도 한다.
그런 다음 날이면 젊은 선생 우리 몇은
수업 중간 빈 틈에 학교 앞에 몰래 나와
이쁜이 아줌마집 라면으로 속풀이도 하고
까치 문구 옆 아름 꽃집의 고 작은 패랭이 꽃을
까치마냥 흘긋 흘긋 들여다보다가
세상에 내려오면 너무 커지는 이 거리
이맘 때 감이 제법 주절주절 열린 골목길을 걸어
작아져서 더 울렁거리는
우리들 가슴을 시원히 풀어 줄
한 봉지 가득한 그리움을 찾아
오랜 단골인 이화 약국에 간다.

[가을, 약국을 가다가] 채풍묵


일제고사의 망령은 촛불집회는 널널하게 나오되 평일 교육감 선거는 바뻐서 못했던 투표권을 가진 어른들의 무지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그런 어른들이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무시한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들을 향해 물어 본다. '왜' 냐고. 아이들을 무시했던 무지한 어른들에게서 올곧은 대답이 나올리 없다. 아이들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학습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초등학교, 중학교 앞에도 등장했다. 학교폭력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에 저항하는 '아이들' 을 막기 위해서다. 비릿한 파시즘의 악취가 진동한다.
고로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게의 어른들은 쓸모 없는 밥벌이로 전락했다.

2008/12/29 16:52 2008/12/29 16:52
DrunkenSTAR 이 작성.

유사시

2008/12/18 18:33 / 생각

지만원씨는 내가 태어 났을 때 월남파병공로로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이성의 근대와 탈중심적인 현대를 거쳐 탄생할 수 있는 인간형 중에서도 매우 드문 케이스다. 스스로를 응용수학의 대가라 자칭하고 자신이 만든 수학공식도 자신있게 공개하는데도 불구하고 언변이나 사상은 도무지 논리와는 담쌓은 인물이다. 이런 분을 이해하기 위한 상식은 작동 불가능이다. 그렇다고 EBS 수학 I 을 청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래서 이해가 된다면 그건 아마도 진짜 수학하는 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지만원씨가 운영한다는 시스템클럽에 가 보면 '좌익명단' 과 '빨갱이명단' 이 공개되어 있다. 지만원씨와 그의 시스템 추종자들에게는 이른바 '유사시 처단 명단' 인 셈이다. 이들 중 빨갱이도 아닌 나와 즐겨 술자리를 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것이 흥미로웠다. 아무리 유사시 라고 해도 지만원씨를 처단할 의사가 없는 그들 중 한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사시엔 지만원을 조심하세요', 답이 왔다 '맨날 유사시야, 언제 조심해야 하는겨?'

오늘 또 하나 공개할 명단이 있다. 명단은 해머로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나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오늘 국회 외통위에서 단독으로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한 의원들이다.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

박진, 정몽준, 남경필, 정진석, 황진하, 김충환, 이춘식, 정옥임, 구상찬, 홍정욱

촛불 이후에 걸핏하면 소화기 분말과 물대포가 등장한다. 우리 주위에 이런 인명제압용 장비가 즐비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소화기 분말과 물대포가 등장한 오늘 국회는 명백히 '유사시' 였다. 지만원씨가 그곳에 있었다면 민주당,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모두 처단 되었을 성 싶다. 사실 '처단' 이란 단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가 지주와 반역자들을 무자비하게 다뤘다고 증언하는 우익, 반공 교과서를 통해 처음 접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처단' 이 우익 교과서 집필자의 언어인지 공산당식 언어인지 언듯언듯 하다. 하지만 지원만씨의 시스템 우익반공에 근거 한다면 분명 우익의 언어가 아닐지, 감히 추정해본다.

소화기 분말을 뒤집어 쓴 좌익, 빨갱이, 이른바 좌빨들에게 위의 한나라당 의원 명단은 어떤 의미일까? 이정희 의원의 울화통처럼 사퇴해야 할 의미로 규정할 수 있을까? 골밑까지 좌빨인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기껏해야 저 명단에 대고 '처단' 이 아닌 '사퇴' 로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이 유사시의 상황이 생뚱맞게도 찝찝한 이유는 뭘까.
반민주는 반민중과 같고 그런 반역적 행위가 명백한 명단에 처단을 부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지만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지만원이 아무리 응용수학을 잘해도 절대 가지지 못한 간단한 논리 때문에 그렇다. 민주적으로 하자는 요구를 묵살하고 단독으로 바리케이트 치고 처리한 인사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촛불에 그슬리던 아가리에 분말을 쑤셔 박던 처단하자고 하면 그 또한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발이 나와도 백번은 나와야 할 유사시에 겨우 '사퇴하십쇼!' 가 튀어 나온것이 아닐까.

하긴 저 명단의 인사들을 역사에 기록해서 대대로 쪽팔리게, 대대로 우리나라 국적은 가질 수 없게 지랄이라도 해야 하는 건데, 교과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만 역사로 아는 저능아들에 의해 지능적으로 바뀌고 있는데다가 좌빨도 아닌 선생님들은 좌빨의 상식처럼 행동하다가 해임되고 파면되고 있으니 기록도 전수도 요원한 상황이다. 이 상황, 좌빨에게는 참으로 '유사시' 다.

2008/12/18 18:33 2008/12/18 18:33
DrunkenSTAR 이 작성.

만남

2008/12/17 15:00 / 생활

언제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인 김국현님을 포스코 지하에서 우연히 만났다. 밖에서 술한잔은 해줘야 친구가 되는 정신구조상으로 보자면 김국현님은 아직 친구는 아닌 셈이다. 근데도 사람 참 좋은 미소로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오래전 내 누추한 세미나에 자전거를 끌고 와서 근 3시간을 앉아 계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때도 "언제 술한잔 해요" 가 인사였고 엇그제도 같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올해 남은 저녁 스케줄을 훌터 보았다. 이거 대뜸 전화해서 한잔 하자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2008/12/17 15:00 2008/12/17 15:00
DrunkenSTAR 이 작성.

화요일 오후 3시 제주도 중문단지에서 컵라면 하나 먹겠다고 편의점을 찾아 다녔다. 연리지 식물원 건너편 패미리마트에는 뜨거운 물이 다 떨어 졌단다. 직원은 성가신 표정도 아쉬움도 없었다. 중문단지에 분식집이 있던가? 어제 말아 마신 술이 여전히 뱃속에서 파도타기를 한다. 잔득 구겨진 속이 미쳐 풀리기도 전에 단출한 산행을 한 후 였다. 컵라면은 있는데 물이 없다. 오전 산행으로 인해 와이프가 들으면 입이 삐쭉 나올 '괜찮음' 을 발견했다. '등산 이거, 괜찮네' 화요일 오전 제주도 한라산행은 차마 누리지 못할 만큼 상쾌한 뻐근함이라고나 할까. 잦은 제주도 방문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정상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없었다. 제주도 택시아방도 겨울에 저렇게 한라산을 또렷히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했다.

주상절리 근처에서 떠날 시간을 가늠하고 있는데 방파제 위에서 해녀어멍 몇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어멍 한분이 이미 숨이 끊어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심장마비였다. 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심장마사지 몇번 하더니 얼굴에 담요를 덮어 급히 실어 갔다. 해녀어멍이 누워있던 자리에 물기가 축축하다. 12월9일 화요일 오후 3시, 제주도는 봄날처럼 더웠고 세상의 모든 물기는 전속력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내 손엔 여전히 컵라면이 들려 있었고 급히 베낭 안에 쑤셔 넣었다.

2008/12/10 10:35 2008/12/10 10:35
DrunkenSTAR 이 작성.

질문

2008/12/02 16:00 /

컨퍼런스 스피커로 나가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클라이언트가 요구사항을 자꾸 바꿔여, 어떻게 해야 하죠?"
"요구사항은 사람 마음 입니다, 움직이는 겁니다. 바뀌는게 당연하죠."
"..."

"클라이언트가 뭐도 모르면서 아는척해서 힘들어요"
"모르니까 여러분을 돈 주고 부른거죠, 아는척 하는 것 받아 주는 것도 프로젝트의 일부분 입니다."
"..."

"무슨 짓을 해도 클라이언트와 관계가 안풀려요, 어떻게 해야 하죠?"
"프로젝트 하시면서 여자친구 계속 만나십니까?"
"네"
"프로젝트 하시면서 동창회도 나가시고 그러시죠?"
"네, 연말이라 모임 많죠..."
"마지막으로 영화 언제 보셨는지요?"
"지난 주말에요.."
"그러니까 클라이언트와 관계가 안풀리는게 당연하죠... 그 시간에 클라이언트와 대화 하세요"

어차피 인간이 하는 일에 인간 관계가 없고 업무 관계만 존재하는 방식은 없다. 사람들은 업무하는데 인간이 개입하면 나이브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그렇치가 못하다. 개나 소나 글로벌 스탠다드 한다는데 글로벌 스탠다드는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가 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비즈니스 환경은 프로세스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일을 한다. 더 인간적이라서 좋을까? 아니면 그것이 옳을까, 그를까? 그래서 프로세스가 일하도록 체제를 바꿔야 할까? 알 수 없다. 다만, 일이 되게 하는 방법 중에, 최소한 우리나라의 환경에서 인간을 빼놓는 것은 감히 오류라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용기와 지난한 대화를 대하는 자세이다.

2008/12/02 16:00 2008/12/02 16:00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