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2008/04'에 대한 14 개의 검색 결과
- 2008/04/30 중국과의 관계 by DrunkenSTAR
- 2008/04/29 천부당 만부당 by DrunkenSTAR
- 2008/04/29 중국, 애국심, 개싸가지 by DrunkenSTAR
- 2008/04/28 한우, 강부자 계급 by DrunkenSTAR
- 2008/04/24 절망하지 않는 노예를 위한 희망은 없다. by DrunkenSTAR
- 2008/04/22 나와 아내의 아기 by DrunkenSTAR (8)
- 2008/04/16 진통 by DrunkenSTAR
- 2008/04/15 기분 by DrunkenSTAR
- 2008/04/11 후지고 구린 세대 by DrunkenSTAR
- 2008/04/08 저는 13번 입니다. by DrunkenSTAR
한국에 유학온 중국인들이 제나라에서 열릴 올림픽을 위해 가당치도 않을 폭력을 휘둘렀나 보다. 중국인들은 한국에서 20년전에 치룬 올림픽을 이제서야 개최한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과 더불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생뚱맞은 치졸함으로 무장된 애국심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 폭력적으로 휘둘러도 부끄러운줄 모르는가 보다. 이런 일그러진 애국심은 어디서나 다 그렇다. 제나라만 잘났다고 외치는 '맹목적 광기' 말이다. 제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서 마치 위대한 나라의 반열에라도 오른 것처럼 외치는 꼬락서니는 사납고 저열하다. 자신의 이익과는 애초에 무관하기 때문에 맹목적일 수 밖에 없는 애국심이란 것이 뭉쳐 어떤 덩어리가 될 때 그것이 뿜어 내는 에너지란 고작해야 비겁한 집단 폭력이나 저급한 흥분 밖엔 없다. 13억의 인구와 세계의 공장이면서 물자의 블랙홀이 된 중국 전체를 등에 업은 개개 중국인들은 차츰 교양과 루쉰의 아큐정전을 잊어 가고 있다. 비단 티벳사태만을 두고 판단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베껴 가면서 이룬 경제성장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 단계를 뛰어 넘는 것이 예사다. 즉, TV 에서 비디오 산업을 거치지 않고 VCD, DVD 로 영상매체를 옮겨 가는 자신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하지만 그만큼 쌓아야 할 민주적인 절차와 교양 있는 근대시민적 사고체계 또한 성큼성큼 뛰어 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위험한 무리로 성장하고 있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영문학의 교양을 배우는 대신 영어의 기술이 교육의 근간이 된 우리나라처럼 중국은 모든 자연과 인문을 기술로 탈바꿈시키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도 이따위 개싸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억명의 사람들이 단번에 애국심이란 가차 없는 전체주의에 빠져 폭력화 되었을 때 세계는 그런 개싸가지를 감당할만한 특별한 방법이 없다. 오늘날 백주대낮 서울에서 벌어진 중국인들의 집단행동은 서막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중국이 존경 받는 나라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경제성장과 중화적 애국심에 몰두하는 이상, 세계는 중국의 인구, 공장, 블랙홀의 지위 때문에 지속적으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지금 중국과 중국인의 중화적인 일련의 행동은 씨발! 저질이다.
한우와 미국쇠고기의 문제는 값싼 고기를 먹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고기를 먹을 권리의 문제다. 지금도 한우는 다른 어떤 고기보다 비싸다. 지금도 이 비싼 고기를 내키는 대로 먹을 수 있는 부류는 청와대 수석들이나 이명박 내각의 장관 대부분,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로 대변되는 이른바 '강부자 계급' 에 국한된다. 이제 미국쇠고기가 들이 닥치니 한우를 먹자 고 떠들어 봐야 그 비싼 한우를 살 수 있은 부류는 애초에 정해져 있거나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우 먹기 캠페인' 같은 것은 무의미한 구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호는 '먹기 싫으면 먹지 않으면 된다' 는 이명박 정부의 짧은 인식의 한계와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좋고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싸고 비싼 것에서 싼 것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인식적 한계 말이다. 국민을 섬긴다는 이 나라 정부에게는 싸구려가 미덕이고 싸면 좋은 것이다. 누구나 좋고 맛있는 고기를 먹고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명박 정부가 할 수 있는 섬김의 말씀은 '한우 먹고 싶으면 출세해라' 밖에 없다. 이제 한미FTA 가 비준되면 '강부자 계급' 으로 부터 이런 섬김의 말씀이 준비될 것이다. '잘 살고 싶으면 대박 터트려라'
부자를 위해 투표한 가난한 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개탄이 이어지지만 정작 가난한 자는 여전히 부자가 되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희망이 있으니 부자가 되기까지 가난을 견뎌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가난은 몇대를 걸쳐 대물림되어 왔고 가난한 아비는 부자가 되는 희망을 제자식에게 끈질기게 주입시켜왔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 가난은 계속되었다. 아비는 병들고 아팠으며, 자식은 비정규직이다. 현대판 수난이대를 겪고 있지만 사회나 부자를 탓하지 않는다. 되려 부자의 습관과 생활 따위를 답습시키지 못한 아비 탓, 사회경쟁력을 따라가지 못한 그야말로 능력이 부족한 자식 탓으로 애써 돌려 놓고 세상을 마감하고 만다. 가난한 아비가 자식에게 물려 준 건 가난이 아니다. 그들이 물려 받고 물려 줄 것은 가난을 견뎌내는 허튼 희망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루쉰(노신)의 구절이면서 수많은 루쉰의 아포리즘 가운데 가장 오역이 심한 부분이기도 하다. 루쉰은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희망이란 많은 사람들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실천적 행위를 하기 전에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걸어 가기 위해서는 완전한 절망을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품는 어리석은 희망은 절망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희망이 될 수 없고 곧 그 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쇠고기시장이 미국에 개방되고 한미FTA 의 비준을 통해 공식적으로 농업은 산업에서 제외될 것이다. 원자재 가격은 향후 20년~30년동안 지속될 것으로 OECD 는 분석하고 있다. 교육비는 가난한 자가 부자의 교육수준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벌어져 버렸다. 이제 가난한 자는 광우병에 걸린 미국산 소고기를 사먹기 위해 소득의 80% 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연료는 연료를 먹는 내연기관의 가격을 1년안에 따라 잡고 말 것이기 때문에 물자는 반년만에 제가격을 모두 감가상각시킬 것이다. 상속세를 내리고 종부세를 내리고 도리어 간접세를 올리는 국가 정책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 종부세를 낼 때 혜택을 받을 것이란 꿈처럼 기분 좋은 희망에 부풀어 단숨에 20% 씩 오를 소주의 주류세를 참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겐 현재도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것이기 때문에 물려 줄 것이라곤 감가상각된 희망 뿐인지도 모른다.
어느 진보적인 언론조차도 희망만이 살 길인 것처럼 얘기한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재화와 잉여를 지속적으로 빼앗아 가도, 죽어라 모은 종자돈이 원자재가격 인상과 인플레이션, 변동환율로 가치가 하락되는 세상일지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선동한다. 보수 언론은 더욱 심해서 그것이 '너희들을 구원하는 조치' 라는 거짓을 끈질기게 주입시킨다.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대체 그 실현불가능한데다가 구체적이지도 않는 희망 자체를 가지는 유행에 열광하고 만다. '넌 희망이 뭐니?', '난 희망 없는데', '바보 희망도 없이 어떻게 사니.. 내 희망은... 로또 1등!' 도대체 누가 쪼다인가?
세상은 후퇴하고 있지만 더욱 디테일해지고 있다. 의료, 교육, 세금, 연료, 식품, 하다못해 옆동네 뉴타운에 배아픈 달동네 알박이까지 세상은 제로섬게임의 공식을 구체화시킨다. 가난한 자는 허튼 희망 말고는 절대 부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자는 달동네 독거노인의 고쟁이 푼돈에서 부터 맞벌이 부부가 가까스로 모은 종자돈까지 탐내고 쓸어 갈 수 있는 공식을 세워놓았다. 이건희가 수조원때의 비자금을 축적하여 정관계에 뿌려 대는 동안 가난한 자는 간접세로 노동자는 근로소득세로 사라진 돈을 매꿨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부국강병? 그렇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어리석은 희망이다. 자신이 생산한 잉여에 대한 관심은 거세하고 국가와 삼성과 같은 부자들의 구걸에 자신들의 노력을 자발적으로 갖다 바치는 행위는 그야말로 노예근성이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 노예에서 해방되는 날을 실천하는 것도 아닌 노예의 지위가 박탈될까봐 전전긍긍하는 희망만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포기한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노예의 삶을 절망하지 않는 이상 희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희망' 이란 따위는 현혹에 불과하다. 이 나라의 정부와 정권이 세상을 강철로 만들면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나 길을 걸어 갈 것인가? 아니면 그저그런 희망을 일기장에 끄적이며 내일도 노예인 삶에 감사할 것인가. 절망하지 않는 노예에게 희망은 없다.
3일전 태어난 나와 아내의 아기는 아직 '딸' 로 불린다. 나와 아내의 딸은 여느 사람이 생각했던 어여쁨보다 더 이쁘다고 얘기하여진다. 자기 자식을 말하는 부모가 으례 그렇듯 나는 '빈틈 없다' 고 대답해 준다.(아비는 모두 거짓말장이다.) 다 접어 두고, 겨우 3일이 지났지만 아기를 보는 시간 시간이 기가막힌 기적과 같았다. 그랬지만, 아내는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헛젖을 빨다가 울어 버리는 아기를 보며 굵은 눈물을 몇차례 흘렸고 나도 아내를 달래다가 부여 잡고 울고 말았다. 세상일에 시니컬하고 덤덤했던 나도 아기를 굶길 수 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잠시 모유가 돌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울컥해버리는 모습이 영 이해 불가능이다. 앞으로 아기를 대하는 나의 마음에 얼마나 빈틈이 많을 것이며 이해 불가능한 감정들이 엉커버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아기가 인생을 시작하던 날, 5명의 아기가 같이 또는 옆에서 태어났다. 모두 건강하길 바란다. 최소한 내 시야에 6명이 이 세상에 추가되었다. 부모라는 이유로 내 아기가 되었고 앞으로 수많은 빈틈과 이해 불가능으로 세월이 흘러 가겠지만 이 세상에 빈번히 일어나는 어느 시시한 시작일지라도 모두... 이 아기에게 축복을, 그리고 그 부모에게 책임을.
사회란 기가막힌 구석이 있어서 항생제며 뽕이며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기꺼이 맞아 줄 수 있는 넓고 튼튼한 허벅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날 이 사회의 지향이 어떤 초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 허벅지의 뼈는 무뎌져 제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된다. 오늘을 가르는 가장 초현실적인 화살은 '가난하지만 열심히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이다. 철 모르는 20대의 보수적 반란으로 선거 결과의 책임을 돌리는 일 따위에 의미가 있을까? 20대가 그렇게 된 것도 이 부질 없는 희망을 동력으로 한 정교한 시스템이 그들의 생활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짐짓 20대의 정치의식을 비판의 도마위에 올려 놓아봐야 비난만 무성할 뿐이다. 다만 엉망친장이 된 허벅지에 여전히 뽕을 주사하며 초현실을 넘어 초자아의 세계에게 게토된 가치를 용감무쌍하게 꺼내 들고만 영,호남의 지역주의야 말로 우리 정치사의 진정한 해로움이 아닐까.
20대가 병신 쪼다라고? 그들은 비웃을 것이다. 386처럼 공상을 헤메는 유아적인 실수는 하지 않는다고, 자기네들은 최소한 이 세상에서 이웃을 치고 동지의 뒷덜미를 잡아도 나는 좀 살아야 할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한나라당에 투표하고 도서관에 짱박혀 취업공부하는 순수함이 그들 생활의 방점인 셈이다. 그들이 쪼다라고? 천만에 말씀이다. 영남에서 한나라당 나고 호남에서 민주당 나는 이 오래된 진부함 보다야 휠씬 진보적인 것이 20대다. 20대보다 더 해로운 세대는 영남 사람이니까 한나라당(또는 정책도 정치도 없는 친박연대 같은 개그맨집단)찍고 호남 사람이니까 민주당(또는 벽에 똥칠해도 김대중이란 정서만 남은 가신집단)찍어라고 해묵은 주사액을 허벅지에 꽂으며 지들 자식들에게는 '가난하지만 열심히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고 허튼 희망을 오토리버스 시키는 후지고 구린 세대다.
이제 값비싼 수업료를 치룰 일만 남았다. 사교육이던, 의료보험당연지정제던, 대운하건 간에 살아 남기 위해 이웃을 치고 동지의 뒷덜미를 잡아 끌 묘안과 체세술이 서점을 메우고 주점의 안주꺼리가 될 것이다. 구리고 후진 세대야 허벅지에 뽕 맞고 정신 놓아 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수업료를 두고두고 쌓아 놓고 이자 물고 신용불량자될 세대에게 오로지 열심히만 하라는 희망만 물려 준 것을 두고 20대의 보수화, 반란이라 추리긴 어렵다. 그 보다 더 해로운 세대가 있었기에 이 모든 아찔함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찔함은 현실에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노력이 현실 순응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고 그 핑계가 절대 미래를 보장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후지고 구린 세대는 확실히 있다, 그렇다고 그 핑계가 우리 모두의 사회적 수업료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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