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2008/03/28 18:03 / 생각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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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젖[동백꽃지다 113쪽,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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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동백꽃지다 133쪽]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동백꽃지다 118쪽)

제주도,반성
지켜줄게, 제주도
2008/03/28 18:03 2008/03/28 18:03
DrunkenSTAR 이 작성.

이용득의 해로움

2008/03/26 15:17 / 생각

이용득 전 한국노총위원장과 같은 사람이야 말로 존경은 고사하고 대접 받을 수 없는 어른의 전형이다. 배울 점이라고는 '멍충이가 되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 는 만사의 교훈 뿐이다. 선거를 백주대낮에 뿌려지는 돈다발쯤으로 생각하는 집단과 정책연대를 한다는 발상자체가 판타지 아니었던가. 생각이라고는 돈되는 곳 개발하자와 때려 잡자 빨갱이 밖에 없는 아메바들의 기억력을 철석 같이 믿고 온갖 거짓된 액면(새 지도부가 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위원장 선거에 불출마 한다, 총선 출마용도 아니고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더니 정책연대의 완성을 위해 비례대표에 출마한다는 따위)을 팬티에 질질 흘리고 다니던 그는 아메바에 가끔 속기도 하는 3살 짜리 정치인이었다. 한나라당의 차때기 메뉴얼도 숙지 하지 못한 그가 감히 앉아서 권력의 개평을 받아 먹으려 하니 아무리 아베바 집단이라고 해도 줄서는 기준은 있는지라 그의 팽은 아메바의 망각이 아니라 아메바의 기억에서 오래전부터 이용과 배제를 넘나 들었던 존재 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용득은 '속았다'고 했다. 이 말은 이미 그가 총선에 출마 할 뜻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고 다닐 때부터 한나라당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위원장이라는 상징을 통해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70만 한국노총 조합원이 졸지에 이용득의 사리사욕에 동원된 '덩어리' 가 되었는데도 그는 양지에서 뻣뻣한 목을 자랑하고픈 금뱃지 청사진에 황홀했을터다. 사회적 영향이 큰, 작지 않은 공동체를 상징 했고 한때는 인간과는 결코 끊어 질 수 없는 노동의 위대함을 전파했던 한사람의 몰락에는 그 덩어리에게 조차도 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살인을 해야 만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은 그나마 참 잘된 일이다. 더 이상의 정신 분열적 패악질을 예방한 것이니 말이다. 그가 해로운 이유는 그가 노동운동을 하다 갑자기 비즈니스 프랜들리 해진 것이 아니라 돈이 되면 뭐든 개발하고 빨갱이들은 때려 잡을 수록 좋다는 구린 생각에 노동이나 진보가 얼마든지 들러리 설 수 있음을 떠들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끔찍하다.

[우리는 무엇인가]

2008/03/26 15:17 2008/03/26 15:17
DrunkenSTAR 이 작성.

우리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게다가 너무 오래된 스페인 내전을 때때로 기억해내는 이유는 스페인 내전이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의 전쟁이어서가 아니라 로버트카파의 한 장의 사진 때문일 것이다. 풀썩 쓰러져 죽기 직전의 공화국 병사 말이다.(그 병사는 분명 죽었다, 그 병사의 이름은 '페데레코 가르시아' 이다.) 이 사진은 너무 많이 배포된데다가 전쟁이 하나의 이미지와 영상이 되어버린 오늘날에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한다. 게다가 불경스럽게도 이 사진 연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더러 남는다. 하지만 최초로 사진에 찍혔던 크림전쟁 당시 로저 펜튼이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거대한 상자 4개를 짜맞추고 전쟁 현장에서 인화를 해야만 했던 시절처럼 '인정된 연출' 은 없었던 것이 로버터카파의 이 사진에 정설이 된 이유는 스페인 내전이 사진가들에게 간단한 조치로 필름을 되감을 수 있게 한 35미리 라이카 카메라가 보급되어 그 진가를 발휘한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작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로베르 두아노의 '파리 시청앞에서의 키스' 는 파리를 사랑의 도시로 묘사하기 위해 남녀를 미리 섭외하여 카메라가 설치된 곳에서 키스를 하도록 연출했다. 이 정도는 애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 로젠탈의 '수리바치산의 국기게양(이오지마섬의 국기게양)' 은 사진사가 찍고 싶은 스팩타클을 연출한 악랄한 포착의 전형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퓰리쳐상의 대표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사진은 연출되어선 안되는 것일까? 포토샵으로 칼라를 덧칠하고 콘트라스트를 대비하는 행위가 또 하나의 포착이 된 시대에 사진의 연출이란 무엇인가, 어쨌든 사진에는 구성이 존재하고 구성은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넣느냐는 문제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엔 양심이 필요하다.

연출이나 조작 없이 전쟁을 찍을 수 없었던 시절의 로저 펜튼에게 '카메라 모랄' 이 있었을리 없다. 오늘날에도 어떤 장면을 찍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종종 연출을 가능케 하고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시각예술이라는 미덕이 된다. 문제는 사진의 조작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사체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 라 했던 카파의 말을 동어 반복하여 조작은 어떤 두려움이나 어떤 연민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포토와 포토 저널리즘의 극복될 수 없는 차이와 같다. 포토는 기술과 시각예술의 정밀한 조합인데 반해 포토 저널리즘은 '기록하기 위해 떠나는 용기 있는 결단' 같은 것이다. 어차피 사진이 가진 포착의 형태는 피사체의 앞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용기 있는 결단으로 있어야 만 하는 장소로 떠나 그곳에 결국 있었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사실 이 차이는 저널리즘에서 매우 크다.) 따라서 포토의 그것엔 있어야 만 하는 장소가 아닌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장소의 풍경과 아름다운 색깔만이 깨진 빗살무늬 토기처럼 흩어져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둘 중 하나의 취미에 반응할 것을 종용한다. 사실 저널리즘과는 다르게 포토에는 이런 미덕에만 충실해도 사람들은 흥분하지 않는다. 포토 저널리즘이 어떤 떠남의 결단이란 점은 가장 극적인 역사적 주제가 필요해서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포토 저널리즘의 어떤 충격은 알림과 계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이나 인류적 이동과 같은 가장 극적인 파노라마가 일어나는 곳으로 떠나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지도 모른다.

인류가 서로를 치열하게 파괴하는 전쟁이나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삶의 현장에서 이주해야만 하는 가혹한 현장은 언제나 교훈적이고 때로 장엄하기 까지 하다. 그중 전쟁을 기록한 포토 저널리즘에는 전쟁의 공포와 '볼만한 스팩타클' 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전쟁이 언덕 위에 풀썩 쓰러지는 공화국 병사처럼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전쟁이나 피사체에 한발 더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물론 공화국 병사의 사진이 오늘날 바그다드 하늘에 뿌려지는 대공포의 섬광을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 내는 CNN 의 영상보다 '볼만한 스팩타클' 을 제공해주진 않지만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침공과 같은 대인류적 파괴에 대해 영상 이상의 어떤 것으로 접근하는 것을 꺼린다. 이것은 두려움으로 이뤄내는 어떤 연민마저도 합리적으로 거세하는 감정의 거리이며 미국에 협력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먼 어느 고장의 사정일 뿐이라는 내제적 안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량과 물이 없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휘둥그런 눈과 파리와 함께 널부러진 플라스틱 그릇에 투영되는 감정, 미개한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불쌍한 일들이란, 것과 같은 부류인 셈이다.(그곳에 패리스 힐튼이나 안젤리나 졸리가 콘트라스트로 대비되는 포토는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어도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덕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반계몽적 감정에선 공화국 병사의 죽음을 통해 스페인 내전을 공화국 정부군과 반란군을 당사자로한 전세계적인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충돌로 규정하거나 피카소의 '게르니카' 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로 조응되는 탐구와 연결되지 못한다.

오늘날 포토 저널리즘의 문제는 더 이상 사진 밖으로 고통이 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가 한창이던 당시 이한열 열사의 피격 사진은 거대한 고통의 전이를 일으켰다. 하지만 한미FTA 를 반대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의 영상은 좀 처럼 볼 수 없는 분신 자체의 스펙타클에서 분신의 이유였던 反한미FTA 로 전진하지 않은 체 탐구가 제거된 통조림 안에서 짧은 유효기간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가 수많은 포토 저널리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는 것으로 그 모두를 함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소한 양심적 사진가들과 포토 저널리스트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익숙해지기 위함이나 추상적인 안도감을 견고히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소비되어야 하는 사회는 다만 아직 그 사진의 피사체가 되지 않은 사회일 뿐이다. 하지만 사진은 그것을 목격한 사진가가 의도한 어떤 양심이나 도덕을 알리는데 있어서 언제나 관람객과 적당한 거리를 가진다는 단점 때문에 거의 대부분 그 사진의 고통이나 양심이 왜곡된다. 이러한 거리의 왜곡은 페데레코 가르시아나 허세욱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들, 남편 그리고 친구 였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연을 간과하면서 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지극 당연함에서 조차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 장의 사진을 통한 교훈이나 전진하는 역사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신기루인 것이다. 이쯤되면 포토 저널리즘은 점점 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더 장관인 광경에 종사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어떠한 현상에도 그것의 원인이나 이유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 지배하기 간편한 '통치된 종족' 으로 취급 받게 되는 것이다.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젊은이의 다수가 사진가인 세상이다. 모두가 무언가를 기록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기준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아름다움은 추함에서도 일어나는 감정이다.)자체, 또는 아름다운 빛을 쫓는다. 따라서 이들의 사진은 시각예술의 미덕에서 탄생한다. 포착을 통해 주제가 동반되지 주제를 위해 포착이 집합되진 않는다. 주제를 위해 포착을 집합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과도 같기 때문에 긴 호흡이 필요하지만 시각예술적인 포착은 디지털처럼 쉽게 삭제, 재생이 가능하기 때문에 호흡이 짧다. 이 때문에 기술적인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고 사진에 주제나 제목 그도 아니면 피사체의 이름 대신에 촬영장비, F넘버, ISO, 셔터스피드 따위를 기록하게 된다. 오늘날 만인의 사진가들은 목격한 피사체와 소통하는 대신 카메라의 뷰파인더와 카메라에 내장된 첨단 컴퓨터 장치와 인터페이스를 가질 뿐 이다. 때문에 로버트카파의 양심이나 메시지를 탐구하진 않고 카파를 그저 신화나 영웅쯤으로, 한번쯤 봐야 하는 스팩타클한 사진기술로 생각하고 마는 왜곡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포토 저널리즘에 복무할 필요는 없지만 피사체에 슛(Shot)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배포가 용이한 오늘날의 시대에는 더욱 더 소통의 방법과 연민의 전이를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이는 무명씨를 찍고 장비의 내역을 설파하는 사진의 기술에서 무명씨를 알아 내고 피사체의 이름을 부여 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기술과 시각예술과 기록이 아무렇게나 섞여 배설된 주문이 아닌 피사체 그대로의 이름 말이다. '허세욱 2007년 4월1일' 이런 식으로 소통이 시작되는 '각성된 사진' 으로 부터 우리 사회의 인식은 변하기 마련이다. 자본으로 부터 개발되는 사회가 아닌 책임과 연민으로 얽혀 인간으로부터 변화하는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상수 선생의 'one eye' 는 사뭇 탐구할 만 하다. http://www.ssahn.com/

2008/03/24 23:41 2008/03/24 23:41
DrunkenSTAR 이 작성.

지식인

2008/03/18 15:27 / 생각
지식인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민중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언어의 어려움, 또는 이해 못할 수준의 단어와 문맥을 살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이를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권력과 우상의 언어를 답습하는 것을 경계토록 한다. 또한 오늘날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전환된 정보 전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상 이미지의 왜곡과 디지털적 재생산에도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된다. 다만, 이 불쾌한 나라의 고약한 사회현상에 대고 꼭 해야 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 게다가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이 어려운 얘기는 고사하고 이제는 대놓고 터무니 없는 논리로 관료가 되려 하고 세상을 지배하려 든다.
2008/03/18 15:27 2008/03/18 15:27
DrunkenSTAR 이 작성.

생활 속 배임 사례

2008/03/13 17:54 / 생각
배임하지 않기 1탄
마케팅 담당자는 1999년에 전산통합 된 국민연금 가입 내역서를 기준으로 기술자 등급을 적용하는 클라이언트의 조치가 마땅치가 않다. 이번 영업건에도 클라이언트는 국민연금 가입 내역서와 의료보험증 사본을 스캔해서 제출하라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회사에는 충분한 고급, 중급 인력이 없다. 리소스는 바닥나고 이번 영업건은 덩치가 커서 오래도록 작업을 해왔는데 투입 인력 때문에 놓친다는 건 너무 억울하다. 영업활동비며 판공비로 쓴게 얼만데.. 마케팅 담당자는 영업대표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며 한가지 묘안을 얘기한다. 어차피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 쪽에서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을 직접 조회할 수는 없다, 사본 스캔이므로 약간의 이미지 조작을 하면 초급이 중급이 되고 중급이 고급이 되면서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인력으로 셋팅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역시 큰 영업건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영업대표도 마찬가지다. 조작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조작할 경우 공문서 위조와 배임을 하게 되는 것. 탄로날 위험도 매우 적다. 나중에 감사에 대비하기 위해 서류는 다른 사람의 정상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일단 영업을 따고 볼 것인가. 영업대표는 결정한다, 여기서 손 때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배임하지 않기 2탄
하청을 받는 기업의 재무 담당자에게 원청 사업자가 2억원짜리 가라(가짜)세금 계산서를 요구한다. 이런 세금 계산서가 필요한 것은 비용처리를 할 수 없는 비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업에 써야 할 자금이 비사업적인 곳에 쓰였을 때도 필요하다. 일종의 비자금 처리용이다. 하청 기업은 원청에서 사업을 받는 입장이라 행여 괴씸해져 버릴까봐 전전긍긍이다.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일전에 천만원, 2천만원씩 가라 세금 계산서를 만들어 준게 원인이다. 더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지, 하청 기업 담당자는 속이 까맣게 탔다. 도대체 어디다 썼길래 2억이나 필요한 것인가, 겨우 30명이서 20억정도 매출을 하는 소기업에게 2억원짜리 계산서를 어떻게 처리하란 말인가. 재무 담당자는 결정한다,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횡령과 배임이 적절히 섞인 생활속에 비일비재한 케이스다.

아무 댓가도 없이 신주인수권을 주질 않나, 망해가는 회사를 아무 댓가도 없이 기꺼이 사주질 않나, 헐값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하고 이를 인수 할 수 있도록 망을 봐주질 않나.. 이 속에 어떻게 배임이 없을 수가 있나.
2008/03/13 17:54 2008/03/13 17:54
DrunkenSTAR 이 작성.

결국 특검은 이재용을 풀어 줬다. MB 가 집권하면서 그동안 삼성으로 부터 관리를 받아온 사람들이 정권과 사정의 요로에 진출하다 보니 특검은 사실상 참여정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알박이 신세가 되버린 듯 하다. 헌데 이 알박이는 꼰대도 부리지 못하고 영 본새가 시원치가 않다. MB적 사상으로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하다보니 비즈니스가 되게 하는 MB 사상의 원천인 '오로지 이익 추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기업도 그저 프랜들리만 할 뿐이다. 도대체 어떤 기업이 200억 적자를 내고 망해가기 직전인 비즈니스에 전망이 있다며 그 주식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주고 사들일 수 있단 말인가. 시장은 비즈니스를 버렸는데도 삼성의 계열사들, 제일기획,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에스원,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벤처투자 는 시너지 운운하며 스스로 제살을 380억이나 깎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들의 주장대로 자발적 경영 행위 였다면 정신과 병력을 의심해봐야 할 지경이다. 이렇게 예측 가능한 상황도 판단하지 못하는 경영을 두고 삼성이 어떻게 초일류 기업이라 할 수 있을까. 김경준이란 사기꾼에게 농락 당하고 계약서의 문맥도 제대로 독해가 안되는 MB 가 기업가 정신이나 창조적 실용주의 따위를 얘기하는 엄청난 모순과 그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다. 특검이 기업의 어떤 사회적 윤리나 일정한 모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경영 원칙 따위를 집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각 개별 기업, 즉 비즈니스와 인더스트리가 달라 제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바쁜 기업들이 갑자기 한데 모여 이 따위 말도 안되는 시너지를 논리 삼아 하필 이재용이 대주주로 있는 적자 기업을 인수할 수가 있냐는 것이다. 상식도 이런 상식이 없다. 게다가 그렇게 비즈니스를 잘 알고 프랜들리까지한 특검이 우리 나라 기업의 조직 메카니즘을 모를리가 없다. 이런 상식은 목로의 주점에서 조차 안주거리가 되지 않는다. 맞다, 이는 구조본의 일상적 업무 속에 이들을 모아 단단히 단속하는 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증거가 없다? 이재용도 잡지 못하는 증거라면 모든 맥락이 닿아 있고 악의 축이며 온갖 패악질의 근본인 이건희는 무슨 증거로 잡을 수 있겠는가. 증거를 못찾은 것인가? 증거를 애써 보지 않는 것인가. 다시 삼성이 한국 사회의 요로와 요지에서 자본의 올무를 놓고 쥐새끼들을 기다리는 사회로 돌아가야 된단 말인가. 그리고 MB 와 함께 노조를 죽이고 자원봉사처럼 노동을 제공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이 비즈니스 프랜들리 하는 감동어린 동원이라며 선전하는 사회가 될 것인가 말이다. 무섭다, 이건희가 버젓이 살아 너도 나도 이건희처럼 되려고 영어 사교육에 몰입하려는 이 사회가 무섭다.

2008/03/13 16:12 2008/03/13 16:12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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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2008/03/12 13:01 / 생활

꿈이 많았던 잠에서 깨면 아내와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 걱정이 빗살처럼 쏟아진다. 괜한 걱정, 이라며 양치를 하고 중얼거리지만 천년동안 모든 아비가 그러했듯이 깨어 있으면서도 온낮을 설친다. 아무런 걱정이 없던 시절에는 무슨 일이 벌어 질 것만 같아 초조했다.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기까지 겪어야 할 이루 짐작할 수 없는 모진 고통과 살고 숨쉬려는 아이의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힘겨움만 생각해도 눈알이 벌겋게 뜨거워진다. 하지만 남편과 남자의 이러한 뜨거움은 아내와 아이의 그것에 비하면 우리 삶의 더 없는 인연의 경계에 서서 너무 가볍고 낭만적인 자세일 뿐. 염려는 뜨겁지만 그 모진 경계를 넘지 못하고 서성인다. 대신 남편은 오랜 일처럼 본능처럼 전투하듯 세상의 경계를 넘어 생활을 지탱하려 욕심내고 부대낀다. 아내는 제 욕심에 마신 술과 꼬릿한 담배 연기에 무기력해지는 남편을 걱정하고 아이에게 얘기한다. 어느날 딱 한번 읽어 준 동화처럼 새가 다닐 길을 내려 아빠는 늦는다고. 제 인연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세상의 경계를 넘는 남편을 사무치게 기다리며 속태우는 국경의 밤처럼, 나도 아내도 서로 염려하며 늙어 간다.

2008/03/12 13:01 2008/03/12 13:01
DrunkenSTAR 이 작성.

국회의 필요

2008/03/11 15:52 / 생각

여야 모두 공천이 한창이다. 사실 오늘날 국민들은 제와 제공동체를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는 것에 그닥 관심이 없다. 단물 다 빠진 노인네가 경륜이란 파렴치로 끝내 기득권을 수성하는 모양새에도 될때로 되라지다. 각 당이 개혁이란 진부한 이름으로 벌이는 공천심사가 흥행중인 것은 이른바 공천은 남의 집 불구경처럼 굳이 손쓰지 않아도 솔찮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다리품을 팔아야 하는 선거와는 다른, 일종의 써커스이기 때문이다. 진정성 없는 정치언어인 '국민의 뜻', '민심' 따위로 어르고 때론 협박하지만 결국 권력과 계파, 능력은 없지만 전략적이란 이름의 정치 연예인, 죄가 덜 있는 도토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 결국은 옮바른 사상이나 윤리도 없으면서 돈과 권력에 시종 노릇을 할 사람들을 뽑아야 하는 긴 과정을 겪어야 하는 국민들은 지루하고 피곤하다.
국회의 필요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은 여전히 민주주의란 에메랄드빛 커튼에 가려 도저히 담론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국회의원이 더 이상 공동체의 대변자가 될 수 없는데는 공감하면서 여전히 국회의원을 뽑아야 하는 갑갑한 현실을 '개혁' 할 수 있는 것은 국회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이다. 제 필요에 의한 작은 공동체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기능을 잃은 299명이 얽혀 있는 부패의 고리가 도대체 우리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무슨 소용인가. 2999명, 또는 그 이상의 공동체 대변자가 제 필요에 의해 생겨나 더 많은 연대와 우애를 소통하고 다질 수는 없는 노릇일까.

2008/03/11 15:52 2008/03/11 15:52
DrunkenSTAR 이 작성.

구역질

2008/03/04 14:52 / 생활

바라보면 온통 구토의 조각들만 보인다.
세상이 토해놓은 패악과 모순에 구역질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역질은 내가 품었던 욕심과 불안한 감정의 덩어리 때문이었다.

2008/03/04 14:52 2008/03/04 14:52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