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를 떠올리며

2008/02/20 16:13 / 생각

라울, 체와 함께 멕시코를 넘어 쿠바 해변에 도착한 피델은 80명의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고 마침내 쿠바 혁명을 이뤄냈다.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체제에 접어 든 쿠바에 안주하지 않은 체는 콩고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9명의 미국 대통령을 당해내며 갈등했던 체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내놓으면서 49년전 덥수룩한 수염으로 기세등등하게 쿠바 해변에 상륙했던 혁명가들은 비로서 완전히 죽거나 늙어 버린 듯 하다.

미국의 정치선전으로 인해 북한과 다를바 없는 빨갱이의 나라로 취급 받아 온 쿠바가 알려진 것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통한 쿠바(라틴) 음악과 1990년대 부터 일기 시작한 혁명가 체 의 자본주의적 이미지 소비가 급속히 번지면서 부터다. 깡패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기 가득한 트럼펫, 콘트라베이스의 리듬은 고사하고서라도 굳게 다문 입술에서 질기게 피워 오르는 시거는 체 의 상징이 되었다. 체 는 곧바로 맥주 받침, 티셔츠, 관광지 좌판의 기념품에 찍혀 패션으로 입혀졌다 벗겨지고 젖었다가 푸석푸석 말려지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는 체 의 평전(붉은 양장에 덮힌)을 끼고 다니며 유아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짐짓 혁명인양 착각하며 겉멋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체 의 파르티잔적 투쟁과 뼛속까지 사무친 민족해방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체 의 이미지화는 팝아트가 상업적으로 대중에게 스며든 맥락과 일치한다. 어쨌든 체 는 멋있지만 미국의 선전처럼 '과격한 사회주의 게릴라'에 불과하고 그의 동지로 여겨지는 카스트로가 지배하는(그것도 독재로)쿠바는 자유세계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깡패가 득실대는 소굴로 알려졌다.  

우리가 체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맥주병에 깔린 체 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뿐이다. 어느 누구도 체 의 리얼리티와 불가능한 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어떤 부조리와 조응시키려 하지 않는다. 쿠바는 더욱 심해서 케네디의 지략(?)으로 봉쇄 조치된 나라에서 고작해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나라로 변신되었을 뿐이다. 최근 마이클 무어의 영화"식코"를 통해 잠시 등장하는 쿠바의 의료체계가 아픈 미국인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호혜적 장면마저도 쿠바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장면에서 세계 최강의 나라에서 병들어 치료 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원수 지간의 나라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고 하여 어이가 없다거나 쿠바 사람들이 이러한 무상 의료체계와 라틴 음악에 맞춰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쿠바나 그것이 어느 한쪽의 척도로 최고가 되고 최악이 되는 구도일지라도, 인간의 행복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최고에서도 행복하지 않으며 최악에서도 행복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리얼리티 아닐까. 따라서 이제 피델이 물러 난다고 하여 쿠바 민중이 해방 된 것도 행복 시작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입장과 미디어의 서구적 메가폰에 귀기울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사상적 귀머거리야 말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델이 체 의 영웅적 이미지만큼 상업적으로 전파될 소지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쿠바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서구 언론들은 하나 같이 늙고 장출혈로 병든 피델의 무기력한 현재 모습을 부각시킨다. BBC 마저도 피델의 인생이란 포토슬라이드를 통해 젊은 시절 체 의 카리스마를 능가하던 피델의 모습은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 있다. 이것은 피델의 리얼리티가 체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만한 상품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거둔 어떠한 성취나 불행이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감춰질 징조이다. 이러한 징조는 지금까지 세기를 풍미한 파르티잔의 모든 저항 역사에서 확인 된다. 확실히 제국주의와 파트레스에 과격하게 저항한 파르티잔 중에 체 만큼 유명해진 사람도, 서구 사회의 일부 지식인(장 폴 샤르트르 같은)에게 짐짓 존경을 받는 혁명가도 없을 것이다. 이는 체 가 저항한 식민지제국주의가 자본제국주의로 변하면서 이념과 혁명도 이미지로 소비될 수 있고 자본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디어나 시장이 그것을 상품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줄 때 뿐이다. 피델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난다. 이미 그는 노병으로 죽지 않고 금방이라도 벽에 똥칠할 분위기로 취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의 혁명 정신 따위는 안중에 없다, 다만 병들고 늙은 이미지가 싫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역사적 뒤안길로 쿠바의 해방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강경했던 카스트로의 권력을 이양 받은 라울의 실용주의가 미국과 소통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을 통해 드디어 쿠바가 자유 세계의 세계화적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부류들은 오로지 다국적 기업들과 투기 자본 뿐이다. 피델은 곧 소비될 수 있는 이미지인지 시장에서 확인되고 약탈의 대상인지 폐기처분 될 대상인지 가려질 것이다.(사실 아직 활발한 저항 활동 중인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도 언제 이런 자본의 처분 대상이 될지 알 수 없다.) 멀리 있는 체 나 피델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저항 정신으로 남아 있어야 할 우리들의 파르티잔에게도 영웅적은 아닐지라도 무엇에 그토록 저항하고 죽어 사라졌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번도 조명되지 못한 우리 시대의 혁명가 "김산"과 "이현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다.

2008/02/20 16:13 2008/02/20 16:13
DrunkenSTAR 이 작성.

로스쿨과 고려대

2008/02/18 12:49 / 생각
로스쿨은 돈 없는 서민이 인권 의식은 고사하고 민중의 마땅한 법률적 지위나 권리 또한 지켜주지 않는(겨우 미란다 원칙 고지 정도로 국한된)공권력에 계급이나 신분 따위로 차별 받는 부조리한 원리를 개혁하고자 도입되었다.(물론, 이것만으로 사법개혁의 완성을 논할 수는 없지만) 한해에 400~500명 밖에 배출하지 못하는 사법 구조를 바꿔 한해 3000명(특별한 이유 없이 1500명으로 깎였지만)을 학교의 테두리에서 공부시켜 최소한 지금 보다는 많은 법조인을 사회에 배출하여 사법 개혁을 이루자는 것이지 정치 쟁점화 되거나 대학별 순위를 매기는 도구는 아니다. 연세대나 성균관대학교 보다 못한 로스쿨 배정 인원에 대한 고려대생들의 분개를 보면서 이명박의 개발주의에 열광하고 이건희의 돈을 존경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역시 본질을 겨냥한 올바른 분노의 대상을 통찰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교양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나아가 법학교육위에 고려대 출신이 1명 밖에 되지 않아 이런 분통 터질 피해를 봤다고 하니 고려대의 교양적 퀄리티를 미뤄 짐작케 한다. 역시 본질을 보지 못하는 무리들이 고시를 통해 법조계에 진출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증언하는 꼴이다.
2008/02/18 12:49 2008/02/18 12:49
DrunkenSTAR 이 작성.

우리는 무엇인가?

2008/02/16 17:23 / 생각
한국노총의 수상한 행보는 대선 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경영 견제, 노동자 권익보호와 같은 상식적인 정체성에 반동적인 한국노총의 비즈니스 프랜들리화는 단순한 줄서기나 사상적 변질로 이해될 수 없는 깊은 계산이 깔려 있는 듯 하다. 한국노총을 위한 변명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계 극복이 요원한 운동적 노력을 접고 반동적 정치화를 통한 현실 변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잠시 영혼 따위도 접어 두자는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나가는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나아가 총선을 겨냥한 한나라당 후보 지지 선언은 이러한 반동적 맥락을 통한 그들만의 깊은 인내라고 보여진다.

단, 그러한 계산이 통할 때 오늘의 반동이 내일의 혁명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짐짓 상식 수준의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은 계량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용서가 안되는 부분으로서 타협을 통한 체제 변화는 좌파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자본과 권력의 욕심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용에 대한 도덕적 노력에 있지 않고 사용 가능성에 대한 반영구적 착취에 있는데도 이를 수용하는 태도야 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적인 측면에서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이러한 양심보다 가치 전가와 반동적 인내를 통해 정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경고한 노동조합의 권위주의와 권력화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명박 지지선언을 한 한국노총은 이것을 '정책적 연대, 정책협약' 으로 규정하고 협약을 이행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노정간 정기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좀 더 어느 방향으로 프랜들리해지지 않는 이상 결론적 협의는 불가능한 형태가 바로 이러한 연대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따라서 한국노총은 이용득 위원장이 "한국노총은 조합이 주인인 조직, 주인이 결정해준 대로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 이라는 해묵은 다수결 원칙을 액면으로 깔고 상상할 수 있는 이면으로서 손쉽게 제도권 정치권력에 진입하기 위한 포석을 떠올릴 수 있다. 대선 직후 이용득 위원장의 한국노총 위원장 불출마 선언이 이러한 상상력에 신빙성을 부여 한다고 볼 수 있다.

제도권 안에서의 변혁은 세력화가 정치적 무기가 된다. 특히, 소신과 정책적 결의가 없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세력화는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앞선다. 제공과 착취의 계급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의 투쟁을 제도권 안으로 투입시키기 위해 세력이 아닌 정책적 타협을 시도한 한국노총의 발상을 시대 소명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세력화를 배제하고 접근한 노동자들의 순진함이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몇몇 노동조합 간부들을 정치권에 흡수시켜 자신들의 정책을 도입, 추진하겠다는 의지로서 결과적으로 세력화를 무시한 협소한 권력지향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주종적 병폐인 지역주의,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체에 대한 권력 열망, 정책적 대타협을 빌미로 한 전시정치의 극명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하며 치부를 환하게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 이를 위한 제도권 권력의 쟁취가 필요함을 선언한다. 민주노동당은 하나의 세력이다. 최소한 이러한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 진입은 새로운 체제 즉,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란 뚜렷한 가치를 천명하기 때문에 엄연한 세력이고 구체적인 당원과 관념적 지지세력을 통해 세력화 되었다. 최소한 한국노총이 어떠한 '질곡' 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몇몇 기득권 편입론자들을 우선적으로 권력화시키는 치졸한 정치 메카니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지만 이미 포석은 집을 짓고 말았다. 한국노총의 이러한 행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악랄함으로 두고두고 피력될 것이다. 질곡의 파괴와 희망적 건설 의지가 자기 실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체제적 안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선언한 볼상 사나운 '짓'으로 규정할만 하다. 하지만 이는 정치가 아니라 "처세" 즉, 한국사회와 정치의 대표적인 패단과 결탁한 처세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한국노총의 악질적인 결탁은 지금껏 한국사회의 주류가 걸어온 길이고 그 길의 원심력에서 튕기지 않으려는 매카니즘의 본질과 마주하고 있다. 자신의 실존적 의지를 연구하거나 사유하지 않는 사회에 민주주의나 공화주의 따위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자리 잡혀 있을리 없고 따라서 그것을 기대하는 정치 세력조차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민주화 이후에 직접 선거는 지역 재래시장을 돌아 다니며 의미 없는 악수와 포옹을 통해 "아는 사람 만들기 정서"로 추락했고 이런 식으로 접근해도 쉽게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들의 얕은 정치 의식을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의 질긴 생명력 때문에 완전히 변질 되었다. 현학적인 계급적 성찰은 접어 두고서라도 자신들이 필요한 물질, 보호받아야 하는 생존 환경과 인간적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다만, 손안의 따뜻함,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아는 사람이란 이유가 개인적 정치 사유가 되는 의식의 본체를 지닌 바보들의 대표성을 우리의 주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한국사회의 정치적 주류의 길이었다. 이러한 주류들의 정책과 메니패스토는 형식적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봉건적인 지역주의를 정치인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발생이다. 따라서 한국노총은 봉건적 주류의 길에서 그들이 버린 '질곡의 극복' 을 마술적으로 해보이겠다고 말하는 "판타지 집단"인 것이다.

오늘날의 갈등은 자기 자신과 자신, 자신과 자본, 사람과 자본의 이항대립들에서 비롯된다. 소위 엘리트 대 민중 이라는 해묵은 계급대립은 종결되었다. 이러한 종결의 중요한 관점은 불행이도 대립의 해소로 부터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립의 주체인 엘리트는 지식 엘리트, 노동 엘리트 등으로 각개 분활되어 사회전반적인 엘리트의 자세와 비판적 계몽에서 벗어나 그들의 활동 근거 내지는 활약 범위에서 기득권의 확대를 노리는 객체로 주저 앉아 버렸다. 민중은 민중 대로 오래된 염원인 "잘사는 생활" 의 방향을 관념적 엘리트가 아닌 활동 범위내의 가깝고 구체적인 엘리트의 방향에서 찾고 그것을 생활의 비전으로 삼아 버렸다. 따라서 엘리트와 민중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경쟁"할 뿐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 설정이 상호간의 기여와 담론을 통한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력한 것"에 의해 설정되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란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자본은 많은 자와 적은 자의 갈등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로 자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본은 부와 가난에 동시에 작용하여 동시에 같은 믿음을 생산하는 놀라운 능력의 총체이면서 스스로 유물적이지만 실체적 물질이 아니라 인식적 믿음을 제어 하고 전염시키는 유기체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가난은 언젠가 돈이 많게 될 것이란 생각을 끊임 없이 주입 받는 "자본샤머니즘"을 불러 일으킨다. 부자는 경멸해도 자본은 숭배한다. 자본의 추구라면 정치나 민주주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는 존경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을 얻었을 때 받을 경멸은 믿음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잘 살 수 있는데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상점화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 사회가 이런 믿음을 조장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에 견주어 이른바 "그보다 못한 자신", "실패한 자신", "부자이지 못한 가장" 으로 자발적인 폄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과 인간적 본질과의 대립에서 대중은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만성적 패배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피곤함은 자본의 유기적 특성 뿐만 아니라 정치 세력에게도 유용한 침투 경로가 된다. "부자일 수 있는 왜 더 노력하지 않는가" 간단한 구호를 밀어 넣으면 대중은 알아서 작동한다.

자본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을 받은 세력화된 정치 집단이 동력을 제공하여 반응하는 사회속에서 자본의 헤게모니로 인한 폐해와 자본이 복속한 인간정신을 증언하는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 인간을 대상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본민주주의" 의 해괴한 기치만이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소통하지 않는 유령의 상태는 마르크스가 우려한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소외가 드디어 "완전한 고립"의 상태에 접어 들었음을 신호한다. 이것은 명백히 "미래가 우리 사회에 보내는 경고" 다. 하지만 이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 엄중한 선택이어야 한다. 더 이상 역사와 민족을 들러리 세우는 신화적 재물이 아닌 사유와 고독을 통한 결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근 이른바 진보의 세력화였던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한국노총의 보수우파 지지선언은 어떤 선택과 어떤 사명에 의해 극명하게 갈라진 현상이란 점에서 조명해야 할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물론, 역사를 관통한 찬란한 반사가 아니라 바로 현재 시점을 대하는 거울이란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노총이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전제로 하였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 극복의 고육지책으로서 승리한 보수우파 정치권에 줄을 대고 노총출신 인사의 정계 진출을 꾀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돌파가 아니라 흡수가 될 것이다. 한국정치사를 조금이라도 음미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정치권이 그러한 역사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다시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한국노총의 행보가 얼마나 진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인지, 진보가 아니면서 진보인 척 한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면서 등장한 "제2의 노무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노총은 내가 누구인가? 나아가 "우리는 무엇인가?" 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이유에 더 이상 응답을 거부하면서 내면적 분열의 길 즉, 스스로 소외의 길로, 완전한 고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민중의 조난 신호는 간증으로 해결하고 자본의 부름은 하느님의 계시로 설교하는 한국개신교의 길과 거의 다를바가 없다.

선택의 범위에서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평등파는 아니지만 다른 평등파들과 함께 탈당을 감행한 나는 왜 총선을 코앞에 두고 내포만 한채 아직 탈당하지 않는 심성정, 노회찬의 여전한 잔류에 조급함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가. 두 의원의 탈당을 통해 급속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전진시키기에 앞서 더욱 급한 민중적 당면 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명백한 경고를 묵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한미FTA" 이다. 국회비준처리를 앞둔 한미 FTA 를 대하는 교양 있는 사람의 자세, 나아가 당파를 떠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진보 진영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미FTA 란 사안 만큼 보수와 진보, 시장주의와 사회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가르는 요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첨예하고 시대 변혁적인 내용들이 숨어 있는데도 이를 온몸으로 맞닥드릴 대게의 민중은 그 어떤 조항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 한미FTA 를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따른 선진국 진입으로 생각하는 찬성론자들은 글로벌이란 의미 조차 미국으로 한정시킨 오류에 빠져 있다. 국회 비준을 서둘러 미국 의회가 비준을 할 수 있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철 없는 논리를 펼 수 있는 것도 글로벌과 미국을 동격으로 논 근본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미FTA 가 우리 경제에 가져올 악영향에 대해서는 두루 살피지 않을 만큼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미FTA 를 하나의 경제협정으로 봐야 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미FTA 는 태생과 전개는 "토론의 부재" 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진할 때나 그것이 만약 상호간에 비준되어 발효가 되더라도 철저히 반민주적인 토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그저 글로벌 경쟁력을 키운다는 앞뒤 자른 허울 좋은 선전만 되풀이 함으로서 민중들이 겪고 견뎌야 할 어떤 것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공공재를 민영화 시키고, 시켜야 하는 법률적 강제성 마저 띄고 있는데도 정부는 시장 경쟁을 통해 경쟁력과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답만 내놓을 뿐이다. 이것은 현정권과 차기정권이 하나의 거대한 커넥션을 미뤄낸 것을 짐작케 한다. 즉, 큰정부의 노무현은 정부가 해야 할 분배와 조정의 정의, 공평한 공공재의 역할 등을 시장의 기능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정부로 볼 수 없고 이를 이어 받은 차기정권의 작은 정부는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정책적 조치라는 점이다. 즉, 시장에서 알아서 할테니 굳이 정부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이 되지 않으면 주민등록등본도 민간 기업에서 적정하다는, 그리고 그들이 믿을만 하다는 시장이 정한 수수료를 내고 띄어야 할 판으로 속도 좋게 가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소위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자들이 충정 어린 민족통일, 민족해방을 주장하고 대동단결 투쟁을 하더라도 한미FTA 가 비준되기만 하면 동서독의 통일 과정인 경제 통합, 정치 통합의 본보기적 통일 과정을 절대로 거칠 수 없게 된다. 한미FTA 가 비준된다면 남한과 북한을 절대 국가 대 국가로 보지 않는 민족주의자들도 어쩔 수 없이 남과 북을 국가 대 국가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한미FTA 가 비준되면 남북한의 교역이나 개성공단을 통한 대외교역에서 관세나 한미FTA 가 정하는 통상 절차 없는 교역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독일이 GATT 를 통해 동서독의 교역을 민족교역으로 인정 받고 관세나 기타 통상 절차 없이 경제 통합을 이뤄낸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미 관계가 핵폐기만을 골자로 하기 보다는 개방을 통한 시장교역에 까지 확대 될 경우 북미간 수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테면 북한의 WTO 가입을 예상할 수 있고 이 경우 남한과 북한에 있어서 통일은 구호와 염원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남북FTA 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 또한 민족통일의 관점에서 이뤄질까? 천만에 말씀이다. 이미 한미FTA 가 그러한 상황까지 모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한가한 민족 염원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상정, 노회찬의 선택을 조급히 기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보다 이들의 반대투쟁이 지닌 정당한 이유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있기 때문에 반대는 반대를 위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는데 있다. 대중 전반의 이러한 스탠스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무관심과 지식인들의 비판적 책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경부 운하를 건설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천연덕스럽게도 학문적 논리인 양 얘기할 줄 아는 박석순이나 추부길과 같은 그릇된 지식인들처럼 한미FTA 를 찬성하는 지식인들 또한 신자유주의의 수혜자로서의 논리로만 대중을 계몽하려 한다. 한미FTA 를 추진할 경우 이익이 안되는 것들만 열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수혜 받을 것들을 미리 준비해 놓은 "이기적인 자본지식인" 들이 그러한 계몽에 적극 나선다는 것이다. 그들의 계몽은 유효 적절해 보인다. 중산 부루조아 계급은 자신들도 수혜 대상일 것이란 기대를 하고 무산 프롤레타리아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하루 하루를 사는데 정신이 없다. 두 계급의 격차가 커질 수록 "혁명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시간에 도달" 하는 역사적 증명에 가까워질 뿐이다. 자본은 혁명을 허락하는 이념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자본과 시장을 극복하지 못한 절망의 시간은 공멸을 의미한다.

숭례문의 전소 사태를 보며 문화나 문화재에 대한 공공성이나 보존의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분노의 대열에 동참한다. 후대에게 물려줄 어떤 사명을 들먹거리지만 불행이도 사건을 관전하는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를 구성하고 지배한 생활 방식은 성장과 개발 중심이었다. 문화재는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게는 어느 일요일 도심에서 펼쳐지는 시위의 불편함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안락함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에 대해 관심을 거세했기 때문에 이 사회의 문화재는 도시 한복판에서 불에 탈 수 있는 것이다. 관심과 관계의 확장에 실패한 지식과 인식의 덩어리는 분노의 지점조차 찾지 못하고 오로지 신나에 불을 붙힌 한 노인에게 쏟아진다. 우리는 불에 탄 문화재와 시위로 교통 불편을 겪을 때나 똑같은 분노를 표출한다. 명백히 우리 사회가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알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나날이 고뇌하였다면 안타까움과 분노는 분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가난의 고통, 상처투성이의 야만적 시대를 살아온 기성 세대가 아무것도 모르고 물질적 풍요와 자유의 열매를 따먹는 현세대와 대화를 거부하면서 부터 다시 그 가난과 야만을 물려주려는 어떤 복수의 구도처럼 보인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냐만, 세대간의 소통 단절은 이미 오래전 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들어야 할 역사" 를 듣지 못하고 시대가 달려 가는 데로 달려갈 뿐 왜 달려 가야 하고 왜 달려 가도록 하는지,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옥죄는 "정체성의 부재"를 낳았고 시장자본주의의 지배에 손 쓸 수 없는 사회의 근거로 남았다.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왜 낙산사를 태우고도 숭례문을 태우는 짓이 반복되는지를, 수많은 민중의 삶이 초토화된 FTA 의 실제 상황을 보고도 한미FTA 를 추진하는 정권과 국회가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지켜야 되고 물려 줘야 할 것이 남았는데도 그것을 파헤쳐서 성장 개발해야 한다는 경부대운하 찬성 지식인들의 말도 안되는 논리가 활개치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다른 세계에서 실패한 역사를 끌어 와 다시 실패를 재연하는 한국사회의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한번쯤 고민해 보았다면 언제나 성장과 개발만을 강조하여 곧 당도할 것만 같은 선진국을 거들먹 거리는 정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수사만을 일삼는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 선진국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선진국이 되는가" 이다. 이것은 성장을 통한 선진이 아닌 "성장 없는 선진" 이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지켜내야 하고 우리의 사상과 생활을 지배하는 자본으로 부터 인간의 "자율"과 인간들간의 "연대" 를 찾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우리는 바닷가에 밀려온 검은 기름때를 온몸으로 막아낼 수 있는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길래 우리가 지켜낸 것을 자본과 자본의 하수인인 기업과 정치인에게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우리 사회와 주위 환경을 잘 살펴 보기를, 우리는 누구이며 또 무엇인가.
2008/02/16 17:23 2008/02/16 17:23
DrunkenSTAR 이 작성.

그러니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불과 1분 거리에서 90여대의 소방차도 끄지 못하는 철옹성이었단다. 숭례문은 탔어도 전시행정은 찬란히 남아 이명박을 위한 귀빈용 소방복과 하이바를 준비해 둔다. 맞다, 어디 속편한 민중이 있겠는가 저런 몰골 따위가 된 '문화재' 라는 것을 보고 말이다. 외주, 하도급 중심으로 비용을 줄이고 관리만 하려는 현대경영의 총아적 마인드는 애초에 윤리나 공공선의 가치관이 없으면 관리 자체가 전시성을 띨 수 밖에 없다. 보여지는 효율성에 집착하고 문제가 생겨도 여러 갈래로 책임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자는 살아 남는다. 이명박은 말한다, 나라 전체가 이런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고 짐짓 어른인양 훈계를 한다. 하지만 시시비비도 도덕적 관념도 없는 사람의 경영이란 어떻게 해서든 자율적이며 저비용의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최고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것을 널리 퍼트린다, 태안의 저 자원봉사자들을 보라며,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다고 선언한다. 비웃음만 나온다. 댓가 없는 노동의 수혜를 본 자들, 기득권자들, 잘못한 이들의 의기 양양한 지배적 안심일 뿐이다. 노동을 제공한 자는 기름때에 피부가 벗겨지고 호흡이 곤란하다. 이것도 자신의 쥐꼬리만한 의료보험으로 고쳐야 한다. 시시비비가 없는 변호사 몇명의 구라와 방어논리에 동원된 봉사의 매카니즘에 열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명박은 추구한다, 기업이 잘못했으면 자원봉사로 때워줘야 한다고(일명 몸빵이다), 다 한민족 아닌가. 그래, 서울 광장에서 왜 저런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붉은 악마의 관념을 성공적으로 상업화시키질 않았던가. 무모한 열정이 이명박과 같은 무식한 사람, 교양없는 사람을 키워냈다. 또 말한다, 국민이 가슴 아프니 돈을 모아 숭례문을 복원하자고. 조선시대처럼 댓가 없이 부역하라는 말이다. 누가 관리를 잘못해서 이 지경을 해놓았는가? 왜 가슴이 헛헛해서 그 앞에 있는 치과도 다니기 힘든 국민들 주머니를 털어 내려 하는가? 세금은 이런 공공재, 어떤 공공성을 지켜내고 유지하자고 내는 것이지 권력 잡는데 도움되라고 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국민이 가슴 아픈데 왜 성금까지 내야 하는가? 그런 기가 막힌 발상이 어떻게 나오는가? 시시비비를 가리란 말이다, 시시비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의 면책구상이란 이토록 천박하다. 숭례문이고 흥인지문이고 문화재 지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금은 꼬박꼬박 잘 낼터이니, 역사에 기록할 시시비비를 따지란 말이다, 이 쪼다들아.

2008/02/12 15:32 2008/02/12 15:32
DrunkenSTAR 이 작성.

어쨌든 탈당 했다. 자주파를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너 나은 진보와 더 나은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다. 자주파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며 섣부른 처방을 내리는 것도 삼가한다. 그들의 양심적 신념은 높이 살만하다. 종북으로 인해 친북이 어떤 해악적 정서가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사망 직전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양심적 사람들의 양심을 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주파의 그러한 양심과 진보적 신념도 이해할만 하다. 친북이 그저 조선노동당에 남한의 사정을 보고하는 2중대인양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저 조선일보나 하는 시대착오적 반공주의로만 치부될 수 있다. 자주파의 그것은 분단을 방점으로 우리 사회의 거대한 모순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주파의 그 방점을 변명하고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보가 하나의 틀로만 있기에는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시대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라고 본다. 사실 탈당을 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즉시 처리되었다는 메시지를 당으로 부터 받은 것도 그렇지만, 황급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탈당한 동지들의 전화에도, 한때 같은 당원이었던 자주파의 서슬 푸른 패권적 발언에도 가슴이 시렸다. 지금 이 지점에서 경계해야 할 센치함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한때 동지였고 서로의 비빌 언덕이었고 그것을 갑작스럽게 부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저주하고 혹자는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지만 그들을 진보의 해약적 표본으로 삼는 여론에는 결코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을 이러한 정치적 이슈로 인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침해하는 것은 미래의 진보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진보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이제 새로운 진보 신당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어느 신문기사처럼 발가 벗겨진 자주파와 평등파가 걸어야 될 시련이 온전히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시대가 이따위고 세대가 단절되었다고 해도 진보는 나아가는 것, 어디로든지가 아니라 정녕 사람 하나를 보살피기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 다만 자주파의 변하지 않는 오랜 부조리에 대한 투쟁보다는 계급과 민중적 저항으로 나아가려는 것, 정치적 집권을 통한 인간다운 체제적 변화를 원하는 것, 자주파의 그 사상적 완고함 만큼이나 또다른 시대적 진보로 나아가야 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탈당과 함께 새로운 진보 정당으로 보내는 엄연한 지지이며 희망이다.

2008/02/06 02:55 2008/02/06 02:5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