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의 '수구꼴통을 위한 분열선동' 이란 발언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고 경황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자주파의 거대한 패권의식의 실체와 전속력으로 부딛쳐 산산이 조각난 몸둥아리를 추스리는 허둥지둥이랄까. 민중을 위한다는 허울 좋은 총론을 빌미삼아 반민중적 수사와 각론이 난잡성을 넘는 이 불안하고 불쾌한 시대에 그나마 민주노동당이 남아 있어 생기는 그 어떤 희망이 김창현씨를 통해 조립 불가능한 파편으로 흩어져 버렸다. 게다가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선대본부장까지 맡았던 김창현씨의 인식 속에는 더 이상 진보의 근원적 성찰이나 자기 반성 따위는 찾아 볼 길 없고 더욱이 민주노동당이 이미 자주파, 다수파의 그들만의 권력리그가 되어 있는 실체적 진실을 쏟아 내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실망스럽다.
지역당의 위원장 선거에서 보인 관료적인 당규의 적용 논리도 참아 줄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선거의 승자도 패자도 모두 민노당 당원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개 평당원의 소심한 인간정리가 얼마나 이용하기 좋은 표심이었으며 민중이란 이름으로 기득권 수성을 획책하는 보수정당의 애용품으로서의 알량한 당심이었는지 깨닫고 나니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분단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거대한 부조리로 생각했었지만, 김창현씨의 논리대로라면 종북주의는 친북주의이며 친북주의자가 아니면 반북주의자로서 통일의 과업을 통한 평화 지향이 아닌 분단의 고착화를 선동하는 친미 반민족주의자가 된다. 북한과 남한의 관계를 국가대 국가로 규정함이 반북이 아닐 진데 종북이 아니면 통일이 안되는 논리야 말로 해괴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도리어 이러한 주장이 통일의 진정성에서 나왔다기 보다 종북 인식은 오래된 민주노동당의 관행이었으니 이번 대선의 패배와는 무관하다는 책임의식을 통해 여전히 자주파의 종북주의야 말로 패권 수성에만 동원되어 작동하는 진정성이라 생각된다. 어디에도 71만표라는 눈 씻고도 해괴한 결과를 막막한 심정으로 대하는 평당원의 그것보다 못한 치졸한 세력 다툼과 함께 반협박을 일삼으니 김창현씨로 인해 이 분열의 당위성이 100퍼센트 충전되는 역설이 가능해져 버렸다.
민중승리, 민중믿음 같은 민주노동당의 추상적 구호가 보수정당의 상투적 명분과 일치하고 있는 이러한 오만한 권력 투쟁의 결과가 분열적 자성이 아니라 통합적 대동단결이어야 한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부침개처럼 뭉게고 마는 단결의 조장은 마치 개발독재식 뭉치면 산다의 망령을 보는 듯 하다. 차라리 분열이라 부르는 분열에서 찾는 희망이 휠씬 창조적이다. 이것을 분열선동이라 불린다면 그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분열된 신진보의 모임이 수구꼴통들과 부르조아적 야합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악랄한 저주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었을 터, 따라서 그 용감무쌍함은 참으로 고약하다. 이러한 고약스러움은 지금 자신들이 민중의 희망을 빌미삼아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 지난 대선의 참혹스러운 결과를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지점까지 오게 하였다. 민주노동당이라는 통에 사심 없는 노동, 공평한 권리, 자본으로 부터의 해방, 숭고한 인권등과 같은 진보의 사표가 세력화, 내부 권력화를 위한 패션으로 옷을 갈아 입는다면 도대체 왜 나와 같은 평당원이 불필요한 파벌 매카니즘에 허망함을 느껴야 하며, 보편적인 진보의 가치는 그대로인데 왜 그들의 권력과 기득권으로 더럽힌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것도 패션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자주파의 패션은 싫다. 인민과 민중의 눈높이에 있던 민주노동당의 시선이 종북의 틀에서 북한의 관심과 눈치를 살핀 것이 자주파의 미시적 자주성인지 물어야 할 판이다. 민주노동당을 넘는 민주노동당에 진보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이러한 종북주의의 폐기 때문인가? 참으로 어이없는 고약함이다.
검색어 '2008/01'에 대한 6 개의 검색 결과
영어로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은 사실, 영어라도 잘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사람간의 변별력을 키워 구분해내겠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모든 사회적 현상을 시장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변별력 없는 교육은 없고 시험으로 줄 세우지 않는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교육도 사람에 따라 받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삶의 방식이 교육으로 부터 나온다고 봤을 때, 영어는 더더욱 이 사회의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 논리적인 사람이면 좋겠지만 반드시 누구나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논리의 수준-논술이라는 시험의 형태로 변별력을 가려야 할 필요도 없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것을 보면 그 사회의 퀄리티를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자심감, 애정, 열정 따위가 무엇에 종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의 문제가 사교육의 실태로 부터 시작하는 모순 조차 천작하지 못하는 교육의 실체적 수준을 보고 있으면 이 사회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근원적 질문에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구에서 인간 답게 살아야 하는 어떤 방법을 가르치는 사교육은 없다. 즉 우리 사회의 사교육 문제는 삶의 방식이 아닌 것들에 변별력을 부여 했던 교육 정책과 그런 시스템이 교육이라며 세상에 퍼트리고 다닌 기성 세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등과 꼴등이 존재해야만 하고 일등은 대접하고 꼴등은 도태시키는 인식이 철저할 수록 그 간극에는 위선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위선을 통해 꼴등은 억압 받는지도 착취 당하는지도 모르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일등의 위선을 위한 꼴등의 실존이 우리 사회의 교육을 요약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영어집중, 몰입 교육을 하고 자사고를 늘리면 사교육비가 줄어 들고 기러기 아빠가 퇴출된다는 위선으로 수혜적 민중은 실존적 위협을 받는다. 결국 더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방식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그래서 우린 더 많이 버는 것 말고는 다른 행복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흉흉해지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하얀거탑의 최도영을 고참으로 모실 수 없는 사회 보다 최도영 처럼 정의와 소신으로 살 수 없는 현실적인 긴장이 사람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마술적인 수술 솜씨를 현대의 정치, 사회 환경에 맞게 자기 확대의 기술로 승화시킨 장준혁을 소신 없이 존경해 마지 않는 속물 근성을 꾹꾹 누르는 일도 적잖이 심장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게 될 수 없는 선민들의 가녀린 심장이 경화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탓인지 비교적 선과 악의 구별이 명확한 '뉴하트' 가 등장했다. 생활 곳곳에서 관계를 정의하는 정치의 실체를 꽤뚫어 도무지 이분법적 구도로는 독해가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아 가던 하얀거탑에 비해 뉴하트는 일면 상큼, 경쾌하다. 최강국이 아무리 소위 집단 갈굼을 당해도 그의 선한 의료 행위을 갈구 하는 대게의 사람들을 실망시킬 드라마의 전개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악의 무리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꽤고 째는 솜씨도 최고인데다가 인간까지 긍률히 사랑하는 면모라니.. 속물로 살아 가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보다 더 나은 새심장이 어디 있을까.
새로운 심장으로 이식 되었지만, 최강국의 심장이 병원은 물론이고 사회는 더더욱 바꿀 수 없는 건 결코 염려가 아니다. 심장은 홀로 뛰었지만 그 뜨거움으로 함께 뛰었다고 선전하는 것은 공익 광고에 불과하다. 정치적 욕망을 위하여 환자라는 재료를 활용하는 의사들의 매스는 시장경제주의의 계급에 따라 온도가 달라진지 오래다. 강제적 특진비와 빈번한 의료사고를 통해 병원과 환자는 매스의 온도만큼이나 차갑게 식어 있다. 최강국의 심장은 분명 뜨겁지만 매스를 부벼 현실의 온도를 높일 순 없다. 병원이 특진이나 사회적 지위로 환자를 갈라 시장의 원리에 따라 편의점의 손님처럼 구분 짓는 의료체계와 사회의 병리적 이상 현상에 충실히 복무하는이상 병을 치료 받을 알량한 문명의 혜택은 요원할 뿐이다. 최강국과 같은 의사를 네이버가 찾아 주는 것도 아닌데 오염된 세상에서 병을 제어할 입장이 아닌 허약한 현대인은 의학적 재료에 불과하다.
심장도 마음도 고쳐주려 애쓰는 최강국의 등장이 자못 시원스럽긴 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최강국이라도 병원과 보험사의 자율적 기준이 확대되는 의료 보험 서비스가 법률로 제정 되기라도 하면 환자를 살리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행위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사회로 변하고 만다. 벌써 부터 의료 행위의 구조적 제공자가 시장 진입을 시작하고 더 나아가 그 시스템 마저 공급과 수요, 마케팅의 시장 원리로 재조립 되어 선진국형 의료 서비스 라는 이름을 획득하고 있다. 더 많은 이익을 획책하지 않는 서비스가 없듯 의료가 서비스가 되는 이상 환자는 경제적으로 많고 적음으로 구분된 손님이 된다. 담보가 많거나 사회적 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게만 은행의 문턱이 낮듯 병원 또한 손님의 아픔의 정도가 아니라 시장 지위적 위계에 따라 서비스가 달라지는 예상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린 이런 상황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지 개인의 경쟁력 문제로 치부하기 일쑤다.
사회적 시스템을 홀로 극복할 수 있기 위해 치달리는 사회는 절대로 안락할 수 없다. 시스템은 끊임 없이 시스템의 지배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인간의 경쟁과 긴장 구도를 고무시킨다. 봐라, 병원에서 VIP 대접 받는 손님을 너도 VIP 가 되는 꿈을 꾸어라, 라는 식이다. 시스템은 유지되고 개인은 환상에 매료된다. 뉴하트는 불행이도 부자가 된다, 선진국이 된다는 공상으로 가득한 머리가 최강국 같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의사가 있으니 의료체계는 괜찮다는 그야말로 마술을 만들어 내어 선전하는 치졸한 드라마다. 이러한 드라마의 해피엔딩이란 고작해야 최강국과 이은성을 제외한 시스템의 구성원들이 서둘러 화해를 이루거나 뜨거운 '뉴하트' 로 계몽되어 반전을 이루는 것 밖엔 없다. 여전히 의료체계는 괜찮다, 시장경제주의에 입각한 선진국형 의료 서비스 만세는 그대로 남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 또한 스스로 경쟁력을 잃은 신체적 허약함만으로 자책할 것이다. 병원이 시스템과 사람들의 영악함 속에 이익집단으로 취급되어 질수록 환자는 병원으로 부터 더 이상 인격적 대우를 기대할 수 없는 킴스클럽의 자반고등어가 될 것이다. 뉴하트의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현실보다 더 신빙성 넘치는 그 수많은 의료 사고와 모순 투성이인 의사 조직이다. 이러한 현실을 뜨거운 심장만으로 덮어 버리고 시시비비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않는 뉴하트는 뒷맛이 매우 쓰다.
이명박 정부의 정권 인수 작업은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것들의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일련의 반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른바 우파적 개혁의 첫 삽질인 정부조직개편안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념 우파가 아닌 경제 실용 우파라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예상대로 효율 중심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효율이 모든 사회 가치에 긍정적 발효를 도울 수 있다는 언어 자체의 도단으로 인해 우리는 효율적이면 모두 좋다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효율은 모든 작동의 기름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만 된다면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던 괜찮다는 기계적 성장론에 빠진 이유도 효율과 같은 자본주의의 메카니즘만을 신봉할 뿐 좀 더 근원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토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의 근저에는 대게의 민중이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무원의 철밥통과 복지부동의 오만한 자세도 실용적으로 바꾸겠다는 일종의 외과적 복수를 깔아 여론의 동의를 얻겠다는 계산이 있는 듯 하다. 다만, 이러한 복수심으로 정부조직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근원적인 질문이나 담론으로 다뤄지지 않을 몇가지 중대 미래가 없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은 기우일까.
먼저, 통일부의 문제는 통일을 외교와 같은 대외적 관점으로 전환시키는 일대 사변에 가깝다. 즉 이념적 보수가 아니어도 통일은 이제 민족적 문제가 아니라는 실용적 관점이다. 사업이 되면 하고 사업이 안되면 파기하는 기업의 관점이 통일을 간단히 수술해낸 것이다. 통일회의론은 이미 유행처럼 번져서 세대를 불문하고 통일이 줄 모순의 파괴가 폭넓게 두려움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부조리를 운동적으로 계몽해내지 못한 지식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통일은 되기 전에도 되고 나서도 여전히 대내적 관점이어야 한다.
교육은 인재라는 재료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은 이미 교육을 버린 이명박 당선자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도 그 맥락을 찾아 볼 수 있을만큼 명백하다. 기준을 두지 않아야 하는 교육과는 달리 인재는 기준을 통한 인력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라 봐야 한다. 인재의 기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계급의 분리다. 이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비 완화를 총론으로 한 자사고의 추가 설립 등의 공약은 허구라는 점이 입증된다. 그야말로 인재가 엘리트가 아니고서야 성립이 되지 않는 교육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맹렬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출신성분으로 계급을 갈라 놓고 심각한 소통 불능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악랄한 철학이 설치된 것이다.
지식경제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과학기술은 그 중요함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과학이 신화가 되었던 황우석 사건을 통해 과학을 더욱 경제적 부류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자연과학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자원도 경제적 성장과 에너지 구상의 개발건설의 취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화로운 자원의 활용과 보존의 관점으로 진보되어야 할 것이 주문되어 환경부가 주축이 된 환경자원부로 통합 되었다면 그나마 덜 코미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효율과 실용적 관점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효율과 실용이 모든 근원적 문제를 진단해서는 안된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상실은 물질의 유무와 시장의 가치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악랄한 파괴와 상실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권력과 시장 원리로만 미쳐 돌아가는 모순과 어둠의 세상일 수록 인간정신의 근원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러한 소임 마저도 종말을 선언하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온전히 가졌으면서도 지키지 않거나 돌보지 않던 권리들이 하나씩 제한되는 범국가적 조치들을 보면서 쁘띠(부르주아지)다운 적절한 이민의 발상 따위로도 위로가 되긴 어려웠다. 실은 감정과 위선적 배설을 일삼던 블로그에 올 한해 만이라도 서양미술사와 미학에 대해 차근히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새빨간 종족의 수레' 엔 위작된 한국현대미술과 비자금으로 걸릴 미국현대미술로 가득하여 끌기를 포기하라고 강요당했다. 자유의 문제가 반공의 아우성이 아니면 성립 불가인 나라의 처지를 비관하더라도 자율적 자유의 권리를 위작과 비자금이 결정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한대 줘 박고 싶은 폭력의 욕구는 대게 말투나 비웃는 듯한 표정에서 나오지 자신과 다른 생각의 치밀한 논리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의견의 사람들과 세상을 공동체로 일구고 있는데다가 누구나 말해도 되는 자유와 말해야 되는 자율을 누려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이라는 수동적 자유는 지나치게 근본적이어서 관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는 인간의 결정 상태에서 비로서 자유롭다. 따라서 반공으로 인한 자유의 상태 또한 근본적인 피해 불가의 자유가 아니라 각 개인이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율의 상태로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서 그 결정이 긍정적 변화를 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이 많은 관계로 민주주의 국가라는 틀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변화의 주도가 대의적이거나 다수 결정체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 자율이 모두에게 보편적인 자유를 보장한다고 볼 수가 없다.
이때 대의적이거나 다수의 틀에서 벗어난 소수의 자율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우리에겐 주먹 보다 멀고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법이 있다. 게다가 사법 개혁을 반대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노임을 털어 호소를 할 수 있다. 막스베버의 오래된 아포리즘을 추억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절차와 복지부동에 매달려 민원의 현실과 책상의 판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도 호소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얼마나 소수의 자율을 선의로 보장하는가? 우리는 구청이 있는데 왜 시위를 하고 법이 있는데 왜 불법 집회를 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소수의 자율을 불법과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못된 시위로 규정하는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다수의 결정에 편입하지 못한 소수를 경쟁에 낙오된 계급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이러한 낙오된 소수를 위해 경찰청은 본격적으로 물대포와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여 지져서 모두 연행하겠다고 발표 했다. 다수의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전경에 죽창을 휘두르고 무엇보다 경찰이 하지 말랬는데 했다는 불법 시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쟁에서 아직 낙오되지 않았다고 믿는 다수는 시위에 대해 일종의 착각에 빠져 있다. 경찰은 시위를 진압해야 하는 행동으로 다수는 시위를 불편을 초래하는 사회 불안정 요인이라 생각하는 착각 말이다. 둘다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한번도 시위의 원인과 교통 불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 시위를 하는가 법이 있고 구청이 있는데, 이런 다수의 거세는 사유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불법 시위가 문제라며 경찰을 립싱크 하는 자세 또한 민주주의적 교양이라 볼 수 없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시위는 불법이 될 수 없고 교통을 포함한 모든 일반의 사회적 동작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위는 있을 수 없다. 먼저 불편 없는 시위는 시위가 아니다. 시위는 주장과 관철을 위한 활동인데 관심을 일으키고 주장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짜장 묻은 신문지 밑에서 썪을 구청의 민원서류 만큼도 되지 못한다. 시위는 불편하지 않던 다수에게 불편을 주어 환기시키고 주장을 일깨워야 하는 법이다. 시위를 불편함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을 불법이라고 한다면 자율을 규제하기 때문에 자유라 볼 수 없으니 공산당 독재 쯤 되지 않겠는가.
폭력적 시위에 대해서, 라는 단선적 폭력도 폭력을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다. 각 개인의 사이코 패스가 뭉쳐 집단화 되지 않는 이상, 새벽의 저주로 모두 좀비화되지 않는 이상 폭력은 상호 작용이다. 시위가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의 치밀한 논리를 들어 보지 않으려는 말투와 같은 태도로 인해 촉발되는 것이고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 다수가 일방적으로 비폭력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다루는 상호간에 비폭력을 담론화 시킬 수 있는 법이다.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가? 시위대가 더 폭력적이었다?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휘둘렀다? 아니다 경찰이 먼저 평화적 시위를 막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모두 우문우답을 동어 반복할 뿐이다. 폭력의 상호작용이 폭력을 맞이할 준비인 전기 충격기나 토끼 몰이식 백골단 검거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는 지난 20년전을 돌아 보면 될 일이다.
똘레랑스적 가치가 성장과 개발의 가치보다 못한 사회일수록 인간과 자연에 대한 품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려는 표현과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에 시위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 수단인데다가 다수의 주위를 환기 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 기능을 담당한다. 독재와 파쇼의 국가가 아니고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가에서 각 개인이나 집단의 표현 기능은 어느 것 하나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불법의 틀안에 가둬 인간의 근원적 품위를 손상시키는 어리석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국가는 더 이상 민주적 태도를 근간한 국가로 볼 수 없다. 시위와 집회의 헌법적 자유가 겨우 5만볼트짜리 전기 충격기로 제한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국가의 품격이란 참으로 어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시위로 불편을 겪게 되는 모든 사회적 장치들은 그 시위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한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고 들어 봐야 한다. 그 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고 관심을 가질 수록 생계형이던 정치형이던 시위는 준다. 누가 이 추운 엄동설한에 물대포 맞으면서 괜히 길바닥에 나오겠는가.
그리고 시위로 불편하다고? 미안하지만 불편함을 더 겪길 바란다. 같이 사는 사회에서 저만 잘살려는 욕심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더 불편해야 같이 사는 법을 배울테니 어쩔 수 없다. 불편하니 관심 좀 가져 달라고 하는 짓이니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 전기 충격기가 왠말이냐..
대통령 인수위의 인수공정이 벽두 새해를 날카롭게 가르고 있다. 공식적인 업무를 끝냈다는 보도와 함께 생각해보니 BBK 김경준이 메모한 '한국 검찰이 이명박을 무서워해요' 라는 단발마가 문득 떠오른다. 권력이 바뀌고 보니 권력의 코드를 어떤 민원보다 빠르게 감지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영혼이란 것도 실은 별게 아니라는 듯 연신 하트모양의 제스쳐를 이명박 차기 정부에 날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검찰만이 아니라 정부라는 공공 업무의 대국민적 기관이 온통 이명박을 무서워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인수위가 업무 인수가 아니라 정책 입안이나 정책 집행적 기관인양 행세를 하고 다니는데도 마땅한 견제가 없다. 이 또한 국민이 노무현 정부의 반대급부로 표를 행사하여 탄생한 이명박 차기 정부의 수혜라면 수혜다. 역시 이명박 정부의 탄생 배경에 노무현 정부 타도와 같은 복수의 감정과 거시적 경제 살리기 내지는 계급적 경기 부양이라는 공약이 난자, 정자 역할을 했다는 단적인 분석에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일찍부터 정부의 정책이 저렇게 바뀌었어야 했다는 것처럼 간주되는 상황은 여전히 난자, 정자의 수정이 제대로 착상 되기를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소망인 셈이거나 그렇다고 여기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인수위의 무소불위한 권력적 상징성은 빠르게 위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를 위한 변명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절대 다수의 국민이 선택한 당선인의 대리인 겪인 인수위에 아양도 떨고 애교라도 부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공복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변명 말이다. 조아림은 이명박 당선인에게가 아니라 그를 선택한 국민에게 하는 일종의 간접적 제스쳐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변명에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대의제라는 공화적 명분을 학술적으로 알던 모르던 수긍을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국민은 정부의 어떤 기관에서 주권자적인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불쾌하고 고압적이며 관료적인 태도와 업무 처리가 돈 많거나 기득권을 가진 일부 계층에게는 무한 조아림으로 바뀌는 이젠 진부하기까지한 모습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변명은 국민에게 진정으로 봉사하지 않는 오랜 전통만큼이나 견실하고도 발등에 불부터 끄는 변명일 뿐이다.
국민에 봉사는 고사하고 영혼이 빨린 좀비로서 그 불안한 자태를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도 인수위나 이명박 보다도 상위에 있는 민주주의나 공화적 관점에 비추어도 잘못된 코드를 맞추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잘못 인식된 민주주의나 공화적 관점 때문에 생긴 영혼의 잠식일 수도 있겠고 더 현실적으로는 자신들의 밥그릇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부처는 없어져도 인원은 감축하지 않는 인수위의 결정에 망극한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조아려야 하는 권력의 대상을 찾는 더듬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아무데나 대고 조아림의 신호를 보내버려 무식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선거를 통해 국민은 정권을 바꿔 버렸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바뀐 것이다.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는 공무원의 수가 대략 1만명 이라서 각 정부부처와 공무원의 권력 찾기가 대통령을 향하는 지점은 여전히 성스러운 밥그릇 안에서 머문다. 정부의 복무 대상은 국민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는 집어 치우자, 정부의 복무 대상은 미시적으로 국민, 거시적으로 국가로 나눠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꾼 국가는 무엇인가? 헌법상 국가 즉 영토, 주권, 국민 따위의 실체가 없는 국가의 개념은 사실 정부의 정치적 복무 대상이라 볼 수 없다. 정부의 정치적 복무 대상은 바뀐 국가의 실체적 개념이 되어야 하며 오늘날 국민이 선택한 국가의 실체는 "한나라당" 이다. 즉, 국가는 국민이 아니라 한나라당이다.
대통령제에서 어려운 것이 사실 이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절차적 선거를 통한 권력의 이동은 노무현에게서 이명박으로가 아니라 (구)열린우리당에서 한나라당이라는 것이고 집권여당으로서 한나라당은 곧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국민의 뜻과 염원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기 때문에 실체적 국가라는 생각이다. 이는 국민이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통치의 대상이기도 한 공화주의에도 마땅히 부합된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노무현에게서 이명박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국가를 바꾼 셈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대통령제라는 권력 집중형 체제와 인물과 스캔들 중심의 선거가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깨달아야 한다.
선거 한번으로 그동안 국민적 합의로 적용되던 정책이 이명박과 코드가 맞지 않으니 냅다 바꿔서 하트 제스쳐를 취해 버리는 정부와 공무원들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데다가 제대로된 인식이 없으니 불친절할 수 밖에 없고 영혼이 없었으니 반성은 고사하고 사유의 기회도 가지지 못한 좀비에 필적할 만한 존재였음이 인수위의 속도만큼이나 전속력으로 증명 되었다. 국가가 어딘지도 모르고 권력의 냄새만 맡으면 어김 없이 조아리는 덩어리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들어난 셈이다. 멍청아~ 한나라당에 조아렸어야지, 곧 해체할 인수위라니... 일찍이 그들에게 충고해준 이는 없었나보다. 어쨌든 훌륭히 밥그릇은 챙겼으니 절반의 성공이다. 먹고는 살아야지, 앞으로 얼마나 조아려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볼 일이다. 이래서 국가는 없어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게 누구에게나 본능인가 보다.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