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지지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비판적 지지는 이름을 달리하며 구차하게 한번 더를 구걸하기도 하고 정말 허물을 덮어도 될 만한 능력이 있을지 모를 의구심 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비판적 지지는 종종 사표론과 만나 공연히 표를 죽이지 말고 의미 있는 곳에 던지라고 유혹한다. 현재의 대선구도 처럼 진보 인줄 알았는데 결국 진보가 아니었던 개혁 세력의 당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보수 세력의 당선 가능성이 높을 경우 더욱 빛을 발한다. 지난 대선에는 절반의 진보가 이뤄낸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오늘날 그 절반은 짝퉁과 함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진보 진영으로 세력화하는데 실패 했다. 민노당이 지난 대선보다 더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지점이 교육과 양극화 해소, 신자유주의 반대에 대한 정책을 빼고는 볼 것 없는 공약들로 열거 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진보적인 사회 체제를 만들고 싶어도 민노당에게는 유혹하기 쉬운 비판적 지지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두려움 이다. 막상 집 한채 없는 서민일지라도 집값이 떨어지면 어쩌나 두려워하고 세계화가 모두 잘 살게 해주는 변화인 것 처럼 호도된 영향 탓에 세계화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때문에 진보를 지지하거나 표를 주지 못한다. 어이 없지만 두려움은 비판적 지지의 동력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그대로 제도화시킨 민주주의를 이뤄내지 못하고 결국 사표인 비판적 지지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오늘날 정치구도, 대선구도를 만든 책임은 노무현과 참여정부 그리고 한번 더를 구걸하는 386 정치인들에게 있다. 이들의 정치 계몽은 문국현과 이명박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권영길과 문국현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집단 뇌사 상태를 조장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에겐 여전히 비판적 지지의 악마적 유혹이 필요하고 이를 협박하기 위한 유일한 정치 공학으로 다시 단일화를 떠올린다. 단일화는 어떤 요구가 아니라 하나의 협박에 가깝다. 즉 비판적 지지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추잡한 협박이다.
진보적 사회 체제를 원한다면 비판적 지지에 쓸데 없는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바로 뭔가가 좋아 질 것만 같은 개발성장주의에 현혹될 이유도 없다. 진보적 정치, 사회 체제 안에서는 1%만 더 잘 살아도 통계적으로는 1인당 GNP 가 오르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는 누구나 조금씩 더 잘 사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복잡하지 않다.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으며 누구나 일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악이나 비판적 지지도 아닌 누구를 진정으로 지지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다.
검색어 '2007/11'에 대한 6 개의 검색 결과
오늘날 공화적 대의 정치에서 선거는 제도적인 혁명에 가깝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 뿐만 아니라 정치 조직적 에너지와 사회 전반의 담론이 집중되어 폭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OECD 가입국으로 사회 깊숙히 세계화가 점진하고 있는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 주식을 하고 부동산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혼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 남으려는 시도는 완전한 시대 착오이다. 장기적으로 개별 자본은 집적된 자본으로 이동하고 단위 노동력을 가진 대게의 민중은 잘 살기 위해 노력했던 추억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물론 자신의 생각도 바꿔야 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왜, 노력했는데 못사는가?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는 현대 정치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제도 개혁인 셈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늘날 저항해야 하는 것은 군부독재나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계몽하는 이유가 독재자도 언젠가는 죽는지라 한계가 있지만 자본은 한계도 물리적 임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잘 살라는 유혹으로 인간의 영혼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고 기생하며 정치의 폭발적 증후가 시작되는 선거에도 예외 없이 흡혈한다. 잘 살려면 시스템, 즉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잘 사는 것은 모두 굉장히 잘 사는 말도 안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두 조금씩 잘 사는 체제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한 혁명을 누가 꿈꾸고 있는지 놀라운 집중력으로 살피지 않고서는 자본과 자본의 이익에 투철한 프로파간다와 진정성을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구별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대선 구도는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분해야 할 참담함이다. 온갖 범죄의 지명수배자들이 나와바리를 놓고 패싸움을 벌이는 구도에서 유권자는 선거법의 정신적 구속으로 인해 조난 신호조차 보낼 수 없다. 지지와 비판을 공유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유권자의 모든 권리는 선거일의 한표로 요약되어 버렸다. 유권자가 권리의 보유자가 아닌 인간으로 서 투영되어야 할 교양이나 태도 따위가 개인 문제로 치부되면서 우리는 시스템을 바꿀 현실적 기회를 잃어 버리고 있다. BBK 와 이명박만 남아 있는 이러한 선거는 한국 정치의 수치다. 이런 선거를 치뤄봤자 어떤 합당한 결과나 잘 살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민주화를 가장한 반민주주의 세력에 패배했고 부패의 순환고리에 지쳤다. 혁명은 커녕 공멸할 선거만 남았다.
사람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결국은 온전한 자본의 지배를 의미 하며, 그 패해 또한 비인간적인 이해를 통해 부조리에 복무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사람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것을 현실적 지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패배주의를 양념한 비판적 지지의 지류일 뿐이란 생각 입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이상주의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과정의 위대한 도그마이며 이로 인해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에서 정책과 체제 변화의 실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중요한 건 본인은 진보라고 간주하면서 찍을 사람이 없다는 세력 위주의 생각만으로 진보라는 자신의 성향이나 사상을 가볍게 버리고 마는 저항 불능의 심장에 의지의 산소를 불어 넣는 것 입니다. 진보라는 것 복잡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자본과 시장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고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위해 진정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 얼굴을 한 사람이 진보 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정확히 권영길을 얼굴로 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 비현실적이라서, 세력이 아직 약해서 지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지루하니 스스로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되겠다고 자기 포기 선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 세상은 천천히 진보합니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명백히 현실을 반영하고 세상이 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보라고 생각 합니다. 비전이라 얘기하지만 사람을 희망으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은 없고 다채로운 부패와 단일화, 대립각만 있는 정치 현실에서 꾸밈 없고 끊임 없는 진보와 공평하고 사심 없는 노동을 꿈꾸어 봅니다.
삼성을 왜 싫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후배가 있어요, 한술 더 떠서 삼성 정도면 그만한 로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하고요. 반도체와 휴대폰을 만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 받는 기업이니 어느 기업이나 하는 로비를 가지고 회사 무너 뜨릴 마냥 덤비는 건 대중영합주의라고도 합니다.
삼성에 대해 싫어하고 좋아하는 취미가 아니지요, 사람들은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을 종종 헛갈리는 데요. 삼성의 행위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지요. 좋고 싫음이 아닙니다. 김용철 변호사로 부터 불거진 삼성 비자금 의혹의 본질은 이건희, 이재용 일가가 사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재편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오래도록 비자금을 조성하여 국가 기관을 매수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물음은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물어 보는 겁니다. 이건 현명한 판단의 축에 들지도 않습니다. 이런 행위가 죽어도 옳다고 한다면 더 이상 진전을 볼 수가 없겠지요. 보수주의자도 이런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유롭게 시장이 스스로 거래하고 시장에 의해서 수요와 공급이 제어 되어야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건희 일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손도 아닌 그들이 시장을 쥐락펴락 했으니 보수주의자나 자본주의자에게도 심각해야 할 문제 입니다. 결국 옳다는 부류는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밖에 볼 수 없겠습니다. 삼성의 비자금은 사실이 아니다란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재작년 이학수와 홍석현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를 잊으셨나요? 차명계좌는, 내부 문건은, 무엇보다 7년동안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한 사내의 몸부림은 어떤가요, 무조건 주종관계적 배신으로 이해하는 구린 사고로 내부 고발자라며 무시하면 될까요? 삼성에서 닦고 조여주고 기름쳐주는 기계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로비를 린다 김이나 송일국으로 대입하여 드라마틱 버전으로 생각하면 그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로비를 돈, 술, 섹스, 골프로 이루어진 총체적 인간 설득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유희에 의해 가장 해퍼지는 것이 인간인지라 로비의 도구들은 매우 유혹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설수도 아니고 모랄헤저드도 아닐까요? 로비를 린다 김이나 송일국의 드라마틱으로 생각하게 되면 이것이 반사회적 범죄인지 조차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일단 받고 일에 영향을 미치면 뇌물이되고 쌍방 모두 범죄 입니다. 저렇게 로비해야 된다는 법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린다 김이 아침 프로그램에 버젓이 얼굴들고 나온다고 합법 아니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을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제품 경쟁력이나 마케팅 능력이겠지요. 하지만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오직 제품 경쟁력과 마케팅 능력만으로 척도되지는 않겠습니다. 세계에 모범이 되는 기업이라면 기업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윤리, 노동복지, 경영자 마인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은 기업의 많은 기능 중 하나만 취한 상점에 불과 합니다. 삼성이 과연 글로벌 상점일까요? 기업일까요? 삼성이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라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사회 윤리와 복지 측면에도 기여하는 좋은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경영자의 경영권을 방어하지 않고 정치권과 영합하여 부패를 일삼지 않는 투명하고 옳바른 기업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삼성이라면 이것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휴대폰 만들고 반도체 만들어 파는 글로벌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모범 기업이 되기 위한 중대한 시점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군사 독재시대에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민중의 저항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거대 자본과 시장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절실한 시기 입니다. 회자되는 양극화, 비정규직, 한미FTA 가 모두 이 본질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삼성은 이러한 본질의 먹이 사슬에 가장 높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에 저항하는 것이 대중영합주의는 아니지요. 누군가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통해 군중심리를 일으켜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요? 그 분은 배신자도 아니고 하물며 영웅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뒤늦게 양심의 소리를 경청한 측은한 한 인간에 불과 합니다. 그도 말했지만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처벌 받아야 되는 사람 중에 하나 입니다. 그를 이 사회적 처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되지요. 다만 그가 처벌 받기 전에 이 사회가 지켜줘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양심입니다. 그가 홀로 고민했을 때는 개인의 양심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것은 사회적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사회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강력한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울림을 삼성, 그리고 국가 권력기관이 듣게 하기 위해 사회적 양심을 모으는 의지를 가지느냐 거세하느냐는 그 사회의 양심의 건강함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참여연대]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
견제 받지 않은 권력, 삼성을 말한다.
[잠수함토끼]
삼성과 악의 축
검찰은 떡집인가? 떡집에 왠 수사권
삼성은 해체 되어야 한다.
삼성에 침묵한다면, 기자실은 없어도 좋다
더욱 격해지고 있는 대선 정국과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인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예년 보다 뚝 떨어진 기온으로 가슴이 시렸던 시월 한달 동안 두명의 도시빈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양시의 노점상 탄압에 비관한 이근재씨는 10월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인천건설노조 소속 비정규직 전기원이던 정해진씨는 10월27일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마지막으로 분신 사망했습니다.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와 경찰폭력에 사망한 하중근 열사의 조의가 채 풀리기도 전에 우리가 일상으로 걷는 거리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비정규직이란 이름과 인간 답게 살려는 외침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요구와 열망이 있던 6월항쟁 때에도 이렇게 많은 동시대인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은 인간성과 의식을 잠식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자본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그 사나운 지배력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름을 지향해야 할 자유로운 의지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세욱, 정해진 열사는 깨지 말았어야 할 꿈에서 깨어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절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것에 맞서는 자신의 작은 노동이 아무리 필사적이어도 결코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의 고독은 번민으로 고통스러웠을 것 입니다. 그가 떠나고 기적처럼 견뎌야 하는 가족들을 보고도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릴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열사로 불리는 것 조차 모자랍니다. 어느 시대의 시보다 소설보다 더 시적이고 허구적인 현실이 무섭고 슬픕니다.
노점은 누구나 똑같은 목구멍에 그나마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어떤 이의 좌판입니다. 여러분은 그 좌판을 없애고 청계천에 꼭 물을 흘려야 겠습니까? 그래야 국가가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글로벌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된 이후 전보다 보호 받으며 잘 산다는 노동자는 없는데, 왜 노동자들 괜찮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말만 원칙이 되는지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대선보다, 삼성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킴스클럽의 진열대 위에 처분을 기다리는 고등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지 37년 되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이뤘고 노동조합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사 반란 정권을 단죄하기도 했으며 평화적으로 문민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하는 노동자가 그대로 이고 도시 빈민들은 자본과 권력의 폭행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지경 입니다. 어떻게 노동자의 외침이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그동안 여러번이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노동자의 깃발은 여전히 핏빛 입니다. 우리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을 한낮 과격 단체로만 치부하고 왜 저들이 저리 싸우는 데도 또 싸우고 또 투쟁하고 죽어가야만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권영길이하고 이석행이하고 비자금이라도 삥뜯을라고 하는 것인가요? 허세욱, 정해진, 하중근, 이근재 노동자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선, 삼성이 중요한가요? 그렇다면 내년에도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심연을 헤엄치는 등푸른 날생선이 될 것인지, 우리들의 선택과 행동이 그렇게 할 것 입니다.
다른 블로그 이름은 "잠수함 토끼" 다. 시민단체 활동가, 수필가, 변호사, 교수, 사업가 그리고 그들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 스무명이 참여 하고 있다. 아직도 몇분은 헤매시고 계시고 어떤 분은 도중에 캠프 대변인으로 가버려서 참여를 못할 것 같고 몇 분은 나눔과 생명평화결사 활동이 너무 빡세서 들어와 보지도 못하신다. 괜찮다, 나중에 만나서 술 한잔 하면 된다.
잠수함토끼 http://www.submarinerabbit.net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
비밀방문자 2007/11/27 20:3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