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화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서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며 현상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세계 여행이나 조기 유학, 영어 교육 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오류다. 이것은 세계화의 여러 교과서가 말하는 세계적 변화에 대한 조응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에 의한 국제화일 뿐이다. 세계화는 그 보다 더 현실적이며 큰 개념이다. 세계화는 통신 혁명과 시장의 지배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가 변혁되는 과정을 말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 대테러 전쟁의 동참 정도로 바라보던 중동의 먼 나라가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미디어의 디지털 통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인터넷, 디지털 통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의 발달로 아무 상관 없던 세계적 사건이나 지역을 안방으로 불러 들임으로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투자는 일부 자본가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 근로자, 중산층은 잉여자본을 더 보전하길 바라지 않고 리스크를 이익율로 대체하는 자본 시장에 유통시키길 원한다. 그 뿐 아니라 더 많은 이익율이 제고되는 세계적 시장, 이머징 시장을 찾아 투자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세계화는 자본을 보유하는 것보다 리스크와 이익율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낫고 대체율이 높은 시장으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을 권장한다. 세계화는 카투만두의 노동자 자본과 서울의 중산층 자본을 홍콩 시장으로 통합하여 서로 이익율을 나눠 가지거나 동시에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과정이다.
시장과 자본유통, 그리고 뒤로 숨기 좋아하는 인터넷으로 세계화를 특징 지을 수는 있어도 세계화의 전체는 아니다. 세계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탈이데올로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변형의 큰 힘이다. 이것은 변형의 요소로서 즉각적인 정보 수용과 비교의 힘을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는 여러 경로를 통해 무엇을 이유로 사회가 변화하는지 지각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다른 나라의 경제지표와 연결되어 있거나 다양한 자본 시장의 금리 변동과 연관된다. 정책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는 다른 나라의 적용을 거울 삼아 손질되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여 운영된다. 이것은 세계화의 순기능이다. 하지만 세계화의 순기능이 모든 현실적이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세계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운영에 어떠한 개입도 허용하지 않고 디지털 정보통신을 통해 지식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화가 아닌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교양을 방해한다. 세계화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통합하는 동력은 오직 자본과 시장이며 개인주의적 생활에도 시장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세계화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불평등하여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는 세계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과 통합 과정을 겪는 부르조아의 변혁 과정을 일컷는다. 이 지점을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예컨데, 카투만두의 노동자와 서울의 중산층은 같은 시장에 투자했지만 같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변동 사항은 물론이며 각 나라마다 재각각인 변동 환율의 영향은 리스크에 리스크다. 자본을 투자한 개인은 이런 모든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시장은 어떠한 리스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헷지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것은 수출과 수입 같은 실물경제의 고전경제적 범위가 아니라 거대 금융자본의 세계화적 범위이다. 개인은 빈약한 노동과 임금자본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포로가 되어 제로섬 게임에 열중하는 셈이다. 이익율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의 유통에 박차를 가하는 금리와 환율의 리스크에 잉여자본을 침탈 당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세계화로 통합된 것은 카투만두와 서울의 점진적 양극화와 빈곤인 셈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현대적 부르조아 혁명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부르조아의 경제적 프롤레타리아화에도 기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기회 박탈에도 기여한다.
세계화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과 사유를 국지적이거나 국가적으로 한정시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기술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에 정보를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세계화된 정보통신은 신정아를 이슈시키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정아로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화를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주체적인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정보통신의 판단일 뿐이다.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영향으로 생각의 이유를 이동하였을 뿐 이다. 개인은 왜 그런 이슈가 발생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유보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살게 해준 비용을 청구하는 상업적인 발상 또한 세계화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그들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미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화적 정보통신 기술에 판단을 이관시킨 사회는 건강한 세계적 시각을 발전 시킬 수 없고 실제로 경계를 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디지털 정보통신이 다시 얘기해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계를 넘는 세계적 시각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과 그 폭력의 원인을 스스로 찾아 가상된 진실의 철조망을 끊어 내는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부르조아는 어느 때보다 사회정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향조정을 의미한다. 즉 좀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된 곳에는 더 많은 이익율과 서비스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화의 시민은 경제발전과 사회정의를 동일시 함으로서 경쟁적 불평등이 마치 사회정의인양 순응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하는 질서로 받아 들이고 착취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을 거세해버린다. 사실 세계화는 평등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 전통좌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재분배, 그로인한 공동노동과 공동생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평등주의는 지금보다 복지를 더 늘리고 약자를 더 보호하며 공공 사업을 시민 사회의 역할로 규정하는 정부의 적극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여러 정치기조의 지도적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는 여전히 서구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서는 기초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세계화를 통해 가난이 휠씬 빨리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계화는 더 욱 불평등한 경쟁의 구도를 구축하고 미약한 개인의 노동은 언제나 침탈 당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자본을 기초로 한 비교의 환경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거대 자본과 노동을 비교할 수 없듯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공존은 기대할 수 없다.
G7이나 일대일 자유무역체제를 세계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서구적 체험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한정은 서구의 관점에서 세계화를 받아 들였을 뿐, 세계적인 관심, 즉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지역, 연간 6천만명의 유아가 먹지 못해 죽어가는 세계 도처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자본을 기초로 한 서구적 세계화는 거대 자본의 유통 경로와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개인은 소외되어 있고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은 서울의 중산층이나 카투만두의 노동자, 하물며 수단의 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 있든 한사람의 노동은 대부분 비슷한 생산성을 가진다. 세계화는 얼마나 자본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많은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세계화의 장에서 살아 남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미덕과 배려가 말라 비틀어진 자본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며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화의 극복 과정은 변혁의 역변혁으로 가능하다. 역변혁은 세계적 시각을 넓히는 일이다. 이는 인간적 품위이며 미덕이다. 세계화가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의존성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기능을 파괴하는데 그 의존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한 개인은 세계화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거나 잉여 노동을 이익율과 대체하는 시장노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울의 중산층과 카투만두의 노동자는 서로의 자본을 섞어 세계화에 투자 했지만 서로의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자본 상호 의존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치나 민주주의에는 냉소적이다. 서로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 이러한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나면 세계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간은 결코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마르크스의 전통적 방식의 소외만 남게 될 것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종종 경영 문제를 물어 오는 후배가 있다. 들어보면 대게가 사람에 대한 문제고 사람의 인연과 사연에 대한 것이다. 회사라는 목적 가치에 오래도록 인연을 두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건물은 그래도 둔 채 사람들만 사라지게 했던 IMF 중성자폭탄으로 인해 평생직장이란 가치는 사라지고 직업관은 능력과 시장요구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로 변화되었다. 여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직이란 근거로 생긴 한가지 믿음이 있다. "한사람 없어진다고 회사가 무너지나" 란 것인데, 이 믿음은 꽤나 신앙이 깊은데다가 한사람 없어서 회사가 잘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코드까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평생직장은 이미 고전적 직업관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치로 세계화를 하지 못해 온통 안달이 난 사회에서 평생직장은 마켓의 요구와 완전히 배치된다. 잉여자본이 노동유연성을 더욱 탄력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은 더 이상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객체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마켓에 어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기능이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에게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만이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조직은 조직의 이상이라 생각되었던 어떤 비전, 미션으로 구성되기를 거부하고 자본 생산이 용이한 지점과 자본 재생산으로 노동의 탄력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지점으로 끊임 없이 이동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세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동력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게가 '세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마켓 안에 있다' 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이나 사람은 마켓안에서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어 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등가의 원칙을 기본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회사를 계약으로 묶는다. 이러한 계약에는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 나아가 회사에 대한 책임보다 더 포괄적으로 마켓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마켓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노동의 치열함은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마켓이 원하는 책임, 즉 자본의 창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강제적 복무에 치열함을 부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연이나 사람간의 계약이 아닌 인연의 관계마저 부인하거나 마켓의 요구에 걸림돌인양 치부해버리고 만다.
중소기업을 하는 후배가 물론, 작은 회사에서 경영자가 일일히 챙겨야 하는 것도 순리일 수 있지만, 사람이 조직에서 들고 나는데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그와 함께 했던 오늘을 챙기고 칭찬하며 그의 미래를 격려해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적잖은 시간을 들이기를 바란다. 마냥 칭찬하고 격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생각한 경영자라면 충고하고 때로는 아프게 꾸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애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과 노동을 존중하는 경영자라면 말이다.
나는 대중의 선을 믿지 않는다. 대중의 의견이 앎의 범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취미의 범주에서 집단적으로 뭉쳐 있으며 논리의 기본 전제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옮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쫒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이 비난 받더라도, 하지만 대중이 쫒는 일이기 때문에 거의 비난 받을 일이 없지만, 대중의 뒤에 숨을 수 있기 때문에 안락한 금가르기가 가능하다. 게다가 대중의 의견은 상식이나 앎을 통해 정리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취미, 그들도 이것을 놀이라고 하는데, 로서 소통하고 개입한다는 문제가 있고 이러한 상태를 포퓰리즘이라 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공직선거법 93조와 운영지침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표현, 배포의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에 찬성하는 근거가 된다.
대중의 선, 대중의 집단인격에 바른 이성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믿지 않지 않고, 정리 안된 의견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데다가 우르르 몰려 다니며 놀이로 주장하는 파쇼댓글을 지지할 마음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적, 전통적 장치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공직선거법 93조 및 그 운용지침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인으로 참가한 이유이다. 대중의 치졸한 감정 배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양심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양심은 제한해서 정리되는 것이 아니고 계몽과 사유를 통해서 얻어 지는 것이라 믿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헌법적, 양심적, 인간적인 부분에 관용이 있어야 한다. 의견에 차이가 있으면 논리를 통해 비판하고 설득과 소통이 가능하면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 표현 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게다가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그 표현 조차 제한하는 것에 동의하면 다른 것, 즉 사상적, 학문적, 종교적, 문화적 표현도 제한할 수 있는 맥락을 가져 온다는 점에서 절대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는 경선이나 단일화와 같은 공학적 쇼를 통해 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대의정치는 단 두가지, 표현하고 투표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물론, 이것 또한 너무 부족한 대의정치의 현실이지만,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면 투표하는 것만 남는다. 이것은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공화주의 원칙에도 배척된다. 따라서 공직선거법 93조는 헌법 위반이며 이는 반드시 개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며 대중은 양심에 따른 어떠한 정치적, 사상적 표현도 자유로워야 한다.
어디 강의를 갔다가 혹시 NL 계열이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 이른바 386 의 거대담론인 PD, NL 노선이 여전히 진보라는 범주 안에 늠름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나보다. 노선이 분명하던 시대에는 노선 갈등이 주된 담론이었을 터, 헤겔의 변증법이 현실적으로 힘쓸 수 없는 지경에서 PD, NL 은 지난한 분열을 겪었지만 오늘날 그것과 하등 관계가 없는 나에게 까지 예의 없이 다가온다. 이른바 386 의 저열한 변질을 조망하게 되었지만, 사람은 죽어도 노선은 살아 있는 셈이다. 물론 노선이 가치로 전환된 시대에도 PD, NL 을 운운하는 공룡 같은 사람들이 있고 이러한 화석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이유에 기득권이 자리하고 있는 꼬까운 기분이 아니 들지도 않는다. 여하튼 이상주의자, 관념주의자로 제도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고 그것이 마치 레닌의 쏘비에트 혁명과 견줄만한 다수의 열정적 무리로 집합되면서 이른바 "빠"의 시대를 열었다. 이데올로기적인 '노선'에서 자본주의적인 '가치'로, 정보혁명을 통한 문법으로서의 '빠' 까지 이상과 정체성의 감수성은 표정만 달리했을 뿐 갈등은 여전하다.
해방 후 좌우의 노선은 여전히 대립적이다. 이런 정치적 노선은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다만, 우익은 현실 정치의 동반자였지만 좌익은 재야 였다는 사실, 그로인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통해 재야의 정치가 현실의 갈등과 대면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혼란은 이른바 노선의 진지함이 대중의 이해관계 또는 정치의식과 너무 외람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해탈이 노선 변질의 명분이 될 수 없지만, 그 명분이 정당하다면 노선의 진지함도 포기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개혁진보라는 노선이고 소위 짝퉁 논란이다. 적당히 가격이 매겨진 짝퉁은 진품 만큼 오래 가고 면밀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대게의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핸드백 원리에 비추어 좌파의 개보를 잇는다는 개혁진보의 짝퉁성은 그만큼 오래가고 매혹적이다. 이런 짝퉁 논란이 지리하긴 하지만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은 좌파의 진정성이 퇴보 되었다기 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좌파 노선으로 괘도를 옮긴, 즉 진지함을 걷어낸 탈권위주의로의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노선은 죽고 사람은 살리고 본 정치적 조류는 우익에 가까운 좌익을 형성하게 되었고 참여정부 정도면 충분한 빨갱이임을 유권자의 이성에 각인 되었다. 이에 진보는 의레 개혁 안에서의 개혁, 우익에 가까운 좌파적 개혁을 추구하고, 노선이 죽은 지식인은 체제의 연관성은 고려치 않고 이러한 개혁의 진보성에 대한 패러독스만 선언하는 꼴이 되었다. 더 많은 자기 혁신과 체제 저항을 통해 얻어 질 수 밖에 없는 사회개혁의 스팩트럼을 서너단계는 줄여버린 결과를 초래한 정치적 개혁진보는 그로 인해 짝퉁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 개혁, 진보, 또는 개혁진보라는 단어는 결코 진정성 있는 진보의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진보가 집권 후 걸어 온 노선은 교묘한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하다. 오죽했으면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정리까지 했을까. 따라서 여러 정책들은 패러독스가 아니라 개혁진보의 괴이한 노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진정성 그 자체이다. 즉 스팩트럼을 줄이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진보를 개발, 성장, 가치변조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유의미로 대입하기 위한 시도들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미FTA 와 통하며 양극화를 해소한던지, 파병을 통하며 평화를 추구한다던지, 대추리, 새만금을 통하며 관용과 환경을 설득하는 자세가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라 사상이 없는 노선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서 교활하다. 이제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개혁진보는 정치적으로 단물이 빠질 만큼 빠진 진보의 이름을 바꿀 태세다. 정책실패가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된 민심이반에 가장 적절한 대처는 무엇보다 바꿔타기이며 필요한 건 선전정치의 새로운 구호이다. 이른바, 중도, 실용의 기치인데 개혁진보의 노선 아닌 노선의 요로에는 이미 중도실용이 저변에 깔려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교묘하다.
한국정치는 대척점의 역사, 정체성의 정,반에서 활성된 갈등의 소산이다. 역사의 동력이 이 정, 반의 비판과 동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노선의 역사이다. 원본과 복제의 시대를 넘어 복제와 시뮬라크르의 현대 사회에도 노선은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사필귀정한 원칙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짝퉁은 복제와 다르고 대신 시뮬라크르와 닮아서 원본이란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에는 명분이나 명분의 근거인 노선이란 것이 있는데 개혁진보는 명분은 있으나 노선이 존재하지 않는, 원본 없는 이미지만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된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구호는 알지만 비전은 모르며 절차는 알지만 사상은 모르는 매카니즘만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매카니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개혁진보세력이 중도를 향하거나 더욱 해괴한 '불온자유주의' 같은 노선을 통해 재집권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빠' 정치의 시대를 연 것도 개혁진보세력이며 개혁진보를 그 이름 자체로 쓸 수 없는 짝퉁으로 전락시킨 것도 그들이다. 대립의 각 위에서 이합집산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중도를 통해 '빠' 를 집단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신념은 여전히 해괴하다. 즉 중도가 정권을 창출하는 한국정치사의 일대 사변을 모반하는 개혁진보세력의 행보가 그래서 매카니즘적일 수 밖에 없다. 맥락 차원에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물론 중도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대중의 일반적 정치의식 수준을 과대평가하고 좀 더 넓은 정치 스팩트럼의 창조를 포기한 개혁진보세력만의 황홀경일 뿐이다. 이러한 황홀경 때문에 진보로 향하지 못하는 민중들이 생겼으며 이에 대한 노선상의 성찰이나 책임이 없었던 고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수화 되어 가는 현실을 좌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혁진보세력이 집권 기간 동안 보수는 보수요, 진보도 보수, 부드럽게는 실용보수라는 수정 노선에 복무한 탓에 오늘날 가장 악질적인 사회 보수화에 기여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이 책임을 전가도 희생양도 만들지 못하고 맞닥드린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그들의 히든카드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을 수 밖에.
자기혁신과 체제개혁은 같은 말이다. 게다가 진보적인 소신이다. 이러한 진보적 소신을 가졌던 수많은 민중들이 진정성 있는 진보로 가는 요로를 막아선 개혁진보세력 때문에 다시는 진보로 갈 수 없는 지경에 도달 했다면 이는 한국정치의식의 완전한 퇴보에 기여한 것이다. 짝퉁의 구린 냄새는 여전히 매혹적인 겉모습 때문에 아주 가까이 가지 않고는 맡을 수가 없다. 이들의 트랜스포머적인 변신은 정치공학을 새로 쓰고 그 독해 마저 어렵게 한다. 짝퉁은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레토릭만 있고 노선이 없는 짝퉁은 절대로 정권을 재창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보수와 이른바 짝퉁인 실용보수 내지는 진보의 탈을 쓴 실용진보의 대결은 어차피 보수 대 보수이기 때문에 진성진보로 갈 수 없는 민중들이 짝퉁진보이며 보수 노릇도 걸음마인 범여, 개혁진보세력을 선택하기란 만무하다. 따라서 보수화를 거쳐 전통 보수를 선택하는 것은 엄연한 맥락이다. 그 거창했던 노선을 살리기엔 이미 이들의 정체성을 담은 신체가 너무 많은 악세사리를 달아 버렸다. 개혁을 체제내 소극적 변화로 축소시킨 노선에 어떤 악세사리를 달고 치장을 한들, 경선쇼와 후보 단일화를 한들 이미테이션 수준에서 반짝일 것이 분명하다.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 더 진보로 갈 수 있는 민중들의 노선을 막은 짝퉁정치의 기록은 차라리 삭제되어야 할 명백한 재앙이다.
교육이 무섭긴 하다. 대체로 사회 부조리에 연민하다가도 국가적 가치와 대립할 때 그 연민을 가차 없이 거세하는 무의식의 의식은 교육이 아니고는 형성될 수 없을 터다. 이러한 지향은 비정규직 차별 반대를 외치면서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이율배반의 디테일을 가져 온다. 사실 이러한 큰 가치에 대한 대립은 단순한 이율배반이 아니라 정리의 차원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도하며 아프간에는 온통 사막과 총을 든 탈레반만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 안타깝다' 는 경제를 넘어 활동가 '미니'의 말은 새길만 하다. 미니의 블로그에 가보면 그가 아프가니스탄을 정리한 여러 글을 볼 수 있다. 미니는 말할 것도 없고 한두개의 글만 읽어 보아도 오늘 우리에게 닥친 사태의 본질에 대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무엇에 분노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 이러한 분리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지성으로 다루어져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최소한 감정 덩어리의 배설을 집약시킨 테그라는 기술적 존재가 집단지성이란 거창함으로 포장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하튼, 아프가니스탄 사태에도 어김없이 국가주의가 등장한다. 이는 본래 국가 없이 살 수 있냐 는 일종의 교조주의인데 국가주의의 투철한 주입은 나라 없이 사는게 서러웠던 그 시절, 겨우 민족만 부지 했던 식민지 시대를 거슬러 국가 독재와 동원 체제를 구축한 군사정권 시기의 교육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그 잔재적 청산을 '국가'로 접근하여) 국가의 대안적 개념을 공상적 논리로만 구성한 아나키즘 따위로 정의하고 이것을 국가의 대안으로 선전하는, 즉 A급 진보를 자처하며 공격당하기 딱 좋은 위험한(?)스탠스를 취하는 사람을 본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작은 단위의 공동체를 실현해보이시는 귀농파 생명주의자들의 헌신을 존경하지만, 마냥 동경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이다. 왜냐,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누구나 남은 돈을 저축하고 집을 늘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욕구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그것의 목적, 개인의 가치 보다 국가의 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목적을 고조시키기 위해 대결 구도를 선호한다. 대체로 스포츠에서 벌어지는 국가 대항에서 이런 대립 구도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나라 사랑하는 순수한 행동도 있고 그걸 다 국가주의라는 다소 건조한 범주에 싸잡기는 어렵다. 다만, 국가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로 승화될 것이란 막연한 환상은 깰 수 없더라도 그렇지 않은 소수, 즉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애가 중요해요, 라는 양심적 시선을 거두라고 생때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때 없이 국가주의가 살아 남을 수도 없는 처지인게다. 국가의 위신, 국가의 이익, 대한민국(또는 한국인)의 위대함 따위가 한강의 기적 같은 것과 접목 되면 비정규직도 불가피하고 개방만이 살 길인 오늘날의 프로파간다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쯤은 정리되어야지 생때만 쓰면 그게 착각이고 환상 아니고 무엇일까.(외국 나가서 외국 사람이 한국사람 최고, 엄지손가락 올려 보이면 국가의 위상이 어떻고 하는 감상에 젖는 것, 밖에 나가면 애국자 되요, 이런 것들 다 환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애국의 유령이 떠돈다. 애국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과 애국하는 사람의 구별법이 없다. 유무형의 국가 이익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개량화 시킬 것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는 애국 환상에 빠지면 비정규직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개인의 가치와 국가의 가치가 대립할 때 개인의 가치와 인류적 희망의 편에 선 사람들을 매국노라는 굴레 안에 넣는데 거침이 없다. 매국노라는 국가주의의 지령은 잔인하면서도 그것을 선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안락하다. 이건 국가라는 완전한 고정적 관념을 인정하는 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적으로 치를 떠는 매국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마치 공노의 대상인양 추락시킨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파쇼적 안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파쇼가 아니어도 국가와 체제, 대한민국과 자본주의, 당연한 그것에 의문을 던지면 대게의 대중들은 이러한 소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우익 국가주의의 주역인 조갑제씨의 주장처럼 빨갱이들은 북으로 부터 지령을 받는다고 하니, 먹물 좀 먹었다는 사람들은 친북좌파 쯤으로 분류를 해준다. 한국적 국가주의는 미국적 가치를 인정함으로서 그 완성을 이루는데 이것을 비판하니 응당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가 되는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가주의에 종속된 사람들은 이러한 단순한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태도다.
왜 아프가니스탄 사태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 나야 하는 것인지(가지 말라는데 가서? 역시 단순하다.) 쏘련과 미국으로 부터 연달아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의 삶은 어떤 것인지, 왜 테러는 일어 나는지, 테러와 같은 폭력은 왜 쓰는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인지, 세계화를 추구하는 국가주의에서 왜 이런 문제는 다루지 않는가, 이것이 다 서구적 관점으로만 해석된 한국적 국가주의의 한계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떠들면서 하는 애국은 다 가짜다. 이 시대의 가장 복잡한 예술가이며 사상가인 백남준씨를 봐라.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고 하는데 정명훈 보다 더, 복잡하니 애국주의에 넣지도 못하고 이해가 안되니 국가주의로 떠들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애국자는 애국한다고 대한민국이 어떻다고 대중 선동하듯 부러 떠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어디 가서 외국인이 백남준을 얘기하면 백남준 또는 그의 작품을 얘기할 일이지 대한민국은 얘기할 필요도 없다.
애국 황홀경은 없어야 한다. 아니 국가 이익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청년들은 일할 곳이 없고 학교 졸업해서 기껏 취직하면 바로 비정규직인데다가 그것도 2년도 못갈 형편이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 자갈밭은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포기하고 고만 접으라는데, 그럼 이것도 국가 이익을 챙기지 못한 노무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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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 2007/09/30 20:0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우왕~ 이 영화 보셨군요! +.+
보면 눈물날거 같으요.. 무덤하던 일상과 그 바람소리가 그리워서..ㅜ-
DrunkenSTAR_Jack 2007/10/02 19:02 편집/삭제 댓글 주소
음악을 듣다보니 기타소리가 바람소리 같네..
게다가 더블린에 살았단 적 있던 사람이면 솔찬히 그리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