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권 주장에 대한 대중의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정신적으로 괴롭게 했으니 그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 정부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무턱대고 갔다가 납치 됐으니 석방에 든 비용도 물어내야 한다는, 즉 피 같은 세금 물어 내야 한다는 주장, 마지막으로 개신교에 대한 증오 이다.
마침 정부가 구상권을 행사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주장이 공식적인 힘을 받는 순간인 동시에 공식적으로 정부는 용병이란 것을 세계적으로 선언한 순간이다.


정신적 피해를 본 대중들에게 심히 자양강장제나 신경안정제이라도 일일이 복용토록 해주고 싶지만, 그따위 정보를 타전한 언론에게 먼저 피해보상을 요구해보면 어떨까 싶다. 웃기는 소리 아닌가.
피 같은 세금론은 공부가 많이 필요한 논리도 아니다. 내 세금이다, 넌 세금 냈냐, 따위의 주장은 유아적이다. 공화국에서 세금 제대로 안나는 일부 재벌, 고소득 전문직, 정치인 들이 나쁜 것들이지 세금 잘내는 대게의 공화민은 선하다. 문제의 요지야 납세의 유무가 아니라 세금의 쓰임인데, 멀쩡한 보도블럭이나 깨고 이라크, 아프간에 파병한데 쓴 세금이야 말로 허튼 세금 아니냐는 말이다. 그리고 무슨 동호회하는 것도 아니고 세금 낸 것 도로 n빵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사람이 사는데 사적인 이유로만 살 수 있나, 공적인 이유 없이 어떻게 사회가 유지 될 수 있는가, 아프간 사태에 대한 구상권 청구이야 말로 세금을 사적 수준으로 내리는 아주 좋지 않은 사례다. 자국민 보호가 국가의 책임 아니면 어디? 동맹국 미국 책임인가?(맞다, 여기엔 그들의 책임이 아주 많다. 테러집단과 협상 안해 운운하는 미국이 부러우면 미국에 세금 내든가) 공적 보호에는 공동체 구성원의 책임과 의무도 있다. 골목에서 깡패한테 삥뜯기는 교회 다니는 학생을 보면 도와주는 것이 같이 사는 것 아니냐, 같이 삥뜯는게 사회인가.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했다는데, 정부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모두 하지 말고 산단 말인가? 아니 그럼 오늘은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지 출근해서 정부 홈페이지부터 살펴 봐야 되는 건가, 귀찮은데 매일 아침 조선일보에 통지서를 끼워 넣어 주던가. 게다가 통지하면 책임 끝, 무관심 시작이란 등식이 성립한다면 정말 세금 따위는 왜 걷는가? 민주주의 정치하는데 필요한 정당 보조금이나 늘리려고? 아니면 핸드폰 보조금이나 좀 늘려주면 다들 해피하려나.
그래도 세금에 대한 미련이 남는 이유는 아무래도 개신교라는 종교적 증오 때문 아닐까 한다. 이것도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방식(제발 이건 좀 고쳐, 불신지옥 이거 성경이 있는 말인가?)의 문제인 것이지 개신교의 문제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종교를 뭘 믿든 그들이 우리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공적 이유의 수준에서 그들에게 사용된 세금이 있다면 공무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데 필요한 세금이었을 뿐이다. 오랜만에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쓴 것을 내놓으라고 하니 기가 막힌다.
그럴꺼면 완전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협상을 하든가, 이를테면 왜 공무원이 10명이나 가냐, 5명만 가지, 비용 많이 든다, 가족과 정부가 이런 협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0일 줄테니 그때까지 해결해라 그때까지 해결 못하면 비용 깐다, 계약서 쓰고 했었어야지... 어차피 돈 줄 건데 대한민국 정부 보다 미국 정부가 더 세고 협상도 잘할 것 같으니 두 정부를 경쟁시켰어야지, 대한민국 정부는 유리한 위치에서 수의계약을 해놓고 두명이나 죽게 했고 갑의 빠른 석방 요구를 관철시키지도 못했으며 진행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법적 절차 등을 무시했으므로 이번 협상은 무효다. 다 다시 원상복구하는 것이 맞겠다.

이게 원하는 건강하고 세금 잘쓰는 민주주의 팽배한 사회인가, 비지니스 관계지.
2007/08/30 19:23 2007/08/30 19:23
DrunkenSTAR 이 작성.

지켜줄께, 제주도

2007/08/29 17:23 / 생각

나는 그간 다섯 번에 걸쳐 제주도에 다녀 왔지만, 그 고장을 따로 표현 할 수 있는 마땅한 수사를 찾지 못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면, 으레 랜트카를 빌리고 한림 방향이나 성산 방향 중 한곳을 정해 해안 풍경을 보기 일쑤다. 제주도 해안이야 알려진 대로 대단한 이국적 풍경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작년 초가을, 그런 으레적인 여행이 식상도 했거니와 제주도에 그것 뿐이 겠냐, 생각해보니 차분히 둘러볼 기회는 없었던 것을 빙자하여 혼자 제주도 안쪽을 둘러 볼 요량을 냈다. 제주도의 내륙은 그동안 항구 중심의 듬과 남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한다. 구좌읍 송당리, 성산 삼달리를 거쳐 표선읍 가시리를 마을 사내 마냥 돌아다니고 오름을 오르락 내리락 구경만 했는데도 두 가지 울분이 절로 든다.

제주도를 드나 들며 자본주의가 번쩍이는 항구의 이국적 풍경에 들떠 있던 철없던 스스로가 첫째로 창피하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접한 제주 4.3 사건의 켜켜한 상처를 진지하게 돌아 보지 못했던 가난한 호기심에 둘째로 창피하다. 제주 중산간 일대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마치 잠수한 듯, 묵직한 압력과 심해의 막막함에 비길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공기가 다르다보니 폐활이 급해지고 배시시 웃음마저 훔쳐 나온다. 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보는 중산간과 성산 일대는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차피 지나갈 북인(北人)에겐 이런 피상적 접근 만을 허용하는 듯 보일 정도다. 왜? 뭍에서 온 북인은 제주도의 가해자이기 때문에 부러 숨기는 것은 아닐까?

오름은 도시 인근의 산과 달라서 입구도 없고 오르는 길도 일정치가 않다. 관목들 사이로, 때로는 습지를 넘어 오름에 올라야 하는데 그 외진 어귀에 공사장이 더러 있어서 놀랐다. 하지만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중산간의 난개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공사장은 난데 없는 것도 아닌 난개발의 주범인 골프장이다. 제주가 국제자유도시가 되면서 골프장에 대한 광범위한 조세 감면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급속도로 늘어 가기 시작했다. 임야면적에 대한 골프장 허용면적은 5%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이 이 기준을 거의 채운 상태다. 2004년 부터는 대체농지조성비도 50% 이상 감면 받는다. 골프장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이어 5% 허용 기준도 늘려 달라고 때를 쓸 것이 뻔하다.

최근 제주도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기생화산으로 불리는 200여개의 오름과 그중에도 마그마가 차가운 물과 섞여 폭발을 이뤄 만들어진 수성화산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보편적 보전가치를 인정 받은 셈이다. 하지만 제주도가 다른 고장과 달리 특별한 아름다움과 역사적 상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계자연유산과 국제자유도시라는 배치된 이데올로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뭍사람(북인)들은 자본주의의 찬란한 풍경으로 점철된 항구로 들어와서 골프를 치고 돌아 갈 것이다. 제주도는 북인들의 폭력적 상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이제는 그들을 손님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셈이다. 50여년전의 타율적 비극과 오늘의 자율적 난개발을 빗대어 제주인들의 책임을 소급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와의 결탁, 천박한 자본주의 따위를 계보 삼아 장황한 논리를 펼 필요도 없다. 중산간 너머 너머를 걸으며 김영갑 갤러리도 둘러 보고 한동안 고독해보면 참담한 공기를 폐활하느라 저절로 숨이 가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소똥이 딱지진 용눈이오름 머리에 앉아 있으면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에 구름이 움직인다. 어떤 철학자는 '자연도 이데올로기다', '몸조차 이미 역사' 라고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골프를 치라고 몇번씩 권유한다. 물론, 회사돈으로 대준단다. 하지만 앞으로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절대 골프는 치지 않는다, 다짐을 해본다. 그래도 몸으로 하는 역사를 실천해 본 적 없는 빈곤한 나로서는 여전히 부끄럽고 답답하다. 중산간에 있으면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최근 꽤 진보성향이라는 분이 유시민을 높이 평가 하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주도 강정포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반생태적 강군의지의 비평화적 정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유시민을 감히 높이 평가하는 진보성향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 그분도 4.3 사건으로 2만여명의 무고한 주민이 학살된 중산간에 가서 고독을 느껴 보면 진지한 거부야 말로 진실이란 울림을 받을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여섯 번째 제주도 방문이 도통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직 풍경 너머를 볼 수 있는 혜안도 없는데 여행자의 어리석은 스침으로 제주도를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도... 골프라도 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지켜줄께..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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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17:23 2007/08/29 17:23
DrunkenSTAR 이 작성.

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석방될 수 있는 가 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40여일 동안 사람들은 두 가지 분노를 표출했다. 하나는 탈레반에 대한 분노, 이것은 두 명의 피랍자가 살해 당하면서 군사행동 여론까지 치닫는 보편적 분노를 자아 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분노, 기독교의 무차별한 선교 방식이 화를 불렀고 그동안 기독교가 벌인 예수님 판매 방식의 기독교 선교에 치를 떨던 대중들의 이유 있는 분노를 불렀다. 이유가 있어도 찬찬히 뜯어 볼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그렇게 교양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전체의 합의인양 대중을 등에 업고 덧글 폭력에 나선 사실은 이미 주지적이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전원 석방될 것이란 보도(아직 확인은 안됐지만)가 나왔고, 그것도 몸값을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자 서서히 구상권 얘기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구상권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의 빚을 갚은 사람이 다른 연대 채무자나 주된 채무자에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대중의 분노가 증오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구상권이 존재한다면 증오를 이해하는 차원도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가 종교의 믿음과 예수의 헌신을 자본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를 상업화 시켰던 한국 종교의 부조리에 가해지는 분노를 이해한다 해도 피랍자들에 지불 될지도 모를 몸값에 대한 국민 구상권 주장은 공동체도 이성도 없는 자본교환적 존재들의 폭력일 뿐이다. 응당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에게 '몸값은 세금' 을 주장하는 소위 애국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성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마치 국가가 세금을 푸대자루에 싸 담아 피랍자 가족을 대신하여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몰고 가는 발상은 예수를 상업화시킨 종교와 이론의 야합만큼이나 창조적이다.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천박한 공동체 정신에 이러한 계약 관계가 마치 합리적인 공동체인양 선동하는 등가의 원칙속에 탄생한 OECD 가입국, 대한민국을 잘 살펴보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적 문제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을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자정이나 학습 능력이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다만, 실체적 개인과 관념적 대중만으로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를테면, 구상권의 주장은 돈이 없으면 납치되도 풀려 날 수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은 이 상황이 개인과 관계가 없고 세금이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없었던 증오와 결부시켜 주장하게 된다. 굳이 '네 가족이 그 상황에 처했어도?' 라고 물어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분리 되어 있다는 해석으로 무마할 일이 아니다. 애국과 국익을 동일 시 하고 애국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애국은 대게가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 뿐이다. 생업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국가와 민중을 이반시키고 공포를 유발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게다가 대게가 국익이 아닌 것도 일단 관념적 애국의 범주 안에 들게 되면  반대 없는 동의와 다수결의 원리로 비판적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하기 일쑤다. 이쯤되면 국익이나 애국이나 개인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국익과 개인의 이익을 동일시 하고 국가의 손해를 개인의 손해로 일반화하게 된다. 개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대도 국가에 물어 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따위에 빠진다. 자신이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상태, 판단 상실의 증후군에 빠진다. 이러한 증후의 상태에서 공동체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보호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의무와 권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로 매장된다. 이건 사회도 공동체도 아니다.

근대 공화적 공동체에 세금의 위치는 국가적 국익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익이다. 세금을 어떻게 국가의 쓰임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동안 정부가 행해 온 부패를 견주어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정당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에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우리의 세금이라면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허튼 쓰임새보다 휠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들을 싸잡아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치부하는 것은 옮지 않다. 그들의 문제와 살아 돌아와야 하는 문제는 분리시켜야 정당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또는 대중이 구상권을 주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건 파렴치한 행위다.

2007/08/26 18:05 2007/08/26 18:05
DrunkenSTAR 이 작성.

나는 학번으로는 구공학번이니까, 끼인 세대다. 정치적으로 구분된 386도 아니고 신세대, 엑스세대도 아니면서 베이비부버의 정상을 향한 독주 세대여서 100만명 가까운 동기들과 학력고사를 봤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대 규모는 큰데 딱히 진지하지도 못했고, 반항적이지도 못한 주변 세대라는 점 때문에 다른 세대의 관점으로, 대게는 편의상 이쪽 저쪽으로 편입 시켜주는 세대다. 386세대의 운동적 역사에 대해 끼일라 치면, 넌 겪어보지도 않고, 라며 핀잔이 돌아오고 미시적인 사회개혁(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에 눈길을 돌리면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다.

특히, 5.18광주민주화항쟁 같은 사안이 그렇다. 나이로 비추어 보아 이성 또는 지적 지각 상태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사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있는데다가 그것을 겪었던 선배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루어 질 수 없는 담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게의 선배들, 자본주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밝은 선배들은 광주민주화항쟁 같은 사안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미 예상한, 그래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사안들 또는 현안들(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에 있어서 그들이 취하는 스탠스는 대게가 좋고, 좋지 않음으로 판단 된다. 자본주의에 좋지 않은 것을 너는 왜 그런 걸 모르냐 듯 짐짓 안타까워하는 선배들을 보면 때때로 기가 막힌다.

좋고 좋지 않음으로 세상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논리는 자본주의다. 이런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작동케 하는 민주주의 일 때 이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그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돈 잘 벌게 해주면 된다, 그러면 좋고 아니면 좋지 않다, 는 이들에게 명확하다. 스스로 치열하게 돈 잘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후배들을 말릴 논리가 바르게 작동할 수 없는 이유도 이 좋고 좋지 않음 이라는 취미 폭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것,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을 미덕으로만 인식하다보니 스스로 모든 잉여를 생산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말이다. 1인의 노동으로 오늘날 생산할 수 있는 잉여는 제한되어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자본 역학, 금융의 흐름, 타인의 잉여 가치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오로지 1인 노동의 결과로만 볼 수 없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버는 행위는 치열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관계적으로 돈을 버는 체제에 있으므로 과정의 옮고 옮지 않음과 소비의 책임이 따라야 하는 반성은 당연한 미덕이어야 한다.  

5.18 민주화항쟁이나 운동적 사회개혁 현안은 절대로 좋은, 좋지 않음 따위로 판단해선 안된다. 물론, 소수자 보호, 평화 구축, 양심 선언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좋은 것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고 취미로 그치는 일시적인 연민의 상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실은 위험하다. 즉,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좋은 일이다, 또는 옮은 일이다, 라고 판단하는 차이의 엄격한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좋은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도 옮은 일은 좀처럼 하기 힘들다. 좋은 일은 굳이 내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아도 대중과 트랜드의 판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옮은 일과 옮지 않은 일로 평가하는 행위는 쉽다. 사회와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의 역사는 변화무쌍하다. 그 사회가 만들어 내는 역사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은 진실에 되도록 가깝게 접근하는 일이다. 이것은 제도와 체제의 관점만으로 이끌어 낼 수 없는 일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이니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관점은 고작해야 좋은, 좋지 않은 정도 이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옮은 일이었다고 판단하는 것 만으로 관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광주는 일개 지명과 풍경만으로 그치기 일쑤다. 나와 같이 당시에 이성이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에게 있어서 책과 간접 경험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적 사안을 이해하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여행지에서 그저 좋은 풍광과 색다른 문화적 경험에 반해 셔터를 누르는데 정신이 팔리는 '좋은 것'을 위한 행위만으로는 그 고장의 참모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곳에 대해 겸허하고 진지한 개입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곳이 역사적으로 해냈던 진실, 지금 그 순간에도 끊임 없이 만들어 내는 진실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렇다. 겸허해지는 것 이다. 조금 안다고, 조금 읽었다고 까불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사회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사회를 제도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회에 피판적이라고 해도 체제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나는 아직 공부도 덜 됐고 용기도 많지 않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를 까발리고 체제가 왜 바뀌어야 하는지 용기 있기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경외롭다. 게다가 사회 개혁적 현안(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을 토대로 한 오늘날의 진보운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매우 용기 있는 논쟁이라 생각한다. 근본적 진보건 계량적 진보건 나는 그런 노선에 대해 어느 줄에 서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노선의 갈등과 토론에 참여 할 만한 됨됨이도 못되는데다가 체제와 사상의 이율배반에도 아직 논리적으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제 중심적인 선배들이 사회를 비판할 때는 고작해야 부동산 시세가 떨어 지거나 주식 투자가 잘 되지 않았을 때이다. 못마땅하니 국회 앞에 가서 피켓이라도 들어야 겠네, 그럼 바뀌냐? 는 사람들의 조롱 따위는 1초도 머리에 머물지도 않는다. 체제를 바꾸자는 것이나 체제 안에서 사회 개혁적 현안을 논의하자는 의견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싸잡아 친북좌파 쯤으로 규정하고 만다. 부동산과 주식에 매몰된 신체는 광주민주화항쟁을 그저 역사가 옮은 것이라 규정했으니 그렇다고 건성으로 말한다. 하지만, 광주민주화항쟁의 역사가 민주화에 어떤 역할을 했고 이에 연장한 계급적 담론에 이르게 되면 바로 태도를 바꾼다. 그 태도는 친북좌파에 대한 반공적 경계심이다.

역사적 해석이 불가능한 이러한 부류들에게 '좌파는 공산주의'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내가 번 돈을 게으른 자들(자본주의 방식을 이기지 못한,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에게 뺐기지나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좌파는 공산주의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물론이 실은 좌파에서 나왔다는 친절한 설명은 들어 먹히지 않는 진실에 가깝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적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의 자본을 빼았으려 하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전근대적이며 구린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해하는 것은 자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굴리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옮은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판단하면 그만이다. 왜냐, 돈이 많은 상태가 선한 상태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으로 공산주의를 일깨울 때도 인간의 노동만으로 잉여 가치가 생산되지 않는 시기 였고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노동 가치가, 나의 노동 임금이 오로지 나만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적 지점을 간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치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 매카니즘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나의 자세와 태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이다. 불행이도 이런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두 사회를 바뀌기 위해 활동가나 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에 바른 태도로 진지한 개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러한 사람들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참칭하고 있더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최소한 인간이 가져야 할 이성과 존중의 교양이 있다면 그 비판이나 자유의 태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 행위 앞에 취해야 하는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 또는 진보운동을 현실적이지 않은 관념주의로 매도함으로서 현 체제 안에서 안락할 수 있다는 패배주의적 사실을 빨리 인식할 수록 좋다고 가르치는 선배가 많은 현실이 안타깝다.

나는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잘 모른다. 광주가 여전히 나에겐 여행지에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내 무지의 탓이리라. 그곳이 다른 곳보다 특별나게 진보적이거나 진지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으로 돌아 왔는지는 꼭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왜 죽었을까가 아닌 그렇게 죽을 수 있었을까, 죽을 것을 알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양심을 위해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죽어서도 친북좌파나 빨갱이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지켜야할 것을 알고 목숨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광주의 정신을 나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냐만, 그들의 목소리가 악랄한 군사정권에 대항한 진지한 사람들의 특별한 목소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에서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도 아니고 역시 폭도도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엘리트들은 진정한 해방구를 만들어 낸 적이 없다. 광주에서도 진정한 해방구를 만들어 낸 얼마간의 시간과 목숨을 바꾼 용기 있는 진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해낸 위대한 일이다.

자유주의 안에서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자본주의에 살면서 사회주의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특별하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이런 특별한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고도로 발달 됐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먹고는 살고 있겠거니, 애써 외면했던 평범한 이웃들의 신음소리다. 광주의 정신은 평범한 사람들도 총을 들고 목숨을 지척 간두에 놓아야 하는 공포 상황을 맞이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정신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였을 뿐이다. 돈으로 신념을 사고, 자유를 사고, 연민을 사는 자본적 정신으로 매몰된 인간성을 구원하는 목소리다.
2007/08/18 00:17 2007/08/18 00:17
DrunkenSTAR 이 작성.

소름 돋는 일

2007/08/11 16:11 / 생각

소름 돋을 일이다. 집단적 관심와 광기의 증후가 버무려진 덩어리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이성 있는 포유류의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다. 게다가 악랄하기 까지 하다. 명백히 형편 없는 것을 형편 없다 말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란다. 대중의 요구에 맞는지 아닌지가 이성이란다. 대중의 좋고 좋지 않고 따위의 취미 판단이 이성이라고 고집하는 덩어리들의 객체가 포유류인지 의심 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문화적 희망은 온통 미국을 향하고 있다. 문화를 들고가 문화적 코드로서의 잠입이 아닌 시장적 가치의 통쾌함에 목매단다. 이익과 손해의 함수에 밝은 자본적 대중의 폭격은 전두환의 학살적 명령과 그 역사적 감수성을 공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따위 극단적 반이성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대중의 선이 더 이상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된 이유야 특별할 것이 없다. 오로지 자본적 이익이다. 대중들은 아직도 이것을 국익이라 떠들고 다니는데 도대체 세금내는 것 아까워서 허구헌 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국익을 메가폰하여 개인적 손익 그래프를 그려내는 발상이야 말로 창조적 아닌가. 강자의 소외에서 나오는 영웅 코드, 미국 마운드에 태극기 꽂는 감수성 넘치는 사대주의, 거기에 국익만 양념되면 대중의 무지를 폭격기에 실어 융단을 내릴 수 있다. 뇌를 가진 포유류를 한꺼번에 무뇌충으로 만들 수 있으니 자본의 정서는 참으로 소름 돋는다.

2007/08/11 16:11 2007/08/11 16:11
DrunkenSTAR 이 작성.

참 못났다

2007/08/07 12:40 / 생각

디워를 거부했으니, 보지도 않았으며 보지도 않을 참이다. 2백만인가, 3백만을 찍고 일천 오백개 미국 개봉관 확보를 운운하는 통에 추호의 궁금함 마저 사라졌다. 괴물을 누르고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 될꺼라 예상 하는 언론들도 적잖다. 거, 신통방통한 이무기다. 보질 않았으니 사실 이무기인지, 우리 시대가 바라던 진정한 괴수 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CG 따위의 완성도나 장르 따위의 문법은 더더욱 모르겠다. 다만, 우리 시대 대중사회적 스터디 셀러인 황우석을 불러 내도 좋을, 어쩜 그리 똑 같은 복습이 이 사회에 다시금 필요하다면 명백한 비정상 아닌가. 도무지 대중의 선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되뇌어도 분기 승천하는 이유는 결코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영화를 논할 수는 없는게고, 심형래가 각종 오락 프로에 나와 반 영화 마케팅, 반 코미디를 할 때도 빼먹지 않는 소위 헐리우드에 태극기 꽂은 무용담은 나 스스로는 불편 하고 그만이지만 박세리의 뽀얀 발 컨셉이 애국가와 노상 겹쳐 졌던 이미지와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나만의 생각일까. 괴물은 있되 이무기 컨셉 빼고, 아리랑 빼고, 심형래 무용담 빼고 이것은 정통 괴수 영화를 표방해도 애국심따위가 디워와 견주어 졌을까? 이것도 나만의 패러독스 일지도 모를 일. 최소한 영화가 애국심과 결부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활용한 흔적이 도처이며 이런 영화에 대한 논란을 제기 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관객이 아니라 사회적 대중으로서 담론을 제기하는 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관객은 7천원짜리 취향에 맞으면 앉아 있고 아니면 일어서면 되는 객체로 취급하는 무책임 또한 관객에서 벗어난 대중들의 짓들인 것을. 거참, 관객의 입장에서 재미 없으면 일어날 수 있는 권리처럼 디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을, 영웅이 탄생했고 또 다시 성역을 만들다니, 참 못났다. 그런 애국심이 있으면 애국적 해방구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화려한 휴가' 를 통해 함 살펴 보는건 어떨지 싶네.

2007/08/07 12:40 2007/08/07 12:40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