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리울 것이다.

2007/06/26 02:16 / 생활

그리울 것이다, 달 아래건 별 아래건 훌쩍 떠나 홀연히 만나던 무인 간이역이. 나는 간이역에서 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며 이 기차를 탈까, 다음 기차를 탈까 고민하는 방랑자와 같았다. 기차가 가는 방향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빛 속으로 돌진하며 작렬하는 파열음을 비스듬이 바라보고 있었다. 삶을 구겨 넣은 기차가 어느 간이역에서 풀어 내는 사연 모를 사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요약할 수 있는 실존적 분위기란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리기에 나는 지나치게 관조적이며 엄숙하다. 애써 눈물이 나지만, 눈물이라고 다 같은 눈물이 아니기에 금새 식어 버린다.

미안하지만, 내 가슴은 오로지 내 가슴만으로 이루어져 있질 않아서 한번도 간절한적 없던 피가 흐른다. 아직 나는 어느 고장에 가서도 그 고장이 끊임 없이 생산하는 진실에 한번도 진지하게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겉멋과 패션만으로 히히덕 거리며 자신을 돌아 봤을 뿐이다. 나에 대한 관심이 오직 그러함에서 비롯되었으니 무엇이든 하고 나서 후회한다. 한번도 삶을 구기고 더 이상 너덜너덜해지지 못해 풀어 내었던 적 없던 반성은 해서 무엇하나. 간이역이건 제주도건 사구, 석호건 나는 그저 그립기만 할 뿐이다. 내 눈물엔 냄새가 없다.

2007/06/26 02:16 2007/06/26 02:16
DrunkenSTAR 이 작성.

파쇼민주주의

2007/06/22 16:04 / 생각

대통령의 헌법소원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헌법기관이 헌법소원을 할 수 있냐는 측과 대통령 개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한표를 행사하고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에 헌법에 소원을 구할 수 있다는 측이 있습니다. 어쨌든 변증법적으로 합의가 될 수 없는 이항대립인 점은 확실 합니다. 최근 정부는 한미 FTA 에 반대하여 파업을 결의한 금속노조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장 각광 받는 정치적 수사인 무슨무슨 원칙이 실체적 원칙은 없고 원칙 자체만 단어로서만 존재한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관용이란 성찰적 단어를 옮고 그름의 이분법적 형식으로 축소시키는 정부의 반인문적 시각은 역시, 노무현 정부는 공부도 안되고 정리도 안되는 집단이란 인식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대통령은 헌법적 기관 맞습니다. 이러한 헌법적 기관은 정치적으로 권리, 책임, 의무에 대한 정의와 그것의 항시적 존재가 중요합니다. 정치조직상으로도 대통령의 유고는 국무총리 대행으로 전환 됩니다. 이는 노무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란 자리가 중요하단 얘기겠습니다. 그러하니 대선 180일을 앞두고 정책 토론회다, 대통합 이합집산에 열을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에서 무관용, 무관용하는데 정부는 집권기간동안 어떤 사회적 현안에 관용을 배풀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무관용 자체가 원칙 입니다. 걸핏하면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는데 모두 립싱크일 뿐 입니다. 민주주의를 한적도 없고 신자유주의의 몰이배 역할을 하는 노무현일지도, 그가 대통령일지라도, 그도 국민이란 점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관용이란, 그가 아무리 싫어도 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그가 행사하는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노무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관용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온 국민은 특정 정치 단체와 후보를 인터넷은 물론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가 일체 금지 되었습니다. 입닥치고 있다가 나중에 선거 벽보나 보고 투표하라는 겁니다. 동의나 비판 없는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정부의 국지적 파쇼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존중하기 위해 헌법소원도 불사하시는 대통령이 있는 반면 국민들의 생각과 입은 닥치라고 하는 발상이 공존하는 사회는 좌파신자유주의에 이어 파쇼민주주의라는 악랄하면서 창조적인 정체성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원칙, 즉 누구나 먹고 일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지켜지기는 요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선이 아니라 6월 항쟁의 그 민주화 항쟁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 입니다.

2007/06/22 16:04 2007/06/22 16:04
DrunkenSTAR 이 작성.

잘 산다는 것

2007/06/17 02:46 / 생각

잘 살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사랑? 늦은 밤에도 파자마 바람으로 부러 나와주는 친구? 요즘 세상에 이런 낭만스러움은 싸이월드에 박제된 안락한 자랑이나 안도다. 보다 현실적인 안도는 도시 근로자 평균 임금보다 웃도는 자신의 임금을 재발견 할 때, 가구당 평균 부채를 걱정하는 뉴스 아나운서의 어두운 표정을 보며 미소지을 수 있을 때 이다. 잘 살려면 기본적으로 재발견의 미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미소에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시선이 존재하는데 대게 잘 살려는 개인적인 기준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맞춰진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을 사회적 기준으로 오인하는 대중영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잘 살려는 개인적 기준으로서의 의지는 이율배반이 되거나 반사회적인 불순 분자가 되기 일쑤다. 여기에서 잘 살려는 개인적 기준 또한 모호한 것이 개인적 다양성인지 아니면 공공선에 대한 의지 박약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희생을 통한 배려를 위해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희생을 통한 배려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을 넘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문제이다. 정확히는 공화주의의 부재.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남한의 정치역사가 의례 그러했듯 현실적으로 더 잘 살려는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이룩해주는 것이 민주주의인양 선전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사대사상은 신자유주의와 구분점을 잃었으며 정치와 언론은 민주주의를 향한 추파 만이 정치적인 고감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고착화시켰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오직 민주주의는 정치인이나 언론이 만들어낸 조각에 불과하다. 주위를 둘러 보라, 민주적인 것은 알량한 투표권 밖에 없다. 투표권조차도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 소속이다. 투표권이 알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공화적인 행동을 통해 잘 사는 것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든, 즉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잘 살려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 또는 그 형식에 대한 아름다운 계몽이 없었던 사회구조의 문제로 치부해도 결코 틀리지 않다. 잘 산다는 것, 그것이 결코 강남에 아파트, 귀족적 대화, 다듬어진 네일, 아메리칸 스타일의 브런치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 결코, 사회의 천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개인적인 얘기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2007/06/17 02:46 2007/06/17 02:46
DrunkenSTAR 이 작성.

6월

2007/06/08 13:25 / 생활
6월, 71년생인 나는 인생에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모국어를 잊었으면, 여기가 아니면 어디어도 좋을 것만 같은 자기회의의 시절이 있었는가 싶은데 이 몸이 두세개쯤 되길 바라는 지금 6월은, 나에게 살인적이다. 오늘의 나는 대게의 동시대인처럼 한달을 빈틈없이 산다는 건 어쩌면 제도권의 이율배반에 순응하고 소작의 규율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게다. 오늘의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세상을 비판하고 동의하는 여유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흉터가 없는 나는 6월을 빈틈 없이 보내면서 자신에 대한 예의에 충실한 삶을 보내고 있다. 절박함이 없었으니 자유로울 것도 없다. 내 절박함 따위는 과거의 리버스가 아니라 오늘의 절박함이라 상관이 없다. 하지만 오늘의 자유가 내 절박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것은 다른 누구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일게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내일의 행복이 오늘의 절박함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깨달으며 그 몫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2007/06/08 13:25 2007/06/08 13:2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