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성세대

2007/04/29 01:40 / 생각

어떤 사회의 기성세대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의식수준은 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다른 세대가 보고 배우는 귀감이 되는 법이다. 문화 흡수에 대한 속도는 떨어지더라도, 도덕감정, 원칙적인 이성을 기반한 실천 등은 오랜 경험을 축적한 기성세대만의 세련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클럽데이라 홍대에 몰려 나온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노인을 위협하고 시비가 붙는 장면이나, 캠퍼스 내에서 소수의 선배들이 다수의 후배를 폭행하는 집단 광기가 김승현회장의 보복 폭행과 닮아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온통 김승현이라는 기성세대가 그동안 다른 세대에 살아가며 보여준 대표적인 실천 강령이기 때문이다.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으면 된다. 이 사회에 사는 모든 시민들이 그러하듯. 그가 상심이 큰 것은 당연하다. 누구든지 법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적어도 이치를 따질만한 양심이 있다면,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든지 간에 초조하고 상심하는 것은 극히 정상이다. 그래서 그 상심이 일반 회사원과 대기업 회장은 얼마나 다를까? 일반 회사원은 가족이나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되니까? 대기업 회장은 국가 신인도며, 글로벌적 신뢰까지 챙겨야 하니 더 상심한 것일까? 경찰이 대기업 회장님을 함부로 대한다는 한화그룹의 볼멘소리는 지성이나 이성을 내다버린 대학생이고 선배라는 이름의 치기 어린 집단의 찢어 지는 데시벨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김승현회장이 상심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언제부터 나라 전체의 글로벌 신인도가 그의 낯짝에서 비롯되었으며, 한화그룹은 김승현의 도덕 실천과 일체 되어 그가 저지른 행위가 그대로 한화그룹 전체의 기업윤리와 같게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체포를 해야 것 같으면 체포를 하는 것이고 아니면 체포를 안하는 것이 법이다. 그렇게 모든 시민들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폭력을 행사한 인격체이지 한화그룹은 아니다. 다만, 나쁜 선례를 자꾸 만드는 나쁜 기성세대인 것은 명백하다.

2007/04/29 01:40 2007/04/29 01:40
DrunkenSTAR 이 작성.

이야기

2007/04/27 03:10 / 기억

내가 어느날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이야기 하고 있을 때가 되면 그 때가 사랑일수도 있겠다며 거드름 피울 것 같았고, 어떤 마음이나 되려 손사래 치는 씀씀이가 시원치 않아서 기대 만큼 설레지도, 그렇다고 밀어 낼 만큼 덤덤하지도 않아 흐르는 강물에 된장 풀듯 밍밍했던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오. 그래서 내가 그렇다 보니, 내가 마냥 서툴고 능글능글 하는 모양이 전혀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삼하게 나를 아우르고 때론 불쌍하게 봐주기도 하는 당신이 있어서 어디가서 섭섭한 일들이 생겨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으니,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주지 못했구려. 삼삼한 당신, 바람도 전 같지 않게 부니... 내 새로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 하오.

2007/04/27 03:10 2007/04/27 03:10
DrunkenSTAR 이 작성.

색다른 당선

2007/04/26 01:39 / 생각

김홍업씨가 결국 국회의원이 되셨네요, 가부장과 치맛바람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의 승리라 보여집니다. 대단하십니다~ 지역구도란, 깨질수 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주시면서 "민주평화세력이 하나로 통합하는 뜻" 이라며 일갈하시네요. 아버지가 민주시고, 어머니가 평화시겠네요. 기필코 거머쥐셨으니 앞으로 자알~ 하시길 바랍니다. 단, 무안신안 민중은 성찰 좀 하셔야 겠네요. 아버지, 어머니를 부여 잡은 민주평화세력에 그토록 공감을 하셨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재보선 투표율 54.5%, 정치의식이라면 팔도를 털어 전라도만하랴는 통념은 사실임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 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지엽적으로 대의정치이고 국회에 대표성을 보내서 우리 한번 잘 살아보자는 꿈을 이루는 것이라 하던데... 정치비리, 가부장, 치맛바람에 얼토당토 않은 민주평화세력 통합을 아우르는 김홍업씨가 과연 대안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따지고 보건데, 정치 자체에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 구조에 관심이 있었다고 밖에는 보여지질 않는데요. 열우당과 한나라당의 구도였다면? 열우당과 민주당의 구도였다면? 어땠을까요? 관심가네요. 여하튼 한나라당의 참패 구도로 언론이 몰아가고 있습니다만, 씁쓸한건 지역구도나 전통적 감정이 서슬 푸르게 살아 있다는 것이죠. 이 결과를 신자유주의나 수구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 들이기엔 민주평화세력이라는 자들이 이항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느냐는 것 입니다. 김홍섭씨야 말로, 이제 의원이시죠, 그런 케이스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정치계의 삼성이라는 색다른 영역을 개척한 분이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안신안 민중도 참 답답하셨겠어요, 이해가 갑니다. 김홍업씨~ 축하합니다, 세습과 민주평화세력의 통합이라... 색다르네요.

2007/04/26 01:39 2007/04/26 01:39
DrunkenSTAR 이 작성.

폭력

2007/04/23 01:02 / 생각
폭력이 일어나고 폭력의 주체를 감금하고 나면 세상은 망각하기 시작한다. 일시적이던, 영원하던 다시는 폭력이 일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안도가 감금에서 나오는 이유는 감금을 행위하는 권력의 존재가 공공 안녕과 정의 때문이라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그렇다고 믿는다. 세상의 망각이란 개개인의 망각이 합해져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폭력으로 부터 도피하는 세상의 망각은 사회적 권력에서 나온다. 폭력을 감금한 공권력 뿐만 아니라, 폭력이라는 언어를 희석시키는 언론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망각의 이유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유가 종종 슬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광기가 감금되지 않는 이상 언제든 폭력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광기는 망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감금하고 광기를 생산하는 주체가 동일할 경우, 즉 사회적 광기에 대한 책임 또한 권력이나 언론에 있을 때 사회는 절대 폭력으로 부터 안도할 수 없다. 권력과 언론이 이러한 책임에서 손쉽게 벗어 날 수 있는 이유는 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불행이 잠재적 폭력은 국지적이지 않다. 전체적이며, 사회는 발가벗게 노출되어 있고, 모두를 천천히 중독시킨다. 따라서 누구라도 조건만 맞는다면 능력 이상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무턱대고 안도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을 그대로 읽고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경우, 중독은 한꺼번에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다.
2007/04/23 01:02 2007/04/23 01:02
DrunkenSTAR 이 작성.

스스로 본인의 그림에 상징이 없고, 어떠한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다고 말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뜨의 그림 앞에 서면 정작 '무슨 의미일까'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실을 창조하는 데는 과거의 일에 철저히 관심을 끊는 방법이 있다. 보이는 것을 믿고(믿는다고 생각하고), 현실의 실제적 사물을 자각하는 것은 과거의 현상을 미메시스 하는 행위일 뿐 창조의 행위는 아니다. 눈에 대한 적응력이 진리 보다 우위에 있는 현실주의적인 우리들은, 과거를 모방한 현재의 믿음에 해석을 달리하거나 새로운 언어로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사물이 주는 교훈에 충실하기만 해도 상식적인 사람으로 오늘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사물을 고전적으로 이해하고 언어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성이나 초전도적인 유행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일단 믿어 보고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는 믿음과 합리화의 황홀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러한 부류의 관심은 전통에 있기 때문에 미적 관심 보다는 예측 될 수 있는 의미 관심에 더 민감하다. 앞과 뒤가 없고, 안과 밖도 없는데다가 심지어는 새와 잎이 한몸인 마그리뜨의 그림에서 전통의 반응은 대체로 희안함이거나 괴리일 것이다. 애써 아는체를 해보아도 작품과 나 사이에 좀처럼 괴리감이 가까워지지 않을 때 현실과 소외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현실주의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일까? 마그리뜨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며 칼리그램을 한다. 온통 이치에 맞지 않고 직관되지 않는 현실속에 존재하면서도 그런 존재자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한계를 구원하기 위해 마그리뜨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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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 1926
캔버스에 유채
139.5 x 105.5cm
어떤 머리틀을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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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1964-65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더비 해트도 아니고 파이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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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추구, 1963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죽은 물고기는 생선이다.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위에 진실이 묶여 있고 진실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죽은 것을 살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은 재현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죽은 것을 통해 현실을 보게 되면 그때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만 믿어도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일차원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현되기가 실로 어렵다. 노빠의 좌파신자유주의의 낯설게 하기가 그랬고, 황빠의 말씀만으로 존재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그랬다. 보이는 것 자체가 저열한 분열을 일삼았고 광기만을 지닌 텍스트들이 난무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량, 감당하기 힘든 패러독스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치 말아야 할 세계가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우상안에 갇히기를 원한다. 편안한 세상, 안락한 금가르기의 현실에 필요한 건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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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바다, 1951
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그럼, 여긴 바다속??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공화국 정부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피카소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편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이나 큐비즘이 부르주아지적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에서 비롯 됐다는 점에서 대게의 큐비즘 작가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예술적 영감에 의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독재에 저항하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파괴를 창조의 미덕으로 삼고 평화를 권력의 반동으로 연관지었던 시대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양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결집을 만들어 냈으며 정치적 준거로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열정이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을 망치거나 분열시키고 가족들 마저 그를 경멸하는 것을 읽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점령한 열정적 젊음과 좌파 지향을 한없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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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349.3cm * 77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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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2007/04/15 04:02 2007/04/15 04:02
DrunkenSTAR 이 작성.

양심적 병역거부

2007/04/09 15:04 / 생각
오해를 하실지도 모르니까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요, 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고, 주특기는 정보, 보직은 정보수집병 입니다. 군생활 내내 군대를 저주하며 시간을 때운 건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조, 어떻게든 살아 가야 겠고, 언젠가는 끝날 것을 믿으며 되도록 잘 살려고 노력했었지요. 조직에 적응했다는 말씀입니다. 군대라는 조직에 적응했었다는 사실을 통해 갖가지 오해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전 양심적 병역거부, 또는 거부자에 대한 생각보다 좀 더 급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군대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이 대체로 가지는 생각이 군대 가서 사람된다, 남자다워진다 라는 생각인데요, 역으로 얼마나 사람 같지 않았으면 군댈가서 사람이 될까 생각도 됩니다.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 사회에서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하는 얘길 들어보면 사람되는 과정을 그린 사람에 대한 얘기는 없고 순 군대 자체가 지닌 특수성과 폐쇄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람 답지 않은 추억에 대한 얘기말고는 없더라구요. 따라서 군대 가서 사람이 된다거나 남자다워진다는 말은 그들 추억의 합리화던가, 더 폭력적인 습성을 지닌다 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고 봐요. 근본주의자라고 비아냥 거리실지 모르지만, 차라리 양심적 병역거부가 휠씬 더 사람다운 생각이라고 봅니다. 사람다움이란 모름지기 양심의 소리를 듣는자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양심 자체와 병역거부로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다른 사람들은 다 군대 가는데 지만 안갈려고 하는 즉, 양심에 털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그러한 몰지각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몰아 가는데요, 여기서 양심은 존재에 대한 양심으로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강력한 마음의 소리 입니다. 헌법에서도 보장되는 헌법적 양심이지요. 따라서 양심은 보편적인 사회적 합의의 틀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어떠한 억압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보편적인 윤리와 사회적 감수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양심은 그 주체가 개인이며 그에 따라 보편적일 수 없는 개별적인 것 입니다. 양심에 털 났다라는 말씀은 바로 사회의 보편적 선으로서 옮고 그름을 판단한 것이라 보입니다. 한가지 더, 우리사회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로 종교문제 때문에 집총을 거부한다고 생각되어졌기에 종교적 병역거부자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 어디 종교 뿐이겠습니까, 종교가 아니더라도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어떠한 행위 앞에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개인은 누구나 대체 복모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법 19조의 양심의 보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물의 가치에 변별력을 가지고 자기 행위의 옮고 그름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개별적이며 보장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그럼 나라는 누가 지키냐고 하시겠지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나라 지키는 거냐? 하실텐데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 비양심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것이 스스로의 양심에 부합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판단하건데 그것이 옮다고 생각한 개별적 양심입니다. 그러한 양심도 지켜주셔야지 비양심적이라고 하시면 양심적인 분들이 곤란해지지요.. 제가 북한의 항시적 위협을 무시한 친북좌파적인 발언을 한 것인가요?
2007/04/09 15:04 2007/04/09 15:04
DrunkenSTAR 이 작성.

존재의 배반

2007/04/07 17:33 / 생각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존재에 대한 분열적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성(性)과 관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은 치기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앓고 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디로 부터 왔는가? 라는 철학적 자극에 감흥 받지 못하는 대게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로 부터 보편적 사고의 협소함을 시작하게 된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가족과 학교의 일원으로서의 위치, 사회적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신분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즉 정체성의 발현은 양심과 사고로 부터 나오지 않고 다분히 구조안에서 이루지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조인 자본주의, 실용주의, 물질주의는 정체성을 발현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인간 스스로 통제 해야 하는 개별적 가치를 사회구조적인 집합적 가치로 지향하게끔 만들고 있다. 즉 스스로의 자주성, 자유, 존엄성, 창조성을 근거해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되는 마음의 소리로 부터 정체성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 대중이 합의하고 있는 것에 묻어서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곤 한다. 불해이도 우리의 사회는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핵, 그로 인해 개인이 자치할 수 있는 규모의 공동체가 아니라 고전 자본주의를 넘어 신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 자체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번번히 조롱당한다. 개별적이며 보편적 인간 관계는 시장 가치적 관계로 전환되고 대게의 삶의 영역은 창조적 가치나 인간성을 부여 받지 못한체 공급과 수요의 법칙과 같은 가격이 형성되곤 한다. 행복이란 근본적인 가치는 그 가격이 얼마냐에 따라서 정체성을 확보한다. 인간 관계는 이익 관계로서 반드시 주고 받는 가격의 균등을 이루어야 비로서 형성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신념이나 양심을 통한 행위는 종종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점에서 냉소된다.

사람들은 자본의 양으로 자신과 타인의 위치를 파악하는데는 익숙하지만, 정신적 존엄이나 인간적 예의로서 서로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는 서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은 실용성과 효용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개인의 정체성도 유용한지, 자본의 축적에 이로움이 있는지 편리한지 등으로 그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윤리적인 면에도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익 관계인 인간 관계, 등가의 반대급부를 지녀야 움직이는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주장이나 신념 따위들은 자본의 효과나 신분적 성공과 일치할 경우에는 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모두 거짓이 된다.

이러한 관계를 모순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사회일 수록 홍세화 선생의 말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배반하게 된다. 노동자이면서 자본가의 입장에 동의하고 개인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과 동일시 하는 생각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러한 사회' 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가 온통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고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관심이 현재의 정체성이 되기 때문이며, 역사적 가치로 인식되어 온 플랫폼, 즉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정립될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미리 단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스타벅스적 삶에서 상품으로부터 스스로를 규정해야 하는 스핑크스적 질문이 오늘날의 정체성이라고 한다. 국가의 운명이 아닌 개인의 운명을 가늠하게 하는 현안으로서 한미 FTA 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미국적 삶을 통해 사고를 줄이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만 파악하면 그만이라는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존재를 부정하고 미래가치에 대한 막연한 가능성에 집착하는 사회일수록 정신적 빈곤함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사회에서 대중의 집단적 의견은 그렇게 되고 싶은 막연한 희망사항이거나 철없는 자부심 같은 것이다. '우리 국민의 위대한 자신감' 같은 정치조작에 매몰된 정체성을 들어 내는 여론 따위는 여전히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악랄한 다수결이며 민주주의의 퇴보를 의미한다. 모욕을 당한 욕망도, 혁신 없는 리더쉽과 가격이 매겨진 행복에 대해 저항 할 줄 모르는 정체성으로 무장되고 있는 한국사회는 루쉰의 아큐들이 망령으로 떠도는 사회일 뿐이다.

2007/04/07 17:33 2007/04/07 17:33
DrunkenSTAR 이 작성.

미국이 얘기하는 절차는 너무도 잘 지키고 협상 당사국인 미국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마치 무한해야 하는 것 같은 찬성론자들의 철없는 변명은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이미 쇠고기에 대해 OIE 에서 미국이 광우병 통제 가능한 국가로 내정된 사실은 숨기고 5월말이 되면 '합리적 방법' 으로 개방을 하겠다는, 마치 민중의 건강과 삶의 질적 향상을 무궁히 살핀 것 처럼, 정치적 수사만을 일삼고 있는 정부, 노무현정권, 노무현, 협상 당사자들의 해박한 실용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이 확실히 까발져 지고 있다. 주권적 권리를 포기하고라도, FTA 라는 틀에는 마치 그런 것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패배주의를 무지한 대중에게 주지시켜 주권보다 더 강한 자본의 힘을 일깨우기 위한 악랄한 텍스트를 점철시키고 있다. 찬성진영에 있는 패널들의 보고 있자면, 아련히 부시의 아우라를 본다. 지표도 중요하고 손익 계산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의 관점이 민중과 주체적 주권 권리에 있지 않는 명백한 상황을 보고도 과연 한미 FTA 가 잘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가지 더, 한반도 역외지역 이란 단어의 범위에 개성공단이 있네 없네 하며 한시간이나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개그다. 한반도 역외지역 안에 개성공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에드리브에 불과하다. 참으로 한심하다.
2007/04/06 01:48 2007/04/06 01:48
DrunkenSTAR 이 작성.

피아식별

2007/04/04 17:39 / 생각

한미 FTA 체결로 대중의 관심은 '살림 살이가 얼마나 나아질까?' 로 급선회를 하는 듯 하다. 대~한민국과 국익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대중들은 행여 국가 체면이 깎이지나 않을까,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터, 이제 한시름 놓고 차분히 계산기를 두두려 보며 대한민국과 국익 앞에 착취 당하는 민중의 뼈빠지는 삶에 대해 부르르 분노를 떨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 싶다. 한미 FTA 의 손익 계산서 앞에 망연자실한 진보 진영에도 이번 체결을 통해 한가지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피아식별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내용은 다르지만 반대의 행위가 일치하는 수구 보수세력과의 불편한 정신적 연대를 확실히 구별 지었으며, 노무현 정권의 기회주의적 정체성인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황망한 정의에서 드디어 '좌파' 를 때어 낼 수 있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따져볼 겨를이 없는 대게의 동시대인들은 한미 FTA 체결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살아 간다. 어떻게 나아 질 것 같은가? 라는 질문에 백이면 백 '시장 경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발전을 이루는 것' 이라 대답한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오늘을 살아 남은 자들의 이러한 비극적 논리를 탓할 필요는 없다. 이제 국회 비준되고 각종 법률을 미국의 요구대로 바꾸게 되면 당장 의료보험료가 한달에 4만원은 더 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들에게는 더 벌면 되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한달에 4만원을 더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도 말이다. 나보다 힘 없는 사람들을 지려 밟고 세운 성공과 윤택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보살핌의 철학을 잃은 살벌하고 무서운 사회다.
자본이 문화, 정체성, 역사, 인간성을 지배하는 이익 관계 사회에서 사상적 피아를 구별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권력의 레임덕을 돌파하기 위해 수구 보수 진영에 당당히 서는 선택을 통해 정치적 레토릭과 립싱크를 이용하여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게의 민중들을 어김없이 지려 밟는 명백한 사상 구별을 단행했다. 철없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불러오는 치명적 실수인 절차와 기술적 내용에 대한 편집증은 기어코 긴 호흡의 역사 속에 조직될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부정까지 일삼고 있다.

그가 인권 변호사로서 억압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시절을 진정성있게 보냈었다면, 한미 FTA 를 통해 수혜 받는 거대 자본과 재벌, 언론 권력의 콧노래를 신화화시키는 시간에 점점 삶의 질을 착취 당하는 대게의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보살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인식 안에 그 따위 혜안은 지워낸지 오래다. 사실 투쟁과 저항의 시작은 피아의 식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이고 희망도 이제 시작인 셈이다.

2007/04/04 17:39 2007/04/04 17:39
DrunkenSTAR 이 작성.

정치언어와 한미FTA

2007/04/02 01:39 / 생각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된 실수와 무지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언어에 쉽게 매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원론적인 틀안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든가, 스스로의 목소리가 없어서 언제나 양쪽 다 잘못했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만을 일삼는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을 놓고 논리를 세우는 합리화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입장을 정하고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미 FTA 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치열한 경쟁' 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을 한다. 치열한 경쟁에 대해서 보통의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처한 사회의 경쟁과 더불어 생각하며 치열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더욱 치열해질 것을 다짐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정치언어의 상징성에 그대로 매몰된 자들의 태도이다. 이들이 유산계급도 아니고, 기득권도 없으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의 문법에 쉽게 동조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그 긴장으로 인해 쉽게 언어를 왜곡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자립과 독립심을 키위기 위함이라는 소위 패권주의적이고 치열한 경쟁속에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삶 속에 스스로의 목소리 대신 유명인사들의 신변잡기나 사회 구조가 주는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인 열정에 복무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치열한 경쟁은 그러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자만심이다. 자본을 집중할 수 있고 이미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이 세계화적 경쟁에서 치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나 행복을 가식하는 싸이월드 1촌들의 이미지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너무 약해 자신의 명예도 생존도 지킬 수 없는 삶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각이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첫지점이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여기에 있다. 정치언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상징일 뿐이다.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조망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과 정치인의 언어는 현실을 창조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상징에 매몰된 개인이 많은 사회일 수록 오늘날 한미 FTA 와 같은 사안에 대해 바른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기대할 수가 없다. 자기 내부에 찾을 것이 별로 없는, 자아와 책임감을 포기한 개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이미 전제정치, 전제정치사회이다.

한미 FTA 반대!

2007/04/02 01:39 2007/04/02 01:39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