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2007/03/22 02:41 / 생각

장준혁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하얀거탑의 드라마적 충격은 이미 두 차례에 걸친 포스팅을 통해 스스로 밝혔던 바 있다. 하얀거탑이 그린 무서운 사회의 원본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 양 비겨서는 문화적 논란이 과연 현실을 직시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라는 의문을 푸는데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곧 전공의를 할 친구와 얘기를 나누어도 씁쓰름하게 다가오는 의사 조직의 추잡함은 대략 짐작을 넘어 거탑의 음지가 실로 어둡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의 관심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대학병원 과장을 하면 그만큼 벌 수 있을까?' 라는 재미 또한 현실의 막막함으로 금새 들통 난다. 대학병원 과장을 거치고 인천에 개원한 한 노의사의 지나가는 말은 이랬다. '과장하고 개원하는 것과 못하고 개원하는 것은 한...30억 차이 날 걸' 지인들을 통한 은밀한 확인 작업은 그렇다 치고, 병원을 방문하여 과장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특진이란 특별한 접수를 해야 함을 강요하는 공공연한 상업 행위 앞에서 아픈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나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천박한 자본주의만을 확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치밀하게 복무한 장준혁의 죽음 앞에 겸허해지는 것은 그도 인간이라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안타까움 때문에 흔들리는 인간적 감수성이 있어서 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명백한 사회 암적 존재이고 약자를 핍박한 강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 인데다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하는 환자 가족들이 극적 전개상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 것은 특히나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혹자는 종종 하얀거탑에는 선과 악이 없다, 또는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불편해서 유보하는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위험한 중도이거나 남이 판단하면 따라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자세일 뿐이다. 옮고 그름의 판단은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양심의 소리에서 나온다. 조직 생활을 해보니 장준혁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겠더라 약하다 싶은 타인은 철저히 부수고, 그동안 핍박 받아온게 얼마인데 줄을 대서라도 출세를 해야 겠으며, 그러한 수단이 좀 부당하고 남에게 어떤 해가 되어도 할 수 없다면 장준혁이 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장준혁의 외적 모습에는 반했지만, 내적 악의 잠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대게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반민주적인 행위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중도에 서 있고, 지식 있다는 사람들이 양비하는 자체가 반민주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갖고 있는 헌법적 양심의 소리를 범국가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얀거탑보다 휠씬 무섭고 어둡다.

2007/03/22 02:41 2007/03/22 02:41
DrunkenSTAR 이 작성.

경찰

2007/03/19 19:45 / 생각

우리시대의 모든 저항은 권력의 철저한 무관심과 무시 앞에 한낱 광기로 취급 받고 있다. 현재 집권 세력의 독재성은 이미 회자의 종착역에서 철길을 잃은 상태다. 특히나 권력은 이권이 개입된 1할의 저항에는 적극적으로 그 이권을 계산하고 이권이 개입되지 않는 대게의 정치적 저항에 대해서는 악랄한 폭력으로 대항하고 있다. 게다가 권력은 저항을 광기로 규정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사람을 광인으로 낙인한데다가 자본주의적 노동에 복무하지 않는 집단으로 선언하는 저절스러운 레토릭을 뿜어대고 있다. 이제 권력은 군사독재를 넘어 자본독재로, 스스로를 신흥개혁독재로 규정한데다가 봉건주의에나 있을 법한 저항의 대감금을 통해 무임금으로 자본주의에 강제로 복무하도록 하고 있다. 민중을 주적으로, 저항을 감금할 광인으로 인식하고 권력의 비열한 부름에 순응하고 이러한 봉건적 감금의 앞잡이 노릇에 치열한 조직력을 투입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경찰이다. 이 집단은 비로서 신흥경찰권력을 이해하고 사기, 절도, 강간, 살인, 유괴와 같은 선량한 민중을 파괴하는 공동체 범죄에 대한 관심을 거둬 버렸다. 자신들의 무능을 수사권과 같은 정치적 구조에 책임을 전가하는 권모술수를 보여주며, 마치 피해자인양 여론 몰이를 하는 지능적인 언론관까지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단 한차례도 민중의 지팡이인적이 없다. 이들은 민족을 배반한 순사였으며, 양심을 짓밟는 학살자였으며, 저항을 거세하는 도살자이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보호를 숭고하게 생각하지 않는 집단이라면 차라리 무정부적인 지역 민병대의 역할이 오늘날 경찰 집단의 인식과 구조보다 휠씬 선진적이다. 부당한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광기와 독재 권력을 보호하는 광기를 견주어 도대체 어떤 광기가 이 사회를 해체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07/03/19 19:45 2007/03/19 19:45
DrunkenSTAR 이 작성.

반대

2007/03/13 01:02 / 생각
한미 FTA 의 마지막 실무 협상이 완료됐다고 한다. 이제 우린 장기적으로 죽고 없거나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혁명의 길로 들어 설 것이다. 이것으로 노무현 정권의 허구와 악랄한 만행이 결국 희석시켜려 했던 붉은 색은 급진적 혁명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며 이른바 진보 논쟁을 일으키는 것만 봐도 이 정권의 악랄한 반진보 개혁(?)활동은 기리 역사에 남을 일이다. 짝퉁 진보에 속았지만, 천천히라도 갈 줄만 알았던 정치적, 인간적 권리는 축소되고 괴기한 정권이 토해 놓은 썩은 개혁을 논쟁하며 앞으로 수년을 퇴보할 것이다. 논쟁이 이제 의미가 없다. 인터넷은 아무도 공부하게 하지 않고, 인간이성을 단조로운 한줄 댓글로 구속시킨 작금의 시대에 먹고 사는 것을 빼앗을 한미 FTA 는 그 한줄의 이성에서 조차 회자되지 못한다. 언론은 하나 같이 '할 수 있다는 믿음' 으로 '타결' 을 외치고 있다. 게다가 한미 FTA 는 민중의 지팡이를 꺾은지 오래인 공권력에 의해 성역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과 이성이 진보하는 역사관을 지니지 못한 정권은 결국 수구 언론과 그 시녀인 공권력으로 자본의 진보만을 추구하고 있다. 국가간 자유무역이든 범세계적 자유무역이든 국민의 1할도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타결했는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은 무효다. 민주주의의 대의정치가 이토록 반진보적일 때, 대의정치는 민중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성이 있는 인간들의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역사의 한 장으로서 두려울 것이 없다.
2007/03/13 01:02 2007/03/13 01:02
DrunkenSTAR 이 작성.

수술 천재인 준혁의 능수능란한 손놀림을 통해 하얀거탑은 의학 드라마이면서 정치 드라마가 되고 때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휘어 잡아 균형 있게 째고 꿰매는 솜씨 좋은 드라마다. 어쨌든 드라마가 인간사의 어떤 단층을 보여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치정을 불멸의 소재로 다루던 구태의연한 인간 관계를 한층 진지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사실만으로 마냥 하얀거탑의 내용에 열광적으로 동의하거나 긍정할 수는 없다. 목로의 주점에서 정치는 이미 진부하고 식상한 안주거리를 넘어, 분위기 마저 망치는 골치덩어리가 됐다. 행여 정치를 정치하다 라는 동사로 바꾸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사람이 어디까지 추해질지 염려마저 앞선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치하는 계급과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가 협동하여 온갖 악의적인 텍스트로 점철된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대중과 멀어졌다. 따라서 정치 드라마라고 하면 의래 공화국을 쟁취하려는 선 굵은, 하지만 피곤한 인생의, 남자들의 이야기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정치하는 것이 어디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던가? 게다가 한국 드라마에서 정치 잘하는 여자가 적다고 하여 남자는 정치, 여자는 수다쯤으로 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얀거탑이 놀라운 이유는 일상의 정치를 발가벗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악랄한 이유는 마초와 가부장적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선과 악처럼 구도를 그려가는 장준혁최도영을 그대로 양분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명이 살아 있다. 인간을 긍휼이 여기지 않고 질병을 사랑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능력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끝없는 교만과 자신감이 불러오는 추잡한 사변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진정 장준혁의 가여운 인생과 배경도 용서할 수 없을까? 소신과 따뜻한 인간성을 주제로 사람 자체를 보살피는 최도영의 자세를 현실의 조직에 넣고 한없이 긍정하고 동의할 수 있을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세계를 조절해가는 방법은 여간 머리가 좋지 않으면 몸을 숨기는 것 조차 버겁다. 세계가 스스로 바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와 틀이 그렇다. , 만들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장준혁은 만들어진 세계에 최고로 잘 복무한 자의 진골이며, 최도영은 만들어 갈 생각을 하는 이상주의자 즉 반골이다. 가슴에서 반골인 최도영을 응원하면서도 장준혁에 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드라마가 끝나면서 순식간에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만들어진 세계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장준혁이 비록 일그러져 있지만, 개개인이 꿈꿔왔던 그야말로 거탑이 아니던가. 정치에 밝고, 말보다 몸이 먼저 아는 리더쉽,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개천에서 용내야 하는 사회에서 이 정도의 수완은 더 이상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기에 우리는 수긍한다. 저런 멘토가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고 보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병들어 있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내줘야 하고 기꺼이 이용 당해야 하는 신념과 영혼이 늘어 나는 사회는 명백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패배주의 때문에 우리는 최도영을 고참으로 모실 수가 없다. 삶은 숭고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제도권의 삶이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밥벌이는 숭고하지만, 밥 벌어오는 과정은 그렇지가 못한 현실은 그 자체로 공포다. 친절하게도 하얀거탑은 이러한 공포가 장준혁과 그의 남자들 즉 남성성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가르쳐 준다. 인간관계를 온통 이익관계로 조립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던지는 조롱 속에 뜬금 없이 여성의 역할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베개머리 송사하는 하얀거탑의 여성성의 구도는 마땅치가 않다. 남성성의 광기가 불러온 이익관계 사회에서 이웃을 더 이상 구속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인간관계로 복구하는 데는 평화와 공존과 같은 여성성이 희망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모실 수 없는 최도영은 남성이지만 여성성의 상징이다. 하얀거탑은 시종일관 진중하게 무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지켜보는 시청자조차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진골이 될 것 인지, 반골이 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개인만의 선택이 아니다. 정치를 하는 가부장적 집단에 여성이 진출하는 모습만으로 사회적 여성성을 회복했다고 볼 수 없다. 장준혁의 파멸을 보면서 다시 긍정하는 비겁한 냉소를 던지는 행위가 아닌, 그를 여성성의 사회로 끌어 들여 보듬어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하안거탑은 무서운 사회에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사회로의 귀환, 최도영을 고참으로 존경하고 기꺼이 모실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이면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7/03/07 00:23 2007/03/07 00:23
DrunkenSTAR 이 작성.

드림걸즈

2007/03/01 03:01 / 관심

솜씨 좋은 노래만으로 드림걸즈의 천박한 상업주의와 성급하게 봉합해버리는 화해 무드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랑루즈 이후에 OST 욕심이 생겼다는 점과 트럼펫이야 말로 있을지도 모를 내 음악적 감수성이나 비주얼한 장치면에서 그나마 그럴싸하게 들어 맞는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거들먹거리는 가족이란 테마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실, 가족이란 관계는 형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안에서 혈연이나 가족간의 사랑 따위의 내용은 차라리 탄압에 가깝다. 가족이란 관계는 모두가 그럴 것이란 고리타분한 정의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적 형식이고 그 형식안에서 개인의 상실을 강제한다는 염연한 현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볼모로 사회적 관계마저 가족의 테마로 묶으려는 시도는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상업적 필요에 의한, 다루기 쉬운 조직속의 개인으로 존재를 약화시키려는 악랄함을 목격하게 한다. 드림걸즈의 커티스의 역할이 대변하듯 이러한 악랄함을 자행하는 남성이라는 집단이 오랜 세월동안 마치 성적 자부심인냥 취급해왔던 가부장의 의미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결탁해왔다.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한 가장의 측은함을 위로하기 전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부심을 부여 잡고 온갖 타협들과 타협했던 패배주의를 질책 받아야 옳다. 드림걸즈의 멋드러진 흑인 음악이 백인의 입맛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토대로 흑인들의 꿈을 마치 백인 우월 사회와의 진출인양, 또는 흑인 음악의 저항성을 들먹이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실, 드림걸즈에서 음악을 빼고, 카리스마가 가신 비욘세의 아름다움을 빼면 차, 포 땐 장기판처럼 긴장감이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공한 나쁜놈인 커티스를 통해 가족과 상업주의가 긴밀히 협작하는 문제적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걸즈가 드림을 실현하는 영화적 시나리오를 벗어나 커티스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당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살살 달래 주면 언제든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회란 참으로 천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 돈의 양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드림걸즈의 메세지 되겠다.

2007/03/01 03:01 2007/03/01 03:0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