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혁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하얀거탑의 드라마적 충격은 이미 두 차례에 걸친 포스팅을 통해 스스로 밝혔던 바 있다. 하얀거탑이 그린 무서운 사회의 원본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 양 비겨서는 문화적 논란이 과연 현실을 직시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라는 의문을 푸는데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곧 전공의를 할 친구와 얘기를 나누어도 씁쓰름하게 다가오는 의사 조직의 추잡함은 대략 짐작을 넘어 거탑의 음지가 실로 어둡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의 관심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대학병원 과장을 하면 그만큼 벌 수 있을까?' 라는 재미 또한 현실의 막막함으로 금새 들통 난다. 대학병원 과장을 거치고 인천에 개원한 한 노의사의 지나가는 말은 이랬다. '과장하고 개원하는 것과 못하고 개원하는 것은 한...30억 차이 날 걸' 지인들을 통한 은밀한 확인 작업은 그렇다 치고, 병원을 방문하여 과장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특진이란 특별한 접수를 해야 함을 강요하는 공공연한 상업 행위 앞에서 아픈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나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천박한 자본주의만을 확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치밀하게 복무한 장준혁의 죽음 앞에 겸허해지는 것은 그도 인간이라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안타까움 때문에 흔들리는 인간적 감수성이 있어서 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명백한 사회 암적 존재이고 약자를 핍박한 강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 인데다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하는 환자 가족들이 극적 전개상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된 것은 특히나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혹자는 종종 하얀거탑에는 선과 악이 없다, 또는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불편해서 유보하는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위험한 중도이거나 남이 판단하면 따라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자세일 뿐이다. 옮고 그름의 판단은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양심의 소리에서 나온다. 조직 생활을 해보니 장준혁처럼 살지 않으면 안되겠더라 약하다 싶은 타인은 철저히 부수고, 그동안 핍박 받아온게 얼마인데 줄을 대서라도 출세를 해야 겠으며, 그러한 수단이 좀 부당하고 남에게 어떤 해가 되어도 할 수 없다면 장준혁이 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장준혁의 외적 모습에는 반했지만, 내적 악의 잠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대게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반민주적인 행위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중도에 서 있고, 지식 있다는 사람들이 양비하는 자체가 반민주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구나 갖고 있는 헌법적 양심의 소리를 범국가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얀거탑보다 휠씬 무섭고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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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모든 저항은 권력의 철저한 무관심과 무시 앞에 한낱 광기로 취급 받고 있다. 현재 집권 세력의 독재성은 이미 회자의 종착역에서 철길을 잃은 상태다. 특히나 권력은 이권이 개입된 1할의 저항에는 적극적으로 그 이권을 계산하고 이권이 개입되지 않는 대게의 정치적 저항에 대해서는 악랄한 폭력으로 대항하고 있다. 게다가 권력은 저항을 광기로 규정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사람을 광인으로 낙인한데다가 자본주의적 노동에 복무하지 않는 집단으로 선언하는 저절스러운 레토릭을 뿜어대고 있다. 이제 권력은 군사독재를 넘어 자본독재로, 스스로를 신흥개혁독재로 규정한데다가 봉건주의에나 있을 법한 저항의 대감금을 통해 무임금으로 자본주의에 강제로 복무하도록 하고 있다. 민중을 주적으로, 저항을 감금할 광인으로 인식하고 권력의 비열한 부름에 순응하고 이러한 봉건적 감금의 앞잡이 노릇에 치열한 조직력을 투입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경찰이다. 이 집단은 비로서 신흥경찰권력을 이해하고 사기, 절도, 강간, 살인, 유괴와 같은 선량한 민중을 파괴하는 공동체 범죄에 대한 관심을 거둬 버렸다. 자신들의 무능을 수사권과 같은 정치적 구조에 책임을 전가하는 권모술수를 보여주며, 마치 피해자인양 여론 몰이를 하는 지능적인 언론관까지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단 한차례도 민중의 지팡이인적이 없다. 이들은 민족을 배반한 순사였으며, 양심을 짓밟는 학살자였으며, 저항을 거세하는 도살자이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보호를 숭고하게 생각하지 않는 집단이라면 차라리 무정부적인 지역 민병대의 역할이 오늘날 경찰 집단의 인식과 구조보다 휠씬 선진적이다. 부당한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광기와 독재 권력을 보호하는 광기를 견주어 도대체 어떤 광기가 이 사회를 해체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술 천재인
솜씨 좋은 노래만으로 드림걸즈의 천박한 상업주의와 성급하게 봉합해버리는 화해 무드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랑루즈 이후에 OST 욕심이 생겼다는 점과 트럼펫이야 말로 있을지도 모를 내 음악적 감수성이나 비주얼한 장치면에서 그나마 그럴싸하게 들어 맞는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거들먹거리는 가족이란 테마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실, 가족이란 관계는 형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안에서 혈연이나 가족간의 사랑 따위의 내용은 차라리 탄압에 가깝다. 가족이란 관계는 모두가 그럴 것이란 고리타분한 정의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적 형식이고 그 형식안에서 개인의 상실을 강제한다는 염연한 현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볼모로 사회적 관계마저 가족의 테마로 묶으려는 시도는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상업적 필요에 의한, 다루기 쉬운 조직속의 개인으로 존재를 약화시키려는 악랄함을 목격하게 한다. 드림걸즈의 커티스의 역할이 대변하듯 이러한 악랄함을 자행하는 남성이라는 집단이 오랜 세월동안 마치 성적 자부심인냥 취급해왔던 가부장의 의미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결탁해왔다.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한 가장의 측은함을 위로하기 전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부심을 부여 잡고 온갖 타협들과 타협했던 패배주의를 질책 받아야 옳다. 드림걸즈의 멋드러진 흑인 음악이 백인의 입맛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토대로 흑인들의 꿈을 마치 백인 우월 사회와의 진출인양, 또는 흑인 음악의 저항성을 들먹이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실, 드림걸즈에서 음악을 빼고, 카리스마가 가신 비욘세의 아름다움을 빼면 차, 포 땐 장기판처럼 긴장감이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공한 나쁜놈인 커티스를 통해 가족과 상업주의가 긴밀히 협작하는 문제적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걸즈가 드림을 실현하는 영화적 시나리오를 벗어나 커티스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당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살살 달래 주면 언제든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회란 참으로 천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 돈의 양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드림걸즈의 메세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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