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에 그런 전통이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제대할 때 쯤 뒷산에 벤치를 하나 만들었었다. 처부에 출근도 하지 않고 사역도 나가지 않는 그야말로 민간인과 다름 없는 말년 육군 병장의 짝다리가 꼴 사나워서 중대 행정관이 고안해낸 급전통이었겠지만, 서툰 톱질로 하나 완성하고 나왔다.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의자가 되었지만, 고참이 물러나며 의자를 내주는 의식은 빈틈 없이 채우는 시간의 미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고참의 의자에는 가치의 경중을 떠나 역사와 책임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후배이고 누군가의 의자에 앉아 시간을 적분하고 있다. 시간은 역사와 동일하지 않아서 모든 시간이 역사가 될 수 없다. 무엇이 될까가 아닌 어떻게 살아 보일까를 통해 미분된 시간, 즉 역사를 간직한 의자를 내어 주게 된다.
오로지 나만 책임지면 되었던 의자를 넓혀야 될 시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문제는 의자를 내주고 바닥에 앉거나 비슷한 것을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벤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자꾸만 십여년전 왜 벤치를 만들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인생이란 의자 하나 밖에 내어 놓는 것이라 했던가. 어느 바닷가에 풍덩 던져 넣은 연자 맷돌, 그 무게 같은 것이 아니어서 벤치를 만들고 빈자리를 만들 수 있었는가 보다. 이제 중요한 시간이 다가 온다. 살아 보아야 할 자세를 고쳐 잡아야 겠다.
검색어 '2007/02'에 대한 3 개의 검색 결과
- 매우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잡지에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칼럼을 써서 보냈다.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정의가 혁신이라는 경영적 단어와 시너지를 내며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 프레임워크를 정리하는 일은 어떤 신생 산업에서든 마찬가지 절차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세스와 등식을 이루던 문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찌질거리던 거지 근성은 여전한데 벌써 혁신을 다루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면 이 문제는 적응력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과 경영의 문제이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 하는 것으로 노동 생산성을 이해 하는 원시적 단계에서 A 에서 B 로, B 에서 C 로, C 에서 다시 A 로 피드백 되는 시스템 단계가 성립되면 이로서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정의된다. 좀 더 복잡한 경영이 개입하면 A 의 일을 하는 조직과 구성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왜 A 의 일을 하는데 그 조직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된다. B 의 일을 하던 조직이 A 의 일을 하면 안될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도출된 제목이 멀티 플레이어이다. 노동자는 멀티 플레이라는 사상에 매우 민감하다. 즉 사용자가 노동력을 복합적으로 착취하려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여 수준은 낮고 그에 못지 않게 근무 환경도 열악하며 클라이언트와 부대껴야 하는 감정노동은 그 이상인데 이일 저일 다 하라는 요구는 쉽게 반발을 산다. 이러한 반발은 대체로 대기업이나 포탈로의 이직을 부른다. 마치 그곳에 가면 그런 일은 다신 없을 것만 같은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말이다. 턴 오버(Turn-over), 프로세스가 기술적으로 시스템이 되지 못한 때 유행했던 트레이드 오프(Trade-off)와 마치 동어 반복 같으면서 이행 대립한 말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이직 환경과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력과 자원의 턴 오버가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의 노동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일단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간단한 업무 프로세스 안에서 형제 같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고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행복이-업무적으로-추구로만 끝나는 이유는 턴 오버와 트레이드 오프라는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트레이드 오프가 성행하던 시대에는 최소한 정의하기 위한 저항이 존재했고 그것을 프로세스라는 현장의 기술적 부분으로 이해했다. 턴 오버의 시대인 현재는 어떠한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다. 싫으면 중이 떠나 다른 절을 찾아 다니는 자원에게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저항은 없고 분노만 있기 때문이다. 기획에서 디자인, 개발에 이르기까지 용역이 대부분인 업계에서 용역 단가를 심오하게 생각하는 노동자가 없으니 사용자는 노동의 신성함을 망각하고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게 된다. 프로세스의 정의가 필요했을 때 그것을 A 로 정의하지 않고 AB, AC 로 정의했다면 지금보다 더 심한 턴 오버의 시대를 맞이 했을 지도 모른다. 입맛에 맞게 옮겨 다니는 활동은 사실 행복의 순간이나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마음속엔 노동에 대한 신성한 의식이 없는 분노의 앙금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경영의 추구가 성장만을 동력으로 삼아 추구만으로 끝나고 ‘경영하다’ 라는 동사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턴 오버가 노동자에게 그러한 허무를 남기게 될까 안타깝다. 선배들이 구축한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계몽적이라 혁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늘날 이 업계를 이끄는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칼로리가 원동력인 노동의 신성함을 견적서의 산식 안에 퍼다 나르는 시대는 지났다. 아울러 자신의 노동을 경시하는 턴 오버의 태도로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도 그쳐져야 한다. 경영의 입장에서도 멀티 플레이어가 멀티 플레이어다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멀티 노동의 신성함을 이해하고 마땅한 노동 임금을 지불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정의가 혁신이라는 경영적 단어와 시너지를 내며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 프레임워크를 정리하는 일은 어떤 신생 산업에서든 마찬가지 절차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세스와 등식을 이루던 문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찌질거리던 거지 근성은 여전한데 벌써 혁신을 다루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면 이 문제는 적응력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과 경영의 문제이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 하는 것으로 노동 생산성을 이해 하는 원시적 단계에서 A 에서 B 로, B 에서 C 로, C 에서 다시 A 로 피드백 되는 시스템 단계가 성립되면 이로서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정의된다. 좀 더 복잡한 경영이 개입하면 A 의 일을 하는 조직과 구성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왜 A 의 일을 하는데 그 조직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된다. B 의 일을 하던 조직이 A 의 일을 하면 안될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도출된 제목이 멀티 플레이어이다. 노동자는 멀티 플레이라는 사상에 매우 민감하다. 즉 사용자가 노동력을 복합적으로 착취하려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여 수준은 낮고 그에 못지 않게 근무 환경도 열악하며 클라이언트와 부대껴야 하는 감정노동은 그 이상인데 이일 저일 다 하라는 요구는 쉽게 반발을 산다. 이러한 반발은 대체로 대기업이나 포탈로의 이직을 부른다. 마치 그곳에 가면 그런 일은 다신 없을 것만 같은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말이다. 턴 오버(Turn-over), 프로세스가 기술적으로 시스템이 되지 못한 때 유행했던 트레이드 오프(Trade-off)와 마치 동어 반복 같으면서 이행 대립한 말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이직 환경과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력과 자원의 턴 오버가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의 노동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일단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간단한 업무 프로세스 안에서 형제 같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고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행복이-업무적으로-추구로만 끝나는 이유는 턴 오버와 트레이드 오프라는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트레이드 오프가 성행하던 시대에는 최소한 정의하기 위한 저항이 존재했고 그것을 프로세스라는 현장의 기술적 부분으로 이해했다. 턴 오버의 시대인 현재는 어떠한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다. 싫으면 중이 떠나 다른 절을 찾아 다니는 자원에게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저항은 없고 분노만 있기 때문이다. 기획에서 디자인, 개발에 이르기까지 용역이 대부분인 업계에서 용역 단가를 심오하게 생각하는 노동자가 없으니 사용자는 노동의 신성함을 망각하고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게 된다. 프로세스의 정의가 필요했을 때 그것을 A 로 정의하지 않고 AB, AC 로 정의했다면 지금보다 더 심한 턴 오버의 시대를 맞이 했을 지도 모른다. 입맛에 맞게 옮겨 다니는 활동은 사실 행복의 순간이나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마음속엔 노동에 대한 신성한 의식이 없는 분노의 앙금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경영의 추구가 성장만을 동력으로 삼아 추구만으로 끝나고 ‘경영하다’ 라는 동사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턴 오버가 노동자에게 그러한 허무를 남기게 될까 안타깝다. 선배들이 구축한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계몽적이라 혁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늘날 이 업계를 이끄는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칼로리가 원동력인 노동의 신성함을 견적서의 산식 안에 퍼다 나르는 시대는 지났다. 아울러 자신의 노동을 경시하는 턴 오버의 태도로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도 그쳐져야 한다. 경영의 입장에서도 멀티 플레이어가 멀티 플레이어다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멀티 노동의 신성함을 이해하고 마땅한 노동 임금을 지불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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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의는 국사 점수에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얻은 지식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역사 자체를 구태의연하고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학문으로 폄하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역사를 조망하고 현실을 진보시키는 그야말로 역사관의 역할은 알싸한 부동산 투자 정보 보다 저급한 취급을 받아도 이의가 없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역사관 운운 따위는 엘리트 의식에서 나온 이기주의의 소산으로 즐거운 술자리를 망치는 식상한 이야기이거나 지배 계급의 논리를 추대하는 정치적 메카니즘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였다.
지배 계급은 역사를 통해 기득권을 쟁취하고 영위한다. 즉, 정치의 흐름에 영합하고 들쭉날쭉한 여론 몰이배로서 역사를 들먹이며 민중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그들의 역사관 속에는 현재의 정치 안목과 국가의 안위 따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거나 주입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론이나 국익에 목마른 대중들의 애국감정에 호소하여 역사의 본질을 꽤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 목적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근간이 사상이나 교양의 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거취가 만들어 낸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부도덕하게 관리하고 세습한 결과로 불리우는 기득권을 수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이러한 기득권을 착취 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의 본질을 진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조망한 진보로 규정한다. 대중들이 현안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집적거리는 이유도 과거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없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에 빗대어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관을 통해 기득권이 착취되지 전에 지배 계급의 정략에 현혹되어 그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인양 합리적이지 못한 계급 동질화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권을 획득한 민주화의 노력을 마치 지배 계급의 아량으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모든 민주화가 이루어 졌고 그들은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 처럼 과거를 이해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남한 대중의 정치 수준은 남한의 민주화가 선거권이라는 공화주의의 형식을 갖춤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지점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한 인권과 인간성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천박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라는 취미의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부재하다. 대중들의 무지는 그 열띤 파쇼와 포퓰리즘이 속성도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행위가 어떻게 책임을 전가하고 권력으로부터 무한한 보호를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양심과 의식에 지독하게 악랄하여 단기적으로 무마할 수 있으면 장기적으로 면책 되는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옮바른 역사관은 청산하는 역사관이다. 전쟁을 벌인 자,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한 자,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옹호한 자들을 청산하는 것이 옮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관은 기득권을 착취하고 반지성적인 지식인을 지배할 때 바로 선다.
지배 계급은 역사를 통해 기득권을 쟁취하고 영위한다. 즉, 정치의 흐름에 영합하고 들쭉날쭉한 여론 몰이배로서 역사를 들먹이며 민중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그들의 역사관 속에는 현재의 정치 안목과 국가의 안위 따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거나 주입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론이나 국익에 목마른 대중들의 애국감정에 호소하여 역사의 본질을 꽤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 목적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근간이 사상이나 교양의 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거취가 만들어 낸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부도덕하게 관리하고 세습한 결과로 불리우는 기득권을 수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이러한 기득권을 착취 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의 본질을 진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조망한 진보로 규정한다. 대중들이 현안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집적거리는 이유도 과거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없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에 빗대어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관을 통해 기득권이 착취되지 전에 지배 계급의 정략에 현혹되어 그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인양 합리적이지 못한 계급 동질화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권을 획득한 민주화의 노력을 마치 지배 계급의 아량으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모든 민주화가 이루어 졌고 그들은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 처럼 과거를 이해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남한 대중의 정치 수준은 남한의 민주화가 선거권이라는 공화주의의 형식을 갖춤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지점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한 인권과 인간성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천박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라는 취미의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부재하다. 대중들의 무지는 그 열띤 파쇼와 포퓰리즘이 속성도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행위가 어떻게 책임을 전가하고 권력으로부터 무한한 보호를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양심과 의식에 지독하게 악랄하여 단기적으로 무마할 수 있으면 장기적으로 면책 되는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옮바른 역사관은 청산하는 역사관이다. 전쟁을 벌인 자,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한 자,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옹호한 자들을 청산하는 것이 옮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관은 기득권을 착취하고 반지성적인 지식인을 지배할 때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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