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눈

2006/12/28 01:23 / 사진

깊은밤과 새벽녘의 중간쯤, 오랫동안 서러웠던 골목에 사나운 눈이 땅에서 쏟아 올랐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고, 내 단단한 손은 뼈조각을 움직여 달그락 소리를 내며 그날도 이 얕은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울음이 끝날 때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돌아섰다. 예의 없는 뼈와 영혼으로 가득찬 내 속은 울음을 중지시킬 침묵도 없으면서 셔터를 누를 욕망만 가득했다. 밤눈이 거듭 사나워져 꾸짓고 꾸짓어도 세상은 하나도 하얗게 변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가볍게 진정만을 가지고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내 속의 검은 얼음이 땅에서 쏟아 나와 이 서러운 골목에 배설해낸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내 속은 하나도 비워지지 않았다.


2006/12/28 01:23 2006/12/28 01:23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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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해를 살아 오면서 삽겹살집 계산대처럼 한해 한해를 결산해 본 적도 없고, 인생 최고의 아이템을 꼽은 적도 없지만, 올해 읽었던 책 정도는 반추해 보길 원했는데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읽은게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달째 잡고 있는 호치민평전이 너무 방대한 분량이란 핑계가 감성적으로 통할지 몰라도 독서의 속도가 지나치게 더딘건 사실이다. 물론, 아직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못한(책의 그 지점) 호치민에 대한 평가를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 인물이 가진 매력에 대해서는 의문 투성이긴 하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주요 요원이면서,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에 반한다고 볼 수 있는 민족해방노선을 끌질기게 주장했었던 호치민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패배주의의 극복이다.

패배주의에 매몰된 이에게 패배주의를 극복하려는 가열찬 모습은, 때로 열등감의 표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패배주의가 가장 해로운 지점이며, 의식을 그런식으로 식민지화 시킨다는 점이다. 패배주의는 경쟁을 도전이라는 감성적인 과제로 묶고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서 당당히 이겨내라고 한다.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왜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두고 그 경쟁에서 살아 남는 소수가 되어야 하는지? 왜 이러한 구조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사회적 가치와 윤리에 반동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는데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사회적 위기는 한국전쟁의 종전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해소되지 못한 물리적 조국통일의 과업속에서 제대로 반항하지 못한 민족적 사대주의는 좌우익의 대립을 지난하게 끌고 가는데 유용한 밑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좌우익의 대립각은 역사의 이항대립으로서 사회적 제도와 인간생활의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끌고 나가는 메카니즘의 휘발유 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중심적 투쟁의 대상이 여전히 좌우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씹으면 씹을 수록 재미난 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지닌 동란의 역사를 회피하면서 얻은 의식의 식민지화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변화를 오직 기술적, 개발적 변화만으로 치켜 세우는 자본주의적 발상은 좌우익의 담론을 이용하여 어떤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비틀림, 일그러진 엘리트의 초상이다. 효율적 생산을 옹호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에 골몰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반지성적 행위를 하는데 열광하고 그것을 비판하는데 침묵한다. 황우석의 거짓말도 모자라서 700 명이나 되는 비틀린 지식인들의 전시작전통제권반환 반대 성명은 반지성적 행위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에 질세라, 마시멜로에 열심히 사인하며 드디어 일그러진 엘리트 계급에 든 것을 자축했던 정지영은 개천에서 용내야 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패배주의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민족해방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와 연대해야 겠으나 그들은 혁명이 촉발할 시점이 오면 반동적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들어낼 것이 분명하다는 호치민의 주장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것은 혁명 이후, 동란 이후, 마땅히 사람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배반하고 반동해 온 자들이 이른바 반지성적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남한의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지점은 좌우익의 대립각이 아니라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들이 거대 자본과 정치 권력에 결탁하여 생산한 패배주의의 예리한 각도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리함이 난도질한 사회에서 진정한 붉은 피가 흘러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적 장치들은 제대로 된 작동을 멈춘지 오래다. 고름처럼 문드러진 패배주의가 열등감을 마치 당연한 것인양 기름칠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실천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자세 또한 문제지만, 그것이 민주적인 장치들을 중지시킨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병적인 패배주의와 상업주의로 몰아가는 엘리트들과 자본이 문제다. 그것에 반항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럼으로, 나의 올해의 책

[호치민 평전]
윌리암J 듀이커
푸른숲

[한국현대사산책]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대화]
리영희, 대담 임헌영
한길사

2006/12/27 19:46 2006/12/27 19:46
DrunkenSTAR 이 작성.

Respect, Africa

2006/12/19 02:58 / 생각

미국 뿐만 아니라 열강이라 생각하는 모든 나라들, 대체로 OECD 가입국, 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패권 식민지적인 세계 정세로 몰아가고 싶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대륙이 있다면 그것은 아프리카다. 여행자들에게는 이집트와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찬란한 관광코스를 아니 떠올릴 수는 없겠지만, 200달러에서 500달러의 GNP 와 그 나라 위정자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에이즈와 기근의 확산으로 점철된 대게의 아프리카 나라들은 열강들의 손쉬운 먹이감으로 전락하였다. 그 안에서 신자유주의의 신흥 패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자본의 지배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누구라도 유추가 가능하다.

자본의 흐름이 대체로 원활한, 즉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혼합하여 견고한 시멘트 비율을 추구하고 있는 사회에서 자본의 지배란, 생존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아니라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지배력을 행사한다. 이를테면, 광의적인 의미의 인권이나 환경 같은 것들이 자본의 지배 안에서 즉각적인 생존과 관련이 있을까? 라는 의문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의 대표적인 몰지각에 해당된다. 몹시 복잡한 자본주의며 신자유주의라는 혼합과 관계 없는 사회, 즉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룰은 대체로 생존에 즉각적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이 생존을 확대 시키는 임무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담보로 자본을 축적하는데 복무한다는데 있다. 그것도 의식과 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보살펴야 마땅한 무지한 민중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의견이지, 엔터테인먼트나 정치에 대한 의견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세계민중이 미국이라는 나라, 미국이라는 단어를 통해 헐리우드의 문화 내지는 유나이티드로 뭉둥그려진 마치 평등할 것만 같은 기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실인 것인양 떠벌리기 위해서 엔터테인먼트나 정치가 가세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4년, 영국의 아티스트 밥 겔도프는 못사는 나라를 그냥 도와야 한다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막연한 원조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신념을 토대로 민중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 유명한 Band Aid 를 통해 원조합시다~ 라는 구호를 버리고 제3세계, 구체적으로는 이디오피아의 부채를 탕감해 달라는 목적으로 영국의 의식있는 아티스트를 모아 공연했다. 다음해인 1985년, 미국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가 끝나고 시상식에 참석한 아티스트를 모아 USA for Africa 라는 슈퍼 밴드를 일시적으로 조직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팝아티스트인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 작곡한 We Are the World 를 슈퍼밴드가 부르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지각을 세계에 호소하게 된다.

밥 겔도프의 영국이나 마이클 잭슨의 미국이나 의식있는 개인이 추구했던 이상은 현재 지점에서 물건너 간게 틀림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정치적 소망은 사뭇 다르다. 밥 겔도프는 몇푼 도와주는, 게다가 그 몇푼이 온전히 도와야 하는 곳에 쓰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디를 그리고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갈망했다면, 마이클 잭슨이 따라했던 것은 미국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얄팍한 원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이 두 나라가 앞장서서 그동안 아프리카에 행한 온갖 악행은 에이즈와 기근의 확산만으로 갈음될 수 없다. 고질적인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내전의 종용에 미국과 영국의 무기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주장할 수 없는 이 패권주의적 나라들이 고작, 콘스탄트 가드너와 블랙호크다운 같은 영화로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도와줘야 한다는 것, 도움은 반드시 존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We are the World 의 그 좋은 가사처럼 하나의 인류는, 물질적인 도움을 실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존경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함이 마땅하다. 아프리카를 바라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못사는 대륙, 따라서 무조건적인 도움을 줘야할 곳, 이래서는 지배력이 강한 자본만이 도움을 빙자한 확대를 펼칠 것이 분명하다. 아프리카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 고장에 거주하는 인류에게 마음가져야 하는 것은, 오늘날 서울 어느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건네는 가벼운 목례와 같다. 그 예의를 통해 아프리카의 민중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프리카에 필요한 것은 세계 민중의 존경어린 관심이라는 것을...
시덥지 않게 원조 한답시고 아프리카에 갔다와서 사진 전시회나 하는 속물 엔터테이너들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We are the world 와 같은 멜로디에 취해 머리 위로 라이터 불이나 좌우로 흔드는 태도는, 세상 도처에 깔여 있는 예의 없는 것들의 몰지각한 행동일 뿐이다.

2006/12/19 02:58 2006/12/19 02:58
DrunkenSTAR 이 작성.

몰지각

2006/12/19 01:09 / 생각

미국이 몰지각한 것이 있다면, 세계 시민을 억압하고 있는 패권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패권주의가 몰락했던 역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데 있다. 역사를 외면하면 할 수록 현재 범하고 있는 잘못이 있었던 때보다 더 이전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무리들이 바로 꼴통 보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의 가장 해로움 점은 역사를 돌리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민을 현혹시키고 역사의 고리와 단절시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과서를 왜곡하고 썬글래스를 쓰고 개발과 번영 아래 깔린 인민의 몸뚱아리를 부정하는 것이 이들의 쾌쾌한 방법론이다.

2006/12/19 01:09 2006/12/19 01:09
DrunkenSTAR 이 작성.

신년운세

2006/12/12 21:40 / 생각

이제 조만간 공평하게 한살씩들 더 먹게 된다. 자동차 보험도 갱신해야 하고 수시로 신년운세를 보라는 문자 메시지도 도착한다. 운세를 보는 사람들을 탓할 것 까진 없지만, 대체로 운세의 정점은 내년엔 대박 행운이 있거나 돈을 잘 버는 쾌가 있는지 점춰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가 상승률과 잉여자본의 배당으로 판가름되는 내년 연봉이 결정된 도시 근로자들에게 돈을 더 잘버는 쾌란 자투리 돈으로 들어 놓은 적립식 펀드 수익율이 상승하거나 남이 열심히 해준 덕에 차려 놓은 밥상을 먹듯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 정도일 것이다. 더욱 더 가정에 가정을 한다면 서민의 희망 숫자인 로또 이상으로 제도적인 쾌는 없을 것이다. 신년 운세와 신년 소망이 투자 대박과 부채 상환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는 분명 기형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소망이 물질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비단 자본주의만의 탓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오로지 축적에만 관심이 있고 분배에는 무관심한 이유는 자본이 이룩한 제도에서의 옮바른 처세는 축적의 상승 효과에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 섰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사회적 소망을 계몽할 수단은 없고, 행복의 척도는 곧 물질적 윤택이라는 등식을 성립하고 나면, 신년운세에 대박과 상환의 두 키워드만으로 삶의 질을 정하고 말게 된다. 이미 노동자들의 알량한 운명은 통계적인 물가 상승률과 잉여자본의 가치만으로 정해 졌는데도 컴퓨터의 뺑뺑이 돌리기에 저당 잡힌 위로와 환희의 감정을 교차시키며 산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보니 사랑하고 분노하고 용서하는 감정들이 가진 분별력이, 자본의 척도로만 가늠되어 진다,

2006/12/12 21:40 2006/12/12 21:40
DrunkenSTAR 이 작성.

야근

2006/12/09 01:58 / 생활
연일 강도 높은 야근에 남아 나지 않는 건 체력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온데간데 없다. 마음은 급하고 즉석해서 신기술을 공부하며 장표에 그려내는 작업을 오래간만에 진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과는 정확하게 단절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부담이 교차되고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면 기름칠이 잔득 된 베어링에 가동되는 밀링머신과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끼니를 굶어 칼로리를 공급받지 못한 뇌는 여러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베어링을 돌리는데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노동과 가동의 차이가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2006/12/09 01:58 2006/12/09 01:58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