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2006/11/30 03:20 / 생활
하루에도 수백개씩 날아드는 정체 모를 트랙백을 지우며 글 쓰는 것을 잊고 머리는 공허 합니다. 제대로 읽지 않으니 머리에 고이는 것도 없고, 글은 익지도 않아 풋냄새가 납니다. 차리리 이렇게 잊고 트랙백이나 삭제하고 빠져 나가는 의미 없는 클릭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멸하는 계절이 되고 해가 바뀌는 징조가 뚜렷하니 곳곳에서 정리하는 분위기가 사뭇 어색하지 않습니다. 크게는 올해 초에 맘 먹었던 책쓰기는 여전히 부표를 잃은 난파선이 되어 떠돌고 있습니다. 기어이 노년에 생각해봄직한 육각 창문에 짧은 커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장독대와 살얼음 핀 식혜가 아니고는 제대로된 정리는 요원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제 인생에 스스로 짊어진 굴레 입니다. 거창하지 않게 기어이 가지고 가야 할 욕심입니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은 아무래도 시민단체 활동인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활동은 제대로 하지 않지만, 자원활동가라고 해주면 으레 힘이 납니다. 비록 스스로 정했지만, 차세대 진보 네트워크로서 발전시킬 '날개 인터네셔널' 프로젝트가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정을 미루고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지만, 간사님들도 열심이시니 잘 될 것 같습니다.
며칠동안 2006 웹어워드 코리아 최고 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30개 사이트를 평가하고 일일이 평가글을 작성하고 드디어 자문위원까지 검토가 끝나 발표가 났습니다. 고백하건데 1000% 공평하고 공정한 평가를 했다고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조금은 압력을 가했는지도 모르고, 부당한 외압을 행사하려고 시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외압을 받는 내가 얼마나 잘 버티고 그것을 오직 스트레스로 승화시켰는지 자부할 수가 없네요. 그다지 영향력이 있는 위치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습관적으로 공정을 파괴하는 무리들과 섞여 있는 것이 싫어 마음속에 꾹꾹 담고 있었는데 강릉에서 폭발한 것 같습니다. 성질머리 하고는... 핑계거리를 구실삼아 새벽을 전속력으로 달려 오던 영동 고속도로에서 오래전 김규항님이 충고해주었던 의적 행세가 아닌가? 라는 말이 심장을 후벼 팠습니다.
기존 제도를 벗어나지 않고는 결코 이상향을 이룰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하는 심정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다급한 심정에 현실적인 충고 하나가 매스가 되어 절개하고 고름을 짜고 봉합해버리는데 저녁 한나절과 소주 대여섯병이 필요하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다운 기업,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버리고 노동자가 회사 자체가 되는 기업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해 놓고 그동안 참고 기다려 온 시간을 겨우 이 정도에 해치워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도 취하고 저도 취하고 이모집을 전전하면서 다급했던 마음과 성질머리를 인사동 골목에 쳐 박아 두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그침이 있습니다. 그침을 안다는 것은 그때의 자세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살아 보임으로서 생겨 날 것이란 믿음에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아직도 살아 보임이란 태도가 부족합니다. 그안에서 잘 살아야지, 잘 해보아야지 하는 가열찬 마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몸이 그리할테니까요. 몸이 먼저 그리 하는 태도, 나는 아직 빈곤한데 화려한 것만 쫓는 가식에서 한껍질도 벗겨내지 못한 것은 아닐지.
2006/11/30 03:20 2006/11/30 03:20
DrunkenSTAR 이 작성.

혁명

2006/11/21 00:48 / 생각
21세기에 혁명이란 단어는 죽은 텍스트라는 말이 있다. 텍스트는 죽었으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은 개혁과 혁신이란 활동성 넘치는 개념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윤을 창출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21세기적인 혁명으로서 개혁과 혁신을 요구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이윤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사회적 공공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 목적을 거세한다.

어떤 혁명이나 개혁에 있어서 그것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상보다 이를 원리적으로 뒷바침 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덜 받는다. 혁명과 개혁은 같은 단어가 아니며 개혁은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폭력적 절차를 수반하던 비폭력적인 민주적 절차를 수반하던 원래의 질서 가운데 일부는 남게 되어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해도 원래의 질서 중 일부는 남게 되고, 남는 질서는 반드시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충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리 개혁을 해도 분배할 수도 분해할 수도 없는 원래의 질서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를 변화 시키는 민주주적 절차로 한나라당이라는 대안이 마치 개혁인양 인식하는 무리들이 바로 남겨진 원래의 질서들의 총합이라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집권 세력의 변화를 통해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군주제를 유지 하는 것이며 그나마 파괴된 원래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이 전부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역사에 기록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땅히 진보해야 할 역사를 되돌릴테니까.

혁명은 이데올로기에 지배 받는다. 혁명은 한 체제를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 되는데 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오직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남는 이유는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메카니즘일 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시대인들이 어떻게 살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돈을 결부 시키는 것은 그만큼 자본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시스템, 즉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사인 셈이다. 자본의 탐욕과 자기 확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아 혁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천천한 개혁으로 할 수 없을 때 비로서 혁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운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을 기록한 존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의하면 계급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혁명 전 러시아는 연설과 읽을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빨아 들이는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도시의 골목은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발언대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인민들이 갈구한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엄청난 읽을 거리, 즉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비참한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혁명을 진두할 수 있는 혁명가를 필요로 한 것은 혁명가의 요구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가는 기존 체제에 안주한 계급에서 나오지 않으며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행동적 규범이 따르게 된다. 이는 19세기의 극단적인 혁명가였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문답' 에서 얻을 수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는 혁명적 대의에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무자비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일 수도 있다. 혁명가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닌이나 호치민은 네차예프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좋아했고 그들의 혁명적 경전과 강령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혁명가는 고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자본교환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중적 유행만이 있을 뿐이다. 억압은 있으되 어디서도 혁명적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혁이라는 자본의 헛개비를 믿고 국익적 선동에 무리지어 사상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유교적 사상을 자본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고 민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회 공동체에 진작하는 노력은 없고 개별 집단에 대한 복지만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저급한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좀 더 불공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획득이나, 남보다 먼저 자본의 흐름에 양탄자를 깔고 눕는 것이 유일한 삶의 치열함이다. 그런 치열함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본의 물음에 대입시키며 고민한다. 그러한 방정식에 필요한 건 성형수술과 사치품, 그리고 적당한 동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는 아직 혁명 같은 순결한 대의가 필요하지 않다.
2006/11/21 00:48 2006/11/21 00:48
DrunkenSTAR 이 작성.

계속되는 기만

2006/11/19 01:35 / 생각
유엔총회에서 북한 인권 결의안이 남한의 찬성과 더불어 가결됐다. 인권 결의안에 반대 하거나 기권했던 남한이 찬성 의사를 보인 논리는 유엔사무총장 내정자를 낸 나라라는 점과 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결의안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만이다.

[1]유엔사무총장 내정자를 낸 나라

유엔사무총장의 정치적 자리로 또 다시 국익과 애국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 진다. 게다가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노무현 정권에게 유엔사무총장의 자리는 고마운 치적이 아닐 수 없다. 마침 PSI 참여로 인해 국지전 가능성이 높아 지는 위험을 헤쳐 나갈 마땅한 딜을 찾지 못한 정부에게 인권 결의안과 유엔사무총장의 정치적 입지는 PSI 를 피하면서 더불어 보수세력에게 받을 지루한 비난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의 논리는 북한 인권을 개선하겠다는 진정성은 없고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나 다름 없다. 북한의 인권이 유엔의 결의안으로 해결되는 사안이었다면 마땅히 이전에 반대나 기권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남한의 헌법 10조, 11조에 명시된 보편적 인권에 대해 국가적인 성찰은 커녕, 국가가 나서서 개인을 파괴했던 전력이 풍부한 나라가 기껏해야 깨달을 수 있는 인권의식은 국제사회의 눈치와 이에 대한 임기응변 밖에는 없다. 유엔사무총장이라는 개인적 호사, 반기문 내정자는 국적이 한국일지 몰라도 그의 행동은 유엔에 종속된다, 를 국익에 빗대어 남한의 국제적 입지 상승으로 인정하려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채 1년도 안된 국익과 애국을 버무린 황우석의 사기행각에 적극 발맞춘 정부가 여전히 국익처럼 보이고 애국처럼 보이는 헛개비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점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로 하는 맹목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반증하게 한다. 국익과 북한의 인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북한 군부를 살찌우는 데만 쓰인다는 보수 반공주의자들의 주장이고 눈치와 임기응변에 능한 정부의 정책 수정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라면, 그 정치적 감투와 인권을 개별 사안으로 바라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국제적 눈치는 필요치 않다. 북한의 인권은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지원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정책의 성실한 일관성을 보여줄 때 가능한 것이다. 정치권력과 섞인 인권이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함에도 불구하고 시덥지 않은 유엔사무총장이라는 감투를 내세워 인민의 눈을 기만하려 하고 있다. 국가의 퀄리티가 곧 국익이 아니다. 국가의 퀄리티가 유엔사무총장 따위로 갈음 될 수는 없다.

[2]인권에 대한 보편적 인식

애초에 UN 이라는 국제공동체가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이 있었다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소말리아 내전등에도 같은 시각을 보였어야 마땅하다. 유독 UN 은 미국의 관심사에 개입하거나 무관심하다. UN 은 오래전부터 보편적 인식을 포기한 집단이다. 이러한 집단에서 논의되는 인권은 개입 가능한 권력의 이동에 결의안 같은 문서를 통해 근거를 주는 제록스 같은 회사의 구조와 같다. 차별 받거나 이해관계로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인간성과 인간의 정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자본군주들의 역사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인해 인권의 신장이 아닌 전쟁과 승부를 조장하고 이를 근거하는 문서를 복사하여 전세계에 프로파간다 한다. UN 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권력 감정을 적절히 섞어 가며 발전해 왔다. 이러한 의식은 북한이 내일이라도 핵무기를 파기하겠다는 미국이 원하는 행동을 보여주게 되면 인권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무관심을 표명할 것이다. UN 은 북한 주민을 인권의 보편적 인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행동에 대한 이해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그들의 오랜 개입의 역사를 통해 극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UN 을 통해 북한 인권을 해결하는 방향은 북한을 제재하여 얻는 정치적 이익을 향하고 있다. 북한 인권은 개선되어야 한다. 다만, UN 을 통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보편적 민족의식으로 부터 시작하여 인권문제에 이율배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의 첫걸음은 중단되었던 인도적 지원의 재개이다.
2006/11/19 01:35 2006/11/19 01:35
DrunkenSTAR 이 작성.

훈훈한 비

2006/11/18 00:33 / 생활
오늘 그가 물었다.
술 끊을 수 있어?, 아니 못 끊을 것 같아, 친구들이 부르는데 안가면 서운해하지 않겠어?, 그렇겠지...
오늘도 술을 마시면, 전화라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번쩍번쩍 기억을 놓아버릴 말을 할 테니 그게 너무 싫어서 오늘은 그 유혹들을 이겨 보았다. 색을 모두 삼킨 겨울밤을 지나치며 망설이는 마음을 꼭짜서 겨울 바람에 파닥파닥 내어 낼었다. 더러 술을 마셔야 겠지, 그동안 대게의 경우가 술을 챙기며 보낸 시간들이었으니 더러 술을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고, 하도 술에 절어 문득문득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 고등어처럼 될 수도 있는 경고에 대해 반성을 할 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겨우 한번 술 마시는 유혹을 이겨내고 보니, 만취해서 빠져 들었던 슬픔을 더욱 이겨내지 못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술이 예찬 받아 마땅한 때가 지나고 나니, 생활을 부식시켜 가는 줄도 모르고 거꾸로 술을 예찬하고 있던 나의 뇌는 어느덧 빈집이 되어 갔다. 이상이나 동경 같은 것을 잃어 버린 것도 어쩌면 저 빈집 때문이 아닐까? 술을 멈춰 나라 경제를 일으키자는 거창한 서술을 생각한 것도 아닌데, 술을 한번 이겼다고 너무 거만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되었든, 얄팍해진 마음과 구겨진 목소리로 만든 기계가 되어 술을 연료 삼을 까봐 덜컥 겁이 든 것도 있지만, 외로움을 달래던 훈훈한 비가 바뀐 연유도 있고 하니... 더러 실패도 하고 가끔 실수도 없지 않겠지만, 오늘 만큼은 많이 좋아 했던 것을 이겨내 보아도 좋다.
2006/11/18 00:33 2006/11/18 00:33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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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왜 필요할까?

2006/11/16 01:26 / 생각
오마이뉴스의 고태진 칼럼에서 오래간만에 우상에 대한 고찰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펜을 놓으신 리영희 선생의 지적 다짐 또한 우상의 파괴였고 그것에 따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했다. 고태진 칼럼의 마지막에 국회가 없으면 더 잘될 것 같다는 아나키스트적인 생각에 무한 동의를 날리고 싶다. 국회라는 틀이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이상안에 갇혀 마치 꼭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처럼 평소엔 정치에 무심한 대중들이 목로의 주점에서 생활의 피로를 풀어 내는 카타르시스용으로 취급하는 국회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우상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고, 민주주의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기준에 부합하거나 먹고 사는 것이 숭고한 인민들에게 먹고 사는데 이상 없게 만들어 주면 된다. 국회가 그런 기능을 못할 때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위해 국회라는 절차적 기능에 대해서 제고할 필요가 생겨야 하고 이에 대해 성실히 논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순기능이고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이 아닐까? 국회가 왜 필요할까? 더 이상 민주적이지 않은데 말이다.
2006/11/16 01:26 2006/11/16 01:26
DrunkenSTAR 이 작성.

이유

2006/11/14 17:28 / 기억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섹시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옛날 옛날 아주 그윽한 옛날부터 외로움과 기다림이 뒤범벅되어 철판 긁는 소리를 내던 날이 그쳐서도 아니고, 마음속에 두껍게 쌓인 녹이 깨끗하게 닦여 나가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남을 사랑함에 어리숙하여 사랑인가 싶을 때 뒤돌아 눈물이 나는 줄도 모르던 시절을 건너와서도 아니고, 담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사막에서 세상의 모든 상념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소멸하는 듯한 외톨박이의 간절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그저 밥 잘 먹었냐고 물어오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얘기해주는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2006/11/14 17:28 2006/11/14 17:28
DrunkenSTAR 이 작성.

이제 만나러 갑니다

2006/11/09 01:11 / 기억
바람이 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날은 바닷가에 서서 조난신호를 날리며 내가 가장 작았을 때를 생각하곤 했었다. 애쓰며 산다는 생각들을 하며 동호대교를 건너고 있던 오후, 낮은 구름, 높은 구름이 설겆이를 해 놓은 접시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밥 벌어 오는 숭고함 따위가 잠시 눈을 감고, 이제 그런 하늘을 보낼 때가 있어서 기뻤다.

무엇이 무엇이 아니던 때 내 심장은 말이 없었고, 조간 신문으로 덮어 놓은 짜장면 그릇이 주말 내내 집앞을 지키고 있는 동안 심장은 오직 딸꾹질 하는 데만 쓰이고 있었다. 푸른 페인트 칠을 한 동사무소 옆에 우체통이 있다. 깨끗한 빨래를 널어 놓고 게으른 의자를 타일러 우체통 옆에 놓는다. 소중한 것, 조금도 낡지 않는 것들을 적어 우체통에 넣을 수 있어서 기뻤다.

햇빛이 무거워 엉거주춤한 계절을 따라 나의 편지가 물들고 천년전에 눈물을 흘려 만든 바람이 그곳으로 날아가 내가 가장 작았을 때를 얘기해주고 네가 웃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에게 있었던 외로움이 나에게만 와 준다면, 세상에서 제일 고마워.

인생에 뭉둥그려진 모든 예의 바름과 이별을 고하고 나니 심장이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달리기, 천천히 그리고 긴 호흡으로, 한조각의 뼈라도 또각또각 움직여서 모든 남으로 부터 요약된 너를 만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다. 심장이 할 일은 오직 그것. 조난신호가 웅웅 거리던 바닷가에서 내가 부르는 지상의 노래가 있고 그보다 더한 그리움이 나에게만 와 그 무게를 물어보면 아무도 모르게 바다속에 던져 넣은 연자맷돌, 그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상에서 제일 고마워.
2006/11/09 01:11 2006/11/09 01:11
DrunkenSTAR 이 작성.

어느 고장을 방문하여 그 고장이 오늘날에 이르기 위해 겪은 역사를 겸허하게 받아 들이는 태도로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식민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세계이념적 갈등을 관조하며 바로 우리나라의 해방전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많은 식민지가 겪은 역사의 울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실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IRA 의 탄생의 서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영화를 감상하는데 열어 두어야 할 감수성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었지만, 켄로치 감독은 마지막까지 담담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본인이 영국인이란 사실조차 잊거나 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감독 자신으로 부터 관객까지 펼쳐진 숙명적인 공간속에 반성의 성찰을 가득 부어 넣는 효과를 만들고 꼼짝 없이 역사의 진실 앞에 무릎 꿇리고 만다.

며칠전 강준만 교수의 기회주의로 부터 자유로운 이념이 없다는 강연을 듣고 그를 탁월한 기회주의자쯤으로 생각하게 되어 서글펐는데, 이 영화가 그 기회를 이념과 때어 내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기회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연대에 스스로 만든 기회가 아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너져 버리는 연대가 가진 이념이 기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엄밀히 기회와 주의는 분리되어 있어야 하고 기회 자체가 속물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고장에서나 지배가 있고 피지배가 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작동시키는 계급은 지배 계급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란 사실 속에서 가장 허탈한 것은 지배 계급이 가진 기회라는 기득권을 피지배 계급에서 나눠주는 것이다. 기회를 투쟁하는 방식으로 받아 들인 피지배 계급에서 기회를 운용하는 방식이 터득되어 있을리 없다. 이 지점에서 기회는 이념적 잣대와 결합하여 계량이 되기도 하고 중도가 되기도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는 아일랜드의 독립이라는 마이클 콜린스 적인 영웅 서사를 도입하지도 않으며, 독립이라는 반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보리밭을 흔들지도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놀랍게도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성이라는 바람의 울림이고 피와 이념의 갈등으로 그 뇌관을 터트린다. 아일랜드 인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법정에서의 논쟁과 테드와 데이미안이 자치정부 조약의 승인과 지속적인 투쟁에 대해 벌이는 논쟁은 이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쾌쾌한 마르크스주의를 지상으로 끄집어 내는 놀라운 스팩타클을 담당한다. 그들이 동의하는 것은 독립이지만,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독립(또는 자치)만 된다면 무엇이어도 상관 없다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닌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해방하지 않고는 독립이 되어도 소용 없다는 좌파적 신념이 이 영화의 바람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흔히 등장하는 좌파적 지적 허영 같은 것도 찾아 볼 수 없으면서 테드와 데이미안, 두 형제의 갈등은 눈에 띄게 낯익은 구도다. 식민지였던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는 첨예한 구도속에서 극진적 진보주의자인 데이미안이 지향했던 것은 영화속 논쟁의 한 구절로 요약된다.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켄로치 감독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제임스 코넬리를 통해 타협하는 것은 안심일 뿐, 진정한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앞세운 지배는 그것이 타협을 통해 해소된다고 해도 다른 무엇으로 지배를 계속할 것임을 역사적 반복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반성케 한다. 오늘날 그 무엇은 자본이고, 그 자본속에서 누가 기회를 배풀고 있으며 그것을 투쟁하지 않은 상태에서 획득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반복될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희망인가?

2006/11/06 02:23 2006/11/06 02:23
DrunkenSTAR 이 작성.

흔히들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균형' 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러한 충고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대게가 시각에 대한 균형을 주장하는 사람조차 균형에 대한 균형 잡힌 기준이 없기 때문인데다가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관념하는 자세에 있어서 균형이란 양비일 수 밖에 없다. 흔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양비론적 시각은 현상이나 현안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견해가 없는 사실에 대한 사실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주장도 반대가 없을 수 없고, 어떠한 견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비판적인 시각은 모두가 만족하고 어떠한 반대도 무릎쓸 수 있는 균형이 아니라, 반대의 의견에 대해 반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시각에 대해 기꺼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이를 위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정치적 레토릭으로 분류하고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이는 어떠한 내용은 견해가 없는 맹목적인 내용에 불과하고 대중들의 시선에 쉽사리 안착하고 만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진보하는 역사는 없다. 사회와 이념에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 이항대립의 구도속에서 역사의 투쟁이 존재하게 된다. 그 속에 균형이란 언제나 기회주의였고 회색분자들의 대중적 논리로 기록되어 있다.

집권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비난의 이유는 집권세력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386으로 대변되던 진보의 세력들이 너도 나도 전향 선언을 해버리는 기막힌 현실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앙가주망은, 그 변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날조된 구실로 전락해버렸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모든 사회적 부조리 현상에 '노무현 때문' 이라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으면서 스트레스를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곤 한다. 균형 잡힌 집권세력이 만만한 대상이 되고, 그 균형 잡힌 세력이 민중들에게 한 가장 큰 업적이 담론의 카타르시스 뿐이란 사실은 절망적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해악이 미시 담론의 둘레에서 집권이라는 지도적 세력에게 확대되었을 때, 그 사회가 겪는 관념적 발전을 얼마나 후퇴시키는지 깨닫게 만든다.

진보는 보수의 가치보다 우월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보수적 시각으로 볼 생각이 없다. 다만, 나의 성찰이 부족하여 때로 보수적인 태도와 행위가 있었을 때 마땅히 그것을 반성하려는 자세만 가졌을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결연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균형 잡힌 시각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나의 진리를 배반하지 말자는 의지는 성의껏 다지고 있다. 많은 역사에서 그 진보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생애를 점령한 두 가지 지향점인 '젊음' 과 '좌파이념' 에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절대 균형이라는 허구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2006/11/01 23:44 2006/11/01 23:44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