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나 변협은 입이 두개라서 할말이 많은 것인가?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대법원장의 표현은 진부한 발상의 전환이다. 진부한과 전환이라는 이항대립적인 단어가 공존하는 문장이 성립하는 이유는 그래도 이용훈 대법원장이 표현을,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발언' 이라며 핏대를 올리는 검찰이나 변협을 위시한 변호사 집단은 여전히 역사 의식이나 자기 반성이 부족한 사회적 엘리트 의식의 표상일 뿐이다.

검찰은 헌법이 보장하는 유일한 기소독점 집단이다. 검찰이 판단하여 기소를 하지 않는 이상 죄의 유무를 따질 수 있는 절차를 가질 수 없으며, 인간의 신체 자유를 합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집단에 대해서 이견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집단적 권리를 역사 의식에 비추어 보면 권력과 이합집산하고 기득권을 노리는 판단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이기주의를 통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만든 역사적 집단이란 타이틀에도 이견이 없다.

공판을 통해 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밀실에서 수많은 공작을 해왔던 검찰의 수사 기법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던가? 대법원장이 수사 기록을 내던지라는 앞뒤 뺀 언론의 보도자료 텍스트에 발끈하는 사태는 유치하다 못해 가증스럽다. 그들이 인간 인권은 고사하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지른 역사적 오류에 대해서 화장실 안에서 조차 리딩을 했던 사람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현재 재심리중인 인혁당 사건 하나만 가지고도 이따위 자세를 보일 수 없는 인간들의 집단이다.

공판중심주의를 하자니 인신구속과 기소독점권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심심한 성찰을 해볼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 역사를 그르치고 거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일종의 편집증적인 자존심에 선량한 민중들이 다치고 해쳐진다. 그래서 법원에 거는 기대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검찰이나 법원이나 같은 맥락에 있는 이익 집단(이익집단이다.!)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으나 다만, 그 고리에 대해서 모두가 이미 파악한 모순을 표현한 대법원장의 발상에 점수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공판중심주의에 대해서 검찰이 법원의 엘리트 의식이라고 비판했다고 하는데 가당치도 않다. 민주주의는 독점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기소독점과 같은 헌법적 권리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권리이지, 민주주의의 이상적 권리는 아니다. 민주주의적 권리 행사는 인문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행사이어야 한다. 절차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미 해결되었고, 액션만 남아 있다는 판단이야 말로 절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발상이다. 공판중심주의도 마찬가지다. 공판이란 것은 재판의 과정에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법원이 검찰에서 제출한 수사 기록을 검토하고 공개적으로 재판하는 과정에 시민적 참여가 없으면서 공판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검찰이 간단히 엘리트 주의로 비판해도 응당 논리가 서게 된다.

대법원장의 발상과 표현은 인권에 대한 작은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공판에 대한 자주적 생각이 아닌 자주적 표현에 있어서, 그것이 법원의 사법적 우선순위를 위한 정치 행동이라 할지라도, 검찰과 변호사가 마구 허물어 트린 인권에 대해서 법원이 제길, 한번쯤은 공판중심주의 때문에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그리고 변화할 수 있는 의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검찰과 변협의 유감은 민중의 유감과 맞짱을 뜨겠다는 자세이다. 그들은 그럴 수 없다. 더불어 대법원장의 사과는 민중의 유감이다. 더 표현하고 더 발상하지 못하면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를 계기로 역사적 오류 투성인 대표적 집단들이 더더욱 조화롭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6/09/27 03:53 2006/09/27 03:53
DrunkenSTAR 이 작성.

호텔 르완다

2006/09/21 03:06 / 관심

호텔 르완다를 그저 감동적인 영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영화 홍보용 홈페이지의 타이틀인 기적과도 같은 용기가 시작되는 곳이란 진부한 마케팅적 텍스트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루세사바기니의 용기가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래서 아름답다던지, 아프리카의 쉰들러 리스트 라는 댓글평은 차라리 영화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영화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내전으로 서로를 잔혹하게 학살하는 1994년의 상황과 그 와중에 살아야만 했던 르완다의 민중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바퀴벌레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그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감동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폴 루세사바기니의 행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남기고 죽음으로 부터 떠나야만 하는 서구 외국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종족 갈등은 왜 일어 났으며, 서구 사회(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외국인들이 아닌 멀리서 지켜보고 결정하는 사회)는 왜 이들이 벌이는 대학살을 방관해야 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종족 갈등은 1919년 벨기에가 르완드를 식민지배하면서 생겨났다. 벨기에는 편리한 지배를 위해 종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인사정책을 시행한다. 다수인 후투족을 배격하고 소수인 투치족에게만 낮은 관직을 주며 두 종족간의 우열을 갈라 놓는다. 그로부터 두 종족간에 끊임없는 분쟁이 발생한다.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식민통치이념은 생존을 위협하고 결국 인종청소인 제노사이드가 일어 나는 상황이 되자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한다. 세계 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은 왜 방관 했을까? 1992년 소말리아에는 3만의 미군을 투입하여 중재를 했던 사례가 르완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이유가 소말리아에는 4개의 미국 유전 업체가 원유를 채굴하고 있었고 르완다에는 아무런 정치 경제적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25만의 투치족이 후투족 시민군에 의해 학살되는 동안 폴 루세사바기니는 1200여명의 투치, 후투족 난민을 그의 호텔에서 지켜낸다.

서구사회의 인도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작동하는 이념이다. 비단 르완다의 경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호텔 르완다는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서구사회의 모순과 작동원리를 지상의 둘도 없는 이상인양 추구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부조리한 일들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다. 희망을 만들었던 콘스탄트 가드너와 달리 호텔 르완다는 분노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보여주며 불편하게 만들고 알아가게 만든다. 영화는 묻는다. 불편해라, 저 사람들을 보라, 불편한 그대들이 방치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방치가 공공연하게 늘어가고 있다. 평택 사람들이 그렇고, 매향리 사람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이념에 내몰리는 모든 민중들이 그렇다. 계속 불편해 하기에는 우리의 피가 너무 빨갛고 너무 뜨겁다.

2006/09/21 03:06 2006/09/21 03:06
DrunkenSTAR 이 작성.

빈집이 아닙니다.

2006/09/13 18:10 / 생각

빈집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도 살고 있고
풀들도 살고 있고
벌레들도 살고 있답니다

평택 강제 철거 반대!

2006/09/13 18:10 2006/09/13 18:10
DrunkenSTAR 이 작성.

글쓰지마라...

2006/09/13 02:37 / 생활

글 쓰지마라.. 단한자라도...
몸 그 자체가 역사다.
역겹다.. 니들의 쓰레기가...

2006/09/13 02:37 2006/09/13 02:37
DrunkenSTAR 이 작성.

가관이다. 볼만하다는 이 드라마에 대해 한동안 분노와 어이없음 때문에 할말이 없어서 멍하니 궁리를 해보았다. 대단히 공포스러우면서 한편으로 다행이다라는 결론이다. 미국이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다른 나라의 입장과 생존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어느 행간에서도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 준데 있어서 분노와 다행이 교차한다. TV 드라마이기 때문이란 순진한 생각은 집어 치울 때가 됐다. 그동안 꺼리낌 없이 전세계의 상업 유통망을 통해 배포한 미국식 인도주의의 만세 삼창으로 이정도는 귀엽게 봐줄 만큼 만성이 되었을 법도 한데 도저히 분노와 어이없음이 삼켜지지가 않는다. 시나리오는 이렇다.

북한 영해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중인 핵잠수함이 침몰된다. 미국은 자국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과의 협상, 핫라인도 대화 채널도 없는 북한 UN 대사를 통한 북한과의 협상까지 이끌어 내며 핵전쟁 위협까지 치달은 사태를 수습하고 결국 미국 군인을 무사히 구해낸다. 미국인들이 볼때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가상성도 대견한데 저런 리더쉽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박수를 치겠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남의 영해에서 함부로 작전을 펼친 것은 미국이라는 자칭 세계 경찰국에서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공공연한 비밀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국에 준 협상 조건은 무엇인가? 알제리와 버마에 중국 무기를 팔 수 있도록 눈감아 주는 것 이다. 북한에 5억달러의 현금을 아무런 조건(인도주의 라며) 없이 주며 설득한 것은 차라리 애교다.

이러한 시나리오상의 설정은 그동안 사회주의 독재 군사 정권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빼앗긴 버마 민중의 돕기 위해 2003년 의회를 통과한 버마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법(Burmese Freedom and Democracy Act)을 위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버마 민중에게 보여준 그동안의 행동은 그야말로 액트에 불과한 것이란 주지의 사실을 완벽하게 주지시켜 준 시나리오다. 정치적으로는 닉슨이 발칸반도를 대상으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를 동남아시아인 전체 아니 아시아인 전체에게 제2의 독트린으로 천명한 것이나 다름 아니다. 즉, 그들 스스로 만든 법안 조차 어느 지도자의 리더쉽이라 불리는 오만과 독선에 무시되어도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점은 그들 스스로를 끔찍히 여기는 것도 무시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와 체결한 법적 제약 조건도 없는 어떤 조약 따위는 언제든지 걷어 찰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드라마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얘기는 한쪽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략 동해를 sea of japan 으로 부르는 재기 넘치는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북한의 군대가 비무장지대로 이동하고 미국 대통령은 미 태평양 사령부에 데프콘 3 상황을 발령한다. 사실 데프콘의 단계 이동은 어느 한정된 사령부에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미국 전체의 전쟁 방어의 준비 태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미국 영토와 미군 전체에 내리는 것이다. 즉 미국 대통령이 데프콘 3를 명한 것은 대략 남한의 한미연합사령부에 대한 것이다. 한미연합사령부는 데프콘 3 상황이 되면 모든 남한의 군대를 지휘 통제 할 수 있다. 즉 전시작전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 데프콘 3을 발령한 것과 같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가 원해 잠수함을 북한 영해로 보내지 않았어도 우리는 아주 쉽게도 전시작전태세가 된다는 말이다. 미국 대통령의 전화 한통화면 유가증권거래는 모두 중지되고 동네 마트며 수퍼는 약탈 된다. 국가 기능이 모두 마비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혼란에 대해서 미국 대통령은 어떠한 염려도 하지 않는다. 전쟁 상황이 되어 설령 북한이 남한을 선제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자국 잠수함의 100명의 승조원들은 구하고 본다는 섬뜩한 상황이다. 평양과 서울간 전쟁 피해자는 대략 3,300만명 중에 대충 잡으면 될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가정을 내 뱉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미방위조약이 전쟁 억지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매파들의 생각을 갈기 갈기 찢어 놓는다. 멀리 있는 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이러한 한계 상황을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맨몸으로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생존의 기회도 줄 생각이 없다. 물론 보수주의 매파들의 거지 근성처럼 기회를 구걸할 생각도 없지만, 그들이 벌인 일에 대해서 남한과는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는다. 직통 핫라인도 있고, 미국을 섬기지 못해 안달이 난 자들이 득실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저 통보만 있을 뿐이다. 오직, 중국 대사와 일본 수상과의 대화가 고작이다.

드라마이니까... 그렇다, 드라마다. 현실은 이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미방위조약이 마치 성경인양 믿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의 거짓된 프로파간다와 현 집권세력이 전시작전권을 이양 받는 어떤 조약이라도 체결한다면 다시 정권을 잡아 그것을 바치겠다는 사대 수구 야당의 허탈한 생각들이 헐리우드 판 미국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행인 것은 이러한 미국의 속내를 발가 벗고 드러낼 커맨더 인 치프의 11편이 다음주 KBS 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란 것이다. 이래도 미국을 믿을래? 라는 어느 스페셜보다 더 스페셜 하다. 미국 대통령의 어린 딸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 란 사뭇 걱정스러운 물음에 리더쉽 만세인 미국 대통령은 대답한다. "괜찮아 우리는 멀리 있으니까"
2006/09/11 03:10 2006/09/11 03:10
DrunkenSTAR 이 작성.

이중섭의 방

2006/09/08 04:31 / 관심
제주도 서귀포에는 이중섭 화가가 세들어 산 방이 있다. 마당 앞으로는 섶섬이 보인다. 섶섬은 천연기념물 18호다. 이중섭 작품의 위작 논란은 위력적이다. 이중섭 미술관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눈을 부비는 관람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나 또한 그따위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셋방을 나서자 마자 보이는 섶섬을 이중섭이 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름다운 풍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섶섬 넘어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일본쪽 방향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중섭이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을 그렸던 때는 그의 가족들이 일본 송환선을 타기 전이다. 그가 그린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에서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리움을 예견했을리는 없겠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편지를 읽으며 그 그림속에 그리움은 어렵지 않게 묻어 난다. 그의 방앞에 서 보았다. 섶섬이 보이고, 물론 지금은 각종 현대식 건물과 전기줄이 시야를 좁히지만, 그도 이 자리에서 저 섬을 보았겠지...

제주도에는 말만큼이나 소도 많다.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다. 방목하는 자유가 소도 말도 이쁘게 한다. 유목하는 사람들이 가장 태초의 웃음이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동물도 그렇다. 다만, 이중섭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들에게 당하고 친구들에게 모함 받은, 정에 굶고 사무침에 서러운 사연 많은 표정이다. 오늘날에도 그는 대접 받거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 한국 미술의 두 거장(이중섭과 박수근)이라며 호들갑스럽기만 하다. 전쟁 후, 그리고 오늘 미술을 대하는 패트런들의 관심은 여전히 호당 얼마로 측정 가능한 미술에 열중한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현대 한국미술의 역사적 획이었다면, 서양 미술의 폴 고갱과 반 고흐 만큼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다못해 대중 미술 서적에서 조차 이 두 예술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중문 단지에서 벗어나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셋방 앞에 서서 섶섬을 바라보길 권한다. 50년전 이중섭이 바라보던 그 시야로 말이다. 안타까운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2006/09/08 04:31 2006/09/08 04:31
DrunkenSTAR 이 작성.

계몽이 희망

2006/09/06 02:03 / 생각

계몽은 분절된 역사를 잇는 희망의 연속성이다. 역사의 연속성 안에 현재를 놓는다면 현재는 희망이 없다.

결국 짝퉁 개혁진보는 짝퉁임을 역사 곧곧에 아로 새겨 넣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김근태에 대한 역사적 희망은 공중 분해 되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기록조차 민망스럽다. 사학법 개정에 대한 빅딜에 처연하게도 민생을 들먹이는 작태에 대해서 이제서야 제 길을 찾은 것이라 위안을 삼을 민중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민생이 딜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야 하는 문제인식이 자칭 개혁진보들의 고상한 정치공학이었다는 점이 경악스럽다. 경제 지표만을 바라보고 있는 대통령의 좁은 시각에 있어서 민생은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인데다가 그것을 스스로 양극화라는 허울 좋은 정치 텍스트로 포장지를 만들어 판도라 상자를 쌓아 놓았으니 풀지도 못하고 반송도 못하는 정권이 되었다. 스스로 정통성을 개혁과 참여로 설정한 정권의 반동을 민생의 문제만으로 서사할 수도 없다. 그나마 개혁의 이름으로 사립학교법에 대한 논의가 자주성과 공공성에 담론하고 있었고 정권의 정통성이 그 담론 안에 담보되어 있다는 점은 개나 소나 아는 사실이다. 단, 그것을 주장했던 자칭 개혁진보 세력들의 짝퉁들만이 간과하는 주지의 현안은 그야말로 가치관이고 역사고 다 집어 치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실은 그 법의 실효를 통해 민중과 민중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4대 개혁법안은 개혁이란 이름의 상징일 뿐이다. 밥벌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숭고한 민중의 삶에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진상규명법 등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기득권으로 단기적인 민생의 처우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앞서 오늘날의 열매를 따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핍박과 억압의 굴레속에서 김을 매고 거름을 친 선배들을 가르치는 의미가 저 4대 개혁법안 아니었던가? 그것은 상징이었고 이 정권이 하지 않으면 않되는 역사가 아니었던가? 정치공학과 역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권 앞에서 학생의 정체성이나 노동자의 정체성 따위는 논할 가치가 없어진다.(이미 가치 없는 계급임을 강조하는 수많은 조치와 정책들이 난무하지 않던가?) 강대국 논리, 수구 논리, 글로벌리즘 같은 거대 논리 앞에서 굽실거리는 집권세력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 따위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놀랄만큼 그들은 무지하다. 이러한 무지는 작통권 환수 반대를 주장하는 720여인의 반공주의, 사대주의 지식인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들이 행위한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들이 지식인이란 타이틀로 모두가 같이 만든 역사를 배반하는 선언에는 오직 노무현에 대한 맹목적 반감만이 있을 뿐이다. 역시 정치공학을 최선의 립싱크로 이용하는 내용 없는 사유를 즐기는 자칭 지식인들, 짝퉁이다.

집권세력이 내놓은 수많은 정책들이 정작 민중을 외면하고, 그들이 외면하고픈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주장과 다름이 없는데다가 그 코드에 있어서 첫번째로 일맥상통하는 것을 업적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한 수구 지식인들의 작통권 환수 반대 선언은 그야말로 개콘이다. 이것을 침묵했던 지식인의 일갈이라는 조선일보 다운 언론관이 앞장서서 무가지 함으로서 반지성적인 행위가 지성의 행위로 둔갑하게 된다. 노무현 정권은 개혁진보세력도 정권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좌파신자유주의 정권 선언은 절망적이다. 동지도 아닌 적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급초대를 해놓고 물타기며 줄타기의 역사를 유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상징이거나 민생이거나 이성적인 의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지식인들 마저 앞장서서 역사를 해체하고 정치성의 장치에 그들의 기득권을 저당 잡히고 마치 적립식 펀드를 붇는 것처럼 지성과 이성의 운영을 대리시키고 있는 지경이니 불행이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 민주주의의 메카니즘이나 이성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희망은 계몽이다.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이념 앞에서 반공주의 수구보수주의의 메가폰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소수는 소수일 뿐이다. 따라서 변화와 변혁의 명제를 선의지로 추구하고자 할 경우 수(數)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을 필연적으로 요구 받게 된다. 대중의 집단이성이나 파쇼를 거부하는 비판의 기능을 거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소수가 수적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답을 얻어야 하는 부분도 역시 계몽이다. 계몽을 다른 이름의 폭력으로 끔찍해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대답은 역시 계몽 뿐이다. 알려야 하는 숫한 진실들과 파괴해야 하는 숫한 우상들이 존재하는 한 천천한 진보건 달리는 진보건 계몽의 대안 앞에 겸허해야 한다.

720여명의 반지성적 지식인들의 선언이 있던 날, 리영희 선생이 50년간의 지적활동을 마친다신다. 계몽이 희망인 시대에 막막한 선생의 말씀이 그대로 그쳐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일보에서 김대중 말단 기자를 계몽시키셨다면 지금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지도...

2006/09/06 02:03 2006/09/06 02:03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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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다 죽었다

2006/09/05 18:01 / 생활

이런 찬란한 하늘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미쳐 풀지 못한 수학문제를 남기고 여름이 갔다. 슬픈 소설을 읽고 있던 한 소녀는 이제 슬픔을 잊은 것일까? 한참을 울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잠을 잘 잤다. 책을 덮고 수학문제를 잊고 소녀를 잊고... 일이 많은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약속이 너무 많아 책을 덮고 지낸지 꽤 오래됐다. 그러다보니 생각할 시간이 줄고 고민거리가 없어 진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지식에 관한 호기심을 거두게 되면 자연히 이성을 잃고 감정을 쌓게 된다. 계절이 바꾸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스쳐가는 것에 극진한 사무침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잠을 잘 자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따위의 고민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잘 살아서가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오직 남과의 비교 우위로서 쓰임새의 척도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잘 살아야지, 치열하게 살아야지, 따위를 다짐하며 그렇게 살아 보이는 것이 고작 돈 잘 버는 방법이고 돈 잘 버는 방법을 아는 사람의 편에서 수다를 들어 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가을을 견디는 사람들의 주제가 온통 소비의 비교우위이다 보니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다, 제도의 피해자라는 지난한 담론에 빠지는 개인들의 주제는 알몸으로 역사관의 부재를 드러낸다. 역사의 일반화라든가, 역사의 교훈 같은 진부한 계몽은 제껴 두더라도 역사가 행하는 진보의 사명이 제도의 구조화가 아니라 개인의 사명으로 부터 진행되었다는 가치관 정도는 있어줘야 한다. 역시, 먹물들의 계몽적 사명인가?

계몽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진보주의자들의 누에는 한철 울고 마는 매미의 삶에서 벗어 나야 한다. 역사에게는 계몽이 희망이다. 역사가 배려하는 것은 심각한 사명이 아니라, 사명을 가진 자의 계몽에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계몽하겠는가? 는 고민은 진보주의자들의 스킬을 요구하게 되고 진보주의자들의 진보는 스킬의 업그레이드에 집착되어 있다. 더 편집적이어야 한다. 진보는 천천히 가다가 결정적 순간을 맞게 되고 그때 필요한 것이 스킬이다. 매미는 다 죽었는데 무슨 소린가 싶다. 글도 그치고 생각도 그치고... 다시 독서가 필요하거나, 끼니를 거르지 않거나... 취미와 숭고의 차이이다.

2006/09/05 18:01 2006/09/05 18:01
DrunkenSTAR 이 작성.

진보와 좌파

2006/09/01 02:38 / 생각
진보와 좌파는 무엇이 다를까? 이 둘을 같이 생각했었던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보는 역사의 인식속에, 좌파는 이념의 스팩트럼속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한정 지을수 있어야 한다.) 논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시류를 배제할 수는 없다. 시류에 편승이네라는 논점은 애초에 관점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시류에 대한 것이야 말로 시민과 민중의 이해도이기 때문이고 그 숫자에 대해서 겸허해야 될 태도가 존재한다. 본류에 대한 문제는 사실 먹물의 의무이다. 그만큼 본류를 시류속에 편승시켜야 하는 실천, 그에 반하여 시류를 본말전도식으로 포퓰리즘으로 즉각적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다만, 오늘날 현안적인 문제에서 매체의 발달에 더불어 여론의 호도적인 측면은 여전히 지식인들이 극히 지식인적인 행동에 가난하게 대처해서 생긴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진보적 지식인과 좌파적 지식인이 다른점을 담론하기도 전에, 자칭 진보정권이라는 집권세력의 분열적 좌파신자유주의의 노선에 있어서 정녕 진보와 좌파의 의식이 폄하되고 있는 심각한 현안에 대해서 침묵을 강요하는 기득권, 보수수구세력들의 민족주의적 반동에 대해서 우왕좌왕하는 진보와 좌파들의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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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1 02:38 2006/09/01 02:38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