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2006/08/29 00:44 / 사진

어느 고장에 닿았을 때, 그 고장은 아무것도 스스로 내비치지 않습니다. 그 고장이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얘기들을 흔하디 흔한 괭이밥을 통해서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올해만 벌써 두번째 방문인데도 제주도는 낯설은 빛과 바람과 구름만을 좌판에 펼쳐 놓습니다. 시간을 멈춘 노인이 순하디 순한 양치기 개와 나란히 앉아 빛과 바람의 틈에서 소주를 마십니다. 나는 늙어 가고 있습니다. 루게릭 병에 걸린 김영갑님이 1년전 세상을 떠나며 남긴 두모악 갤러리로 가는 외진 동네, 중산간에는 사납게 비가 옵니다. 늙고 시든 왼쪽손을 핑게 삼으려 해도 셔터는 경거망동하고 뷰파인더는 더 이상 간극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하게 찍으려 했던 자세가 화근이었나 봅니다. 외로움이 더는 깨닫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듯 모든 것이 불편해집니다. 들판에 서 봤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을까, 언제쯤 저 빛이 행복해지는 시간에 셔터를 누를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서 있어야 이곳에서 사연을 가진 모든 것들과 같은 존재로 바람을 맞으며 조잘거릴 수 있을까, 들판에 서 봅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그 풍경에 반해 그 너머에 항상 소홀했던 태도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흔하디 흔해 지난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섬으로의 착지가 내내 설레이기만 했었던 이방인의 호기심 그대로였습니다. 그저 조금 불편한 마음, 풀리지 않는 도시에서의 일과 이제는 차분한 어떤 추억들이 흐트러짐 없는 전진의 동력이었습니다. 경이로움 없는 삶과 도시의 오물이 감각을 막아 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덕스럽게 내리치던 비가 그치고 나의 삶도 언젠가 막아 서는 것도 없이 그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이름을 가져보지 못한 들판은 바람의 리듬에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언제가 그칠 것을 아는 듯, 들판은 그렇게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나의 걸음이 재법 묵직하게 다가 갔는데도 그 낯설은 개입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도시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 들판에서 삽시간에 변하는 빛처럼 그런 희망을 품어 봅니다. 다음에도 구름이 들판을 그늘에 묻어 버리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기를, 다음에도 처음 온 것처럼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랍니다.







2006/08/29 00:44 2006/08/29 00:44
DrunkenSTAR 이 작성.

참여연대의 고민

2006/08/25 03:38 / 생각

참여연대에서 강의를 한게 겨우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동시대를 살면서 언제나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그것이 무엇이냐는 개념적 논리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전형적 담론의 방식조차 수구적인 것으로 일단 미뤄두는 사람들이 사이버 꼬뮨을 건설하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멋진 생각을 해내버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두고두고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여름휴가마저 투자하고 싶게 만든다.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이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들이 내는 논평의 줄거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될 수 있는 한마디 슬로건일 수도 있다.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박원순 변호사께서 만드신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라는 멋진 말이 회원카드에서 10년동안 잠자고 있었던 케이스만으로도 그동안 참여연대로 대변되는 시민단체가 정작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시민들의 권익을 대변해왔고,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딘지 감시하고 대안을 찾아내며 세계를 바꿔왔는지 알리는 일에 소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중동과 같은 기득권을 가진 언론들을 통해 시민단체에 시민이 있는가? 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손쓸 수 있는 장치가 없어 멍하니 바라봐야만 하고 괜한 소주에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고작 대응이었다면 대응이었다. 굳이 대응이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왜 알리지 못했을까? 라는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였으며 그리하여 오늘 모임의 담론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한 전략의 방식이 아닌 방법에 대한 방식은 다시금 생각해볼 꺼리다.

국내 최대의 시민단체라는 곳이 고작 만명의 회원이라는 입 벌어지는 사실은 고사하고 만명의 개별적인 회원의, 개별적인 꿈을 평등한 공간에서 내보일 수 있게 하고 공평하게 사유할 수 있는 경험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크다 못해 거대한 문제다. 여기서의 해결 방식은 일반기업들의 일반적인 홍보 방식에서 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기존 매체를 이용하고 매스적으로 퍼트리는 방식은 담론도 함께 꾸는 꿈도 아니다. 주입이 아닌 담론이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과 더 다양한 세계와 생각들을 공유하게 하는 공간, 즉 경험의 공간을 통해 알림과 전달을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늘 나의 주장이다. 계급적으로 응당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 진보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시대는 지났다.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게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 즉 담론의 형성 방식에서 오늘날 가장 저렴하고 파괴적인 방식은 역시 온라인이다.

진중권씨가 논객으로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온라인의 저급한 파괴성과 집단 권력의 저열함 때문이었겠으나, 아직도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해야 하고 현장을 지켜야 하는 신념어린 활동가들에게 온라인은 하나의 희망일 수 있다. 더 이상 모르는 사람들로 부터 자신들의 활동이 폄하되는 일이 없고, 솔직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사회악의 존재인양 취급되는 모양을 더 이상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막사이사이상 정도 수상한 박원순 변호사님이나 진중권씨 정도면 모를까, 알려야 하는 문제는 너무도 시급한 사안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알려야 된다는 관념에 지나치게 편집될 필요는 없다. 주체는 있되, 주도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주도하려고 하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안그래도 조금씩 전진하기 조차 힘겨운 마당에 담론까지 주도하려면 매분초가 극기가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도 아니다. 소통의 공간이 구체성을 띄어야 했던 과거의 소통은 피아를 확인하는 것조차 많은 시간과 이동이 필요했다. 온라인에서 진보는 널려 있다. 그들 스스로 서로 알게 하면 된다. 거기에서 참여연대의 주도는 마쳐야 한다. 어차피 서로를 확인한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이고 그들이 함께 꾸는 꿈은 참여연대가 고민한 세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06/08/25 03:38 2006/08/25 03:38
DrunkenSTAR 이 작성.

천하장사 마돈나

2006/08/23 18:22 / 관심

우리에게 장사에 대한 기억은 유서가 깊다. 첫걸음에서 필수적으로 실패의 과정을 경험하는 엎어짐으로 부터 단지 좀 덜 아파서 울지 않은 아이에게 부쳐지는 장사 타이틀,  장사해서 최대?의 개그맨이 된 강호동과 장사하다가 역시 최대의 파이터가 된 최홍만까지, 그리고 오물조물 천하장사 쏘세지.
하지만, 지금까지 장사들이 보여준 장사아치의 정신에서 멀찌감치 달아난, 정말 기대 최고조인 장사가 온다. 천하장사 마돈나. 이 시대에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2006/08/23 18:22 2006/08/23 18:22
DrunkenSTAR 이 작성.

기만의 연속

2006/08/17 03:17 / 생각

한때 노현정 아나운서를 모델 캐스팅하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해두었던 전화번호를 지웠다. 게으름으로 갈음하여도 여태 가지고 있었던 것 자체가 노총각의 가난한 로망 쯤으로 덮어 버릴 수 없는 것이 술에 취하면 가끔 택시 뒷좌석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동료들에게 '노현정한테 전화 함 해볼래' 했던 자랑 짓거리가 객기 이상의 무지였음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결혼발표를 하고 나서 된장녀까지 논란된 사건을 지켜보다가 다음날 아침 뉴스에 나온 노현정 아나운서를 보고나서야 아침뉴스도 진행했었구나 알게 되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어느 뉴스 기사처럼 거대 기업에게 노현정 아나운서를 이렇게 우연히 아침뉴스에서 보는 가난한 로망마저 빼앗긴 것 같다는 쓸쓸한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너무 물끄러미 본 탓일까? 사실, 노현정 아나운서가 결혼한다는 일반적인 사생활에 어떤 정치성이란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된장녀 사건까지 싸잡아서 모든 마초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어느날 덜컥 재벌가에 시집을 가고 브라운관에서도 떠난다니 KBS 의 발바른 후속 조치 만큼이나 포탈들의 자동 검색어 삭제, 댓글 삭제 등의 거부감 넘치는 조치에 근성 넘치는 그들이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충 요약해보면, 거대자본의 횡포란다. 그렇다, 거대자본이 할 짓이 없어서 개인 사생활에 정치성을 부여하고 자본을 투입하여 성스러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거대자본이 훼손하는 경우에 대해서 대중들의 성찰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우르르 몰리는 것에 훼방을 놓느냐, 방임하는가에 기준을 둔다.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한 폭주족의 대행사를 민주주의의 한 발현으로 방임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인터넷의 대중들은 꼭 빼닮았다.

현대의 정보는 그것이 혹여 뉴스기사라고 해도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원소스에 대해서 조차 비평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금물이 될 정도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넘쳐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모방과 모방의 모방이 이루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방의 원소스를 찾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행위하였는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초고속이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고작해야 여러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대게의 대중들이 대중을 쫒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판단하는 안락한 방식이다. 포퓰리즘? 이제는 대중 파쇼의 시대다. 넘치는 정보의 파편들을 민주주의의 형식안에 밀어 넣고 안락한 방식으로 랭크를 매기는 속성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 여기에 약간의 비장미, 마초 남성들의 노현정 바라보기 같은 것, 를 가미하면 마치 무슬림의 순교자가 된 양 거대자본에 맞서는 투사가 된다.

현대 사회를 상업주의의 화신으로서 거대자본이 구조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마치 합리적인 계약 방식으로 공동체를 엮어 놓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등가의 원칙이 전제가 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이익집단적 게젤사프트 사회에서 게마인샤프트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비장미 넘치는 사명감으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정작 거대자본에 대한 투사 노릇이다. 포탈의 행위에 대해서는 적잖은 거부감과 그들의 못되먹은 행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노현정의 결혼은 노현정의 결혼일 뿐이다. 거기에 거대자본의 횡포라는 전개는 어떻게 보더라도 그 전사들의 과잉이다.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대중들이 상업주의나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렇다할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엉뚱한 투쟁이 성행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대중이라는 막강 파워를 등에 업었다고 생각하는 소외에 대한 위로의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자신들이 엮여 있는 사회가 이익만을 위해 언제든지 묶였다가 수틀리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게젤샤프트적이라는 점을 기만하고 연속하면서 성찰의 기회는 사라진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게마인샤프트로 돌아선다. 그것을 인정 못하게 하는 것들은 많다, 이를테면 가부장적 전통, 수구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등등... 한동안 기만의 연속은 진행될 듯 싶다. 노현정 아나운서가 결혼한다는데 축하는 못해주고 너무 정치적이었나 싶고...

2006/08/17 03:17 2006/08/17 03:17
DrunkenSTAR 이 작성.

원로들..

2006/08/15 04:28 / 생각
오늘날 전쟁을 겪었다는 노인네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을 섬겨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꺼이 미국을 섬기겠다. 현재 지구상에 진행 되고 있다고 판단 되는 전쟁이 8개라고 한다. 그중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지 않은 전쟁은 하나도 없다. 가끔, 정신없는 노인네들이 원로랍시고 나와서 말씀을 하실때면, 차라리 민족을 위해 일찍이 돌아 가셨더라면... 좋았을 걸, 생각할 때가 있다.
2006/08/15 04:28 2006/08/15 04:28
DrunkenSTAR 이 작성.

강의를 제의 받고..

2006/08/13 03:32 / 생활

사실, 한 시민단체의 간사들과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기쁜 일이다. 물론 사회과학이나 현안 문제에 대한 강의일리는 없고 다만 스스로야 자부심을 가질지 모를 나의 이력이나 경력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없는 단체에서 흔히들 떠도는 평판이나 소문만으로 강의를 제의 했다는 생각을 했을 때, 오래간만에 강의 나들이를 하는 긴장감 보다는 부담이 한층 더 했다. 이를테면, 나와 같은 무명의 현장 기술자들(Field Players)은 현장에서 일하고 배우고 써먹는 과정에만 종사해도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을 경우가 많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도 아니고 자자한 명성 따위를 구사할 저서는 꿈에라도 악몽이 될 지경이니 말이다. 따라서 나를 통해 알겠다는 인터넷 트랜드와 발전방향이나 인터넷과 시민사회활동에 대해서 2시간 30분의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그들의 의도가 무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나에게도 결코 무모한 결론이 아니다. 그래도 어느 대학에서의 특강이나 컴덱스 코리아 따위에서 컨퍼런스 스피킹을 한 이력을 설명했던 것은 간만의 강의 제의도 제의지만, 단 위에서 잔득 긴장하게 될 온갖 세포들의 측은한 바램들이 한창 일을 끝내고 지쳐 있는 최근 나의 여러 상태들에 자발적인 의욕 같은 것을 주입할 수 있는 계기라고 말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2시간 30분이란 시간은 적잖은 체력과 성대의 울림을 요구하겠지만, 문제는 자료이다. 게다가 인터넷 트랜드라는 주제는 몸으로는 알아도 머리로는 알 수 없는 막연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일전에 개발 방법론이나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인 강의에서는 전문적인 현장이나 이론적이며 지적인 얘기들을 가감 없이 쏟아 내어도 되었지만 트랜드는 시계열에 관련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과거를 제거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사례와 미래의 근거를 짚어 나갈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알려진 현재의 객관적 현상들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견해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객관적 현상을 충실히 조합하기 보다는 파편적인 현상들을 조합하다가 주관적인 견해를 그 깨진 조각에 끼우려는 습관적인 나의 지적 생산 활동 때문이다.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한 지적 호기심 보다, 관찰과 통찰에 의한 유레카를 선호하는 경향이 이번에도 어김 없이 양적 자료를 생산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물론 양적일 필요가 있겠는가마는, 2시간 30분 동안 열강이라 불리우는 강의 활동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간의 짧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버티게 해주는 것이 자료가 된다. 일단 자료에 몰입한 수강자들의 또렷한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끔은 나의 견해가 두려울 때가 있다. 나의 견해에 대해서 내가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분석적인 자료를 통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찰에 있었을 경우이다. 게다가 이러한 견해를 관철 시키기 위한 일련의 활동들을 포함하여 나의 견해에 몇몇 사람들이 변화를 생각하고 변화를 실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에서 행여 민감한 정책 설정에 나의 견해가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강의 마지막에 트랜드가 이러하니 우리가 인터넷에서 시민사회활동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토론을 해야 하는 과제까지 있으니 압박감이 이내 후회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도리어 반동하는 무모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나의 견해에 주저함이 있다면 그동안 나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지지 않는가. 게다가 견해가 없는 오늘과 이 땅에서는 더더욱 어떤 견해에 작은 용기 정도는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견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견해를 창조하는 것이냐 아니면 발견하는 것이냐는 해묵은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아직은 견해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견해가 진리일 수도 없지만, 저기 어딘가에 알고자 하는 답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6/08/13 03:32 2006/08/13 03:32
DrunkenSTAR 이 작성.

스타벅스는 2004년도 연간 721억원 매출 규모에서 2005년 연간 912억원으로 성장했다. 강남 테헤란로에만 17개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고 하니 특정 지역을 덮어 버리듯 점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그 문화에 취한 우리나라 일부 여성들에 대해 된장녀라는 허영에 싸인 부정적 이미지가 인터넷에 화재다. 역시, 매체가 의도하고 있는 스토리에 대한 모호한 본질이 마치 짜임새 있는 주장인양 전파되고 있다. 스타벅스를 매출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다국적 기업 중 하나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념과 문화가 접목된 브랜드라는 인식을 통해서 된장녀 스토리가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왜 된장남도 아니고 된장녀이며 왜 스타벅스 커피가 단지 고가이기 때문에 사회 계급의 어떤 대상을 상징하는 코드가 된 것일까? 언제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계급성에 대한 인식에 이토록 절박해졌을까?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스타벅스 커피가 고가가 된 이유는 마시는 것은 마시는 것이고 맛있는 것은 맛있는 것이니 내 돈의 쓰임새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개인주의가 마치 고결한 것인양 생각해온 우리사회의 된장녀, 된장남들에게 있다. 어떤 현안에서나 그래왔듯 그들은 자기 주위의 인식에서 조금도 벗어날 줄 모른다. 스타벅스 커피의 가격체계가 워싱턴 DC 14번가에서 판매되는 2달러 75센트 보다 테헤란로가 더 비싼 이유라든지, 미국에서 조차 지역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불균형을 이루는 차이를 가격에 반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스타벅스 매장이나 같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삶이 복잡하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단절해도 되는 것인지, 된장녀 된장남들은 자신의 소비 능력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부터 나온 것이라는 극히 반공동체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이 교육을 통해 숙달된 산수나 국어가 여전히 논리나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된장녀에 대한 사건이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이유가 실은 스타벅스가 사회에 펼치고 있는 본질적인 부조리가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사심 없이 즐겼던 커피 애호가들이라는 점은 어떤 문제를 색출하는데 있어서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촛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인식과 제기는 기본적인 지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라는 기초적인 의심과 관심에서 비롯되는데 현상만으로 과대 포장하는 일부 선정적인 언론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해온 결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 든가, 20 대 80 법칙이라든가 경제적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와 이에 주저 없이 매몰되어 온 된장녀, 된장남들이 스타벅스 같은 거대 경제 권력이 펼쳐 놓은 호사스러운 선택의 여건에 아무런 지성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 다는 점은 조금은 추상적일 수 있지만 커피의 성분을 통해 다분히 부르조아적이거나 서구 사회의 궁극적 경제이념을 섭취함으로서 계급적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복잡한 계산도 가능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는 고등교육자들, 이들이 곧 된장녀, 된장남일 것이다.

2006/08/10 23:05 2006/08/10 23:05
DrunkenSTAR 이 작성.

졸음이 쏟아지는 강북 강변에서 어느 조상님이신지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런 식은 아니지만 제사 내내 조잘거리는 조카들에게 절하는 법을 가르치다가 덩달아 기계적으로 절만 드리다가 온 꼴이다. 조상을 모시는 행사로서의 제사가 꼭 유교의 종교적 의식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우상으로서 받드는 의식에 있어서 다른 종교가 전제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가치가 유교의 제사에서 다른 종교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우상이 한때 같은 시공간속에 있었던 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거나 오늘날의 종교적 믿음이 어느 정도 강요되고 있는 현실의 무감각 때문일 수도 있다.

가족이라는 사회적 공동체가 피의 대물림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감만으로 비롯된 당위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치관 자체가 실은 유교적인 전통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닮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작은 단위의 사회는 반드시 그 피의 존재감으로 부터 시작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족의 가치를 이룬다는 생각은 마치 보편적인 사상처럼 보인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장 거창하게 착각하는 언어가 휴머니즘이나 인도주의 같은 것이다. 이러한 착각된 언어에 쌓여 있을 수록 가족이라는 집합을 대할 때 '가족이니까' 라는 말로 그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설명된 것처럼 뭉둥그리는 가장 나쁜 태도를 보이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인간의 종족 번식의 시작이 아니라는 점, 적어도 법률적으로나 사회의 불평등한 시각이 존재하는 한 가족은 본능적 출발점도 아니라는 인식은 피의 계통을 따지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절대 인식되어 질 수 없다. 가족이니까 라는 태도는 제도가 규정한, 또는 그렇다고 믿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그렇지 못한 가족의 구성원에게 강요하는 지배적 관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상처일 수 있고, 악의 온상일 수도 있고, 희망을 가로 막는 벽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에서 가족 문제 전문가라는 자들이 가족에게 상처 받은 자들을 다시 가족속으로 밀어 넣는 감동어린 장면은 가족 휴머니즘의 오락일 뿐 실제로 그 상처를 치유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장면은 다시 '가족이니까' 로 대변된 피의 존재감으로 부터 시작된 가족을 대하는 가장 나쁜 태도인 전통적 당위로 가족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족은 사회 공동체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가족안에서 생동하는 사랑이나, 인간적 정리를 가족의 테두리만으로 한정하는 둘러싸기의 전통에서 벗어 나야 한다. 사회 공동체적 가족은 공동의 선의 실천에서 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가족이라는 구조가 모두 행복하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치관은 그 구조가 가부장적 구조로 확립되었을 때만 성립한다. 가족의 구조는 생산적인 아버지와 내조적인 어머니의 단란하기 그지 없는 구성만이 존재할 뿐 그에 대비한 결손에 대해서는 가족이 지녔던 사랑과 인간적 정리를 과감히 거두어 버린다. 가족도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있는 사회제도 속에서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정이 가족을 사회 공동체로 인식하게 되는 출발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겠지만, 가족이 언제나 개인에게 궁극적인 안식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개인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는 가족에 대한 우리의 공동체적 시선이 앞서 말한 그래도 가족이니까 란 당위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존재할 때 다른 가족의 안전이 안중에 있을리 없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쟁이나 이 세상의 어떤 전쟁 또한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파괴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관계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남의 가족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전쟁에 대한 참혹함에 대해 대체로 염려하면서도 이를 비롯되게 한 이스라엘이나 미국에 대한 협오감은 삼가한다. 왜냐하면 제사로 이어져온 전통적 가치관이 공동체로 승화되지 못하고 오래동안 탈무드와 헐리우드식 휴머니즘에 노출되어 은연중에 슬기로운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으로 갈라져 있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문제 인식의 낙후가 그렇게 다시 이루어질 가족에서 시작하여 다시 가족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생각하면 가족이 사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여전히 공허할 뿐이다.

2006/08/07 02:33 2006/08/07 02:33
DrunkenSTAR 이 작성.

제주도, 반성

2006/08/01 20:52 / 생각

제주도에 다녀오면 한껏 고양된 낭만적인 감수성에 기대길 일쑤이긴 하다. 이국적이고 한가로운 풍경에 다른 감수성은 철저히 배제되기 마련이다. 3번째 방문이었던 제주도 길 중에 풍광이라면 516 도로를 빼놓을 수 없다. 방문자들이 무심코 516도로, 오일육도로라고 부르는 길은 한때 제1 횡단도로 였다. 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이 만들고 붙인 역겨운 이름의 길에 그 풍광이란... 아이러니이다. 북인이라 불리는 육지사람들의 여행 인상기에 꼭 등장하는 516 도로의 아름다운 풍경은 대체로 낭만적인 감수성만으로 제주도를 빗대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방 전후사를 통해 제주도의 지형적 위치 뿐만 아니라 문화와 역사가 폐쇄적으로 육지와 결절되어 있는 부분은 4.3 민중항쟁을 통해 잘 들어난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약 7년 7개월 동안 남한만의 독립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위를 유혈 진압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미군정과 우익단체들의 탄압과 테러를 통해 3만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러한 지적 호기심은 제주도의 이국적인 낭만에 번번이 거세되곤 했다. 이번 방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은 여전히 짧은 생각과 여행에 대한 흥분만을 고양할 뿐 진지한 태도로 그 고장을 둘러볼 겸허한 자세를 가지지 못한 나의 가벼움 때문이다. 민중의 피와 소리가 묻힌 땅을 밟으며 고양된 말초 신경만으로 자본주의의 향락이 덮힌 항구를 히히덕 거리며 들락 거린 철없음에 고개가 무거워진다.
몸조차 이미 역사라고 푸코가 말했다, 하지만 앎과 호기심이 짧다고 하여 그곳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진실에서 소외 되는 여행을 거듭 되풀이 하는데 감수성을 쏟아내지나 않을지 염려스럽다. 그래서 지금 이 반성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6/08/01 20:52 2006/08/01 20:52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