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착륙

2006/07/31 19:25 / 사진

일행과 떨어져 나왔는데 핸드폰이 바다 바람에 삭아 작동을 멈췄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서둘러 연락을 취해야 했지만, 나는 늘 그랬던 배짱이처럼 굴었다. 어슬렁 어슬렁 동네 사내도 나처럼 다니질 않는데, 일행과 연락할 마땅한 방법도 없으면서 맥주 한캔 사서 길바닥에 주저 앉아 버린다. 나에게 제주도는 늘 행복한 착륙이다.

바다 거북과 조오련을 시합 시킬 수 있는 시절의 친구들을 보았다.

사진열기..

2006/07/31 19:25 2006/07/31 19:25
DrunkenSTAR 이 작성.

추기경

2006/07/28 01:59 / 생각

교회의 역사가 믿음과는 관계 없이 저지른 악행을 한번이라도 종교적으로 반성했다면, 아주 오래전 추기경들의 동화 같은 헛소리를 오늘날 김수환으로 부터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

2006/07/28 01:59 2006/07/28 01:59
DrunkenSTAR 이 작성.

자본주의의 해로움

2006/07/26 15:38 /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하는 주체는 소비의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이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같을 때 얘기다. 어제 한겨례의 박노자 칼럼에서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TV 매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이건 논란거리도 아니다. 박노자씨가 약간은 이상적인 제시를 한 부분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 낸 고도의 언론 플레이와 상업 광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노자씨가 지적했듯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매몰 상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기능적이었던 불편한 것들이 심리적인 불안한 상태로 전이된 것을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군중속의 고독이라 본다면 이러한 류의 고독에서 예외적인 인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태를 겪고 있으면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 자체가 고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은 대게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현 체제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즉, 당신이 있는 그곳도 자본주의 체제와 제도가 움직이고 작동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곤 한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해로움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몇몇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완전 거부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와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제공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는 상태 즉, 적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의 인식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무경쟁의 상태라든지, 완전 분배의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과 불균형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리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원하고 보편 타당한 분배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을 경우에는 국지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해방의식이다.

형평성을 이룬다는 측면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해온 성장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마땅히 실패했다는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상태는, 자본이 원하는 체제유지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도시근로자들과 체제유지와 반공주의에 종속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 GDP 와 무역수지만이 유일한 성장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든 보수언론들의 책임은 이미 논할 가치조차 없어졌다. GDP 와 무역수지가 떨어지면 구성원들에게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대며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 조차 모르는 도시 근로자들의 의식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언제든지 자본의 구조속에서 중산증이라 생각한 알량한 지위가 빼앗길 수 있는 일련의 사례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하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를 견제하는 보수의 입장은 대체로 현체제의 붕괴를 염려하고 그러므로 발생하는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통해 공산주의화 되는 일련의 과정을 프로파간다 한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그들이 경계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일어 날지도 모를 공산주의화가 자생적 이념이 아닌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 생기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없어 졌을 경우, 붕괴 되었을 경우, 또는 통일이 되었을 경우, 그들의 주된 주장을 근거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한다.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민족적 소원의 붕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통일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섣불리 반대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고, 정작 통일의 방식이 민족자결에 의해 진행되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하는 북한의 존재와 미국에 대한 의존은 통일의 방식에서 조차 미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체제속으로 급속히 변질된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밀스럽게도 북한의 붕괴와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언한다고 했을 때 남한의 보수가 이를 반대할만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괴리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해소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여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통일을 논해야 하고 혁명을 진지하게 담론해야 하는 상황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작금의 문제를 좌와 우의 날개짓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세는 결국 사회대변혁을 요구 받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일어날만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자본주의가 더 그 해로움을 전파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판을 바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한시대를 풍미하며 살고자 희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마땅한 인간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6/07/26 15:38 2006/07/26 15:38
DrunkenSTAR 이 작성.

Stop! the Israel

2006/07/25 09:46 / 생각

2006/07/25 09:46 2006/07/25 09:46
DrunkenSTAR 이 작성.

원상태로 복구

2006/07/19 17:19 /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슈퍼맨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영웅인양 나서서 남의 허물까지 책임져야 할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원복(원상태로 복구, Roll Back)의 의미는 경험상 복잡한 이해관계를 양산하게 된다. 지루하고도 치졸한 책임공방을 치루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의 정밀한 야비함마저 요구하기 때문에 이전에 쌓아 놓았다고 생각한 인간관계조차도 일시에 허물어 진다. 그것이 시스템에서의 원복이 가지는 정치성이다.
시스템을 구현하고 런칭을 시키는 유종의 미의 순간에 원복의 가능성은 예상 스케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동안 종사하였던 10개의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그랬다. 어느 클라이언트가 우리가 남들과 다른 조직적 차별성은 무엇인가? 크리에이티브인가? 마케팅인가? 라고 물으면 '문제 해결 능력' 이다, 라고 답하던 자신감이 무색할 정도로 처음 당해보는 원복의 순간이 촉각으로 다가오자 분위기는 살벌해지기 시작한다.
여러 부분을 맡고 있는 책임자들은 문제 해결의 능력을 보이기 보다는 일단 침묵한다. 침묵은 조직 처세 중에서 면피의 기초 작업이다. 말을 아낀다는 것은 언변의 실수도 있겠지만, 일단 은폐하고 조용히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럴 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때로 독립군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최선을 다해 문제해결을 한다는 것은 동업자였다는 일말의 인간적 유대마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보이기는 싫다.
아직 원복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하는 팀원들에게는 원복되면 두달동안 집에 못갈줄 알라며 엄포를 놓는 긴장감 서린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스케쥴에만 있었던 가능성을 존재치않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어떤 작고 하찮은 단서든 찾아 낼 것을 종용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문제를 파악하고 종용하거나 모티브를 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 실행하여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결국 72시간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원복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현재 원만한 운영 중이다. 8개월, 객지생활, 2주간 런칭 준비, 마지막 72시간의 힘겨운 철야... 오늘은 삼겹살과 소주가 제격이다. 이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속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있다. 비가 내려 살벌하게 바뀐 환경도 원상태로 복구 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2006/07/19 17:19 2006/07/19 17:19
DrunkenSTAR 이 작성.

절대 위기

2006/07/17 05:08 / 생각

북한은 미사일 발사로 촉발된 유엔 결의안의 압박으로 남한은 한미 FTA 반대 세력과 추진 세력의 첨예한 갈등으로 양측 모두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다. 한민족, 두나라, 두체제의 3중 갈등층을 형성한지 50여년... 폭우는 북과 남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넘치게 했다.
미국의 패권적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안보와 경제의 두 축의 대척점에 남과 북이 위태하게 시소를 타고 있는 이러한 형국을 해소할 만한 재료는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핵우산에 의지하고 한미 동맹의 허상에 함몰된 남한의 우익과 보수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는 여전히 그 교조적인 신화가 부족하여 북한에 당하고 있다고 설파 하고 있다. 50여년 동안 변하지 않는 우익들의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북이 하면 뭐든지 잘못된 것이고 미국이 하면 정의라는 간편한 논리를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이 유엔의 결의안으로 이어지면서 강제성은 없지만 얼마든지 무력적인 장치의 가동이 가능한 유권해석을 서슴치 않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같은 시기 인도가 발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 이스라엘의 핵무장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침묵 조차 유도한다. 미국의 패권주의 앞에 국제사회의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홍의 문제가 된 한미 FTA 도 마찬가지이다. 경제 패권주의를 통해 안보까지 엮는 미국의 전략을 관철하는 국가 대 국가 협상 테이블에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중요한 히든카드 네장(스크린쿼터, 쇠고기, 자동차, 의약품)을 자발적으로 펼쳐 놓고 시작하는 개혁우파와 극우파의 화합에 비로서 민중들이 그들의 생활에 미칠 악영향을 알아챈 격이다. 이를 추진하는 우파 세력에게 민중에 대한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주한미군에 배치되어 있던 전략핵이 해체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방위 공동체 안에 아직은 남한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일본에게 동북아를 비롯한 남한의 방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일부 이전하는 단계 속에서 만이 남한의 비핵화가 가능할 뿐이다.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 북한의 경우, 1991년 쏘련이 남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기를 희망하며 북한에 드리워웠던 핵우산을 스스로 거두워 가면서 북한은 자구책인 핵개발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중국과 남한이 대표부까지 세우면서 북한이 느낄 위기감은, 1970년 닉슨 독트린과 함께 1972년 주한미군 1개사단 철수로 이어지는 정세에 남한이 느꼈던 위기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남한의 정권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보다 먼저 핵개발을 추진했던 전력이 있다. 이러한 역사를 보았을 때, 현재 북한이 주권적 국가로써 자국과 자국의 민중을 보호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소외의 타계책으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비추는데 있어서, 우파 세력들이 요구하는 이른바 북한에게 보여주어야 할 더욱 강력한 조치라든가, 북한 스스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위협하는 국제사회의 위기 상황에 내몰린 쪽이 우파의 패러다임 안에서 북한으로 보이기만 할 뿐, 실제로 절대 불리한 상황에 몰린 것은 남한이다.

한미 FTA 의 가장 않좋은 시나리오는 현정부가 협상을 조인하지 못하고 다음 정부, 예를 들어 사표심리로 던진 무지한 민중들의 표로 집권한 한나라당이 협상을 포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물론 민중의 반대를 불사하는 쪽은 언제나 권력이었고 남한은 한번도 민중을 이해하는 권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 이러한 불행은 민중의 삶을 경쟁과 낙오로 이분법 하도록 만들었다. 공동체와 공동재에 대한 인식을 자유주의적 우파 노선에 비추어 보는 법만을 가르친 이제, 드디어 한미 FTA 가 민중 스스로 민중의 삶에 미칠 영향을 비로서 깨달아 가는 근소한 차이를 본다. 하지만 이건 아직 희망이 아니다. 이런 근소한 차이는 아직 수적 열세다. 정부의 프로파간다와 우파의 프로파간다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는 많은 거대 담론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눈치를 보는 통에 전통 기득권 세력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논리는 사뭇 진지하다. 하지만 민중은 움직이고 있다. 스스로 의식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무능이 도리어 민중을 깨우치게 하는 패러독스를 일으키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또한 북한이 스스로 깨우친 주체가 아니라 미국의 패권주의가 깨우치게 한 패러독스 이다.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에 순종적일 수 밖에 없다는 심드렁한 힘의 논리는 경쟁의식을 모티베이션하지 않고 패배의식을 키운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미국이라는 악덕한 나라까지 끼워 넣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파의 패러다임 안에서 깨우치기를 반복했던 무리들은 북한을 보호하고 있는 최소한의 나라로 구쏘련(러시아)과 중국을 든다. 북한이 감히 러시아와 중국의 말을 듣지 않고 미사일을 쏘고 어떠한 설득도 되지 않는다는 중국 정부의 말을 통해 우파 정론지들은 이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고, 곧 절대 불리한 상황을 맞아 내부 붕괴되거나 미국이 자랑하는 CNN 카메라가 달린 미사일에 선제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떠든다. 앞서 말했듯 국가주의를 냉소한 고르바초프를 통해 구쏘련에 자본주의 시장제도가 도입되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등소평의 등장과 자본주의 개혁의지가 진행되면서 부터 북한은 쏘련과 중국이 영원히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란 냉정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북한이 우파들의 무대인 국제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벌인 그간의 노력과 첨예한 외교 전략은 미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는 남한의 우익 인텔리겐차들에게는 악의 축일지 모르지만, 얼마나 눈물 겨운 민족주의였으며, 외교 안보적 성공이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해 남한의 주권적 결정은 그렇게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했으면서도 그 힘의 논리에서 꾸준히 배제되고 있는데다가, 그 생존의 판단 또한 미국의 주판알에 내맡겨지고 있다. 남한의 절대 위기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한미 FTA 자체에 있는 것보다 우리 스스로 챙기지 않은 주체 판단에 있다. 고매한 기득권 의식과 관료주의는 민중을 이해하는 어떠한 성장도 없는 경제 통합 협정을 추진하려고 하고, 냉전논리와 반공주의에 교조적인 무리들은 미사일을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미국의 패권적 야망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으로 규정해 마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생존의 문제라도 주체적 판단 같은 것은 워싱턴에 맡겨 놓은지 오래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남한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1994년 6월15일을 전쟁 개시일로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듯 우리의 목숨은 우리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정부가 미국의 치맛바람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남한에 대한 위기는 북한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부터 올 것이며 우리는 어떤 판단에도 철저히 배제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경제, 안보적 위기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쪽은 남북한의 민중이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온 우파세력이나 미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2006/07/17 05:08 2006/07/17 05:08
DrunkenSTAR 이 작성.

WTO 나 FTA 처럼 미국이 꾸며가고 있는 체제가 그들이 행한 온갖 악행에 비해 중장기적이란 의미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인 자기 분열의 이론들이 유기적 합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일단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게 되면 책임 소재상 하이라키 구조의 상층부는 넓은 하단의 유기적 조합 때문에 소재를 규명할 수 없게 되고 좋던 나쁘던 그 영향은 구조의 하층부에 가장 포괄적인 영향이 미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점은 좋던 나쁘던 하층부에도 미쳐야 할 영향을 때어 내어 나쁜점 80%를 하층부에 지속시킨다는 점이고 좋은 영향을 취해가는 먹이사슬의 상층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구조체를 WTO 나 FTA 가 실행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 를 반대하는 세력은 이 협정의 전반적인 의제에서 볼 수 있듯, 거의 모든 경제구성체에 대한 포괄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계급의 입장에서 서로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반대 담론을 내고 있기 때문에 짐짓 범국민적인 여론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논리는 미시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미 FTA 를 반대하고 협상 중단를 요구하는 반대는, 공화적 공동체와 소수자 입장에서의 반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FTA 의 반대는 반미의 입장이 명확하게 들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구적 반공주의자들에게 친북세력이라는 색깔론을 듣기 마련이다. 소수자의 입장은 계급성과 관련이 없다 할 수 없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선험적 계급성으로서의 노동자와 농민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유령처럼 떠 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규정하던 소수자의 정의는 시민적 권리와 인권으로 이양되었고 그로 인해 투쟁의 주체는 광범위하게 억압 받고 있는 모든 개인으로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 - 여기에도 억압 받고 있고, 억압 받을 수 있는 시제의 규정이 있어야 겠지만 언어 도단을 피하고자 넘어가자 - 이러한 반대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적 체제에 생리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소수자를 절멸시킨다는 선견적 태도에서 나온 의지로 볼 수 있다. 한미 FTA 를 통해 소수의 지배 계급들이 누릴 이익과 권리를 다수의 권리 소수자와 공동체를 위해 분배되어야 하다는 점은 응당 한미 FTA 의 반대와 중지 요구자들의 이념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반대는 한미 FTA 가 액면적인 경제 협정이 아니라 평화정착을 저해하는 각종 안보적 요소들까지 함유하고 있다는 범위까지 통찰하게 됨으로써 FTA 찬성론자들인 신자유주의자들과 매파들에 의해 불순 분자로 매도 되는데, 이 지점이 세계를 혜안하는 안목이 미국에 쏠려 있는지 진정한 세계와 민족에 있는지 구분하는 명료한 잣대가 된다. 덧부치자면, 한미 FTA 반대, 중단론자들은 대체로 FTA 자체를 반대한다. 즉 다른 나라와의 FTA 도 반대한다. 열세적인 국가에 대한 공세적인 경제와 제도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 또한 공동체적 반대의 핵심이다.

황우석씨를 통해 홍역을 치루고 있는 국익 이론이 한미 FTA 반대 여론과 같이 한다는 점은 특이할 만한 내용이다. 지금 한미 FTA 를 하게 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대는, 역으로 국익이 된다면 다른 나라와(미국조차도) 체결하는 FTA 는 찬성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반대는 이를테면 한중 FTA 는 대체로 찬성하는데, 아직도 중국이 경제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못하다는 호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다. 한미 FTA 를 반대하지만 지금은 반대한다는 논리에서 쉽사리 FTA 지연의 논리를 도출한다. 이 협정을 천천히 진행하여 챙길 국익은 챙겨야 한다는 반대가 결국은 국익이 없으면 하지 말자는 강경한 자세로 변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러한 반대는 국가적 측면의 접근 방식을 통해 국가가 취하는 이익이 소수 이익집단에서 구가하는 이익일 뿐이라는 FTA의 근본 영향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공동체적 이익이 아니라 집단 이익의 계통을 밟아 간다는 점, 따라서 집단의 이익이 되는 다른 나라와의 FTA 는 찬성한다는 점은 보호 받아야 할 나라의 보호 받아야 할 민중들에게 피지배를 강권하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논리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우파적 반대라도 끌고 가야 한다는 담론이 있다. 수세와 공세의 논리에서 수적인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국지적 혁명 역사를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미 FTA 에 대한 팩트를 토론하는 몇몇 의미 있는 자리에서도 드러난 정부의 허구와 난무하는 추정치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선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서 계상된 지표는 오로지 자본의 성장과 유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탄력성이 적은 쪽은 찬성을, 많은 쪽은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계급을 불러 온다. 물론, 이러한 개급 관념이 반대 시위로 표출되는 시민운동의 현장에서도 대체로 동일하게 가지는 관념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계급과 집단의 논리가 지나치게 지배하는 반대 현장의 분위기는 소박한 개인이 접근하기에 다분히 위협적이다. 반대의 논리를 실질적 반대의 성과로 이끌기 위한 수(數)적 저항이 필요한 시기일 수록 그 캐즘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 또한 현장을 엄습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과 관념 때문임을 반성해야 한다. 그래도 강경한 한미 FTA 의 중지 선언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 계급적 연대감의 회복을 성장만으로는 풀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한미 FTA 를 추진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얄팍해지지 않기 위해서 조치해야 할 이익의 재분배 장치는 애당초 없는데다가, 그나마 추진되던 개혁이라는 소극적 이름조차도 연대감은 커녕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공동체를 부양하기도 전에 수구우파 세력에 의해 와해 되어가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내가 한미 FTA 를 반대하는 감수성은 그것의 중단과 FTA 체제 자체의 보이콧에 있다. 다만, 그 공동체의 경험이 집단이나 거대 깃발의 기치 안으로 무작정 스며들거나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혁명의 순간을 잃어버린 또 다른 광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에 대응하는 가치가 자본이 될 수 없음을 지향하는 세계관은 공동체에게, 개인이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마땅한 가치의 보존을 요구한다. 한미 FTA 처럼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자본의 역할을 증대하는 이러한 외부적 요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인격체의 인간으로서 적당한 지위를 찾지 못하고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는 공동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한미 FTA 를 반대하여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고귀한 지향은 개인이다. 개인으로서 그것을 반대하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저항, 개인에게 처해지는 집단의 능욕에 대한 저항, 대체로 권력이 개인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한미 FTA 는 자본을 도구도 중장기적으로 치루려 한다. 이것은 저항조차 거세한다. 천천히 지속적인 능멸을 통해, 익숙함과 달콤함을 번갈아 사용하는 자본의 힘을 통해 개인의 모든 것은 집단에 예속될 것이다. 개인이 지니는 모든 지향점은 집단의 폭력과 억압 앞에 무기력하게 파멸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대한다. 개인을 받아 들이는 모든 방식, 그 개인들의 열정과 저항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일 것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개인에 있어서도 말이다. 한미 FTA 와 FTA 체제는 그것을 무시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 FTA 를 반대한다.

2006/07/13 22:05 2006/07/13 22:05
DrunkenSTAR 이 작성.

한심스러운...

2006/07/11 23:59 / 생각
자이툰 부대가 파병된지 2년 됐나요?
2004년 8월3일 전세기를 통해 파병이 시작되었으니 꼭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 파병될 때는 말도 많고 언론과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지만, 현재 우리는 자이툰 부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이툰 부대 홈페이지를 통해서 화장실 개보수 공사를 지원했고, 월드컵 응원을 했다는 활동 정도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CNN 에서 이라크 관련 소식과 미군의 애국적(?) 활약상(현재는 이라크 여성을 납치,강간하고 살해한 두 병사에 대한 보도가 Top Story 로 보도되고 있다.)에 대해서 매일 보도되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고작해야 우리 언론은 파병 교대자 신고식 같은 것을 보도하면서 '서방님 잘 다녀오세요' 라든가, 꼭지점 댄스를 추는 장병들을 보여주며 저 모습이 전쟁터에 파병되는 병사와 가족들에 대한 예의인지, 전쟁터에 젊은 병사들을 보내는 국민들에게 알릴 언론의 보도 태도인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정부의 보도 통제 이후에 이라크와 쿠웨이트에는 대한민국 국적의 기자가 한명도 없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23명의 젊은이가 독일에 파견되어 치른 월드컵에는 수십명의 기자들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언론이 모든 세계를 커버하고 모든 사건을 뉴스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어떤 현안을 기사로 채택하게 되는 저널리즘적 기준이 현재 무엇인지간에,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내몰린 3,000여명의 젊은이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특히 월드컵에 비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없으니 이라크 전쟁의 사실을 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테고, 더욱이 자이툰 부대의 소식은 일반 언론기관에서 함구로 일관하니 정부홍보기관의 우리나라만세식 보도 밖에는 접할 수 없습니다. 자연히 전쟁터에 그 나라의 젊은이들을 파병해 놓고 이렇게 온 국민이 태평한 나라는 아마도 UN 가입국 중 대~한민국 밖에는 없을 겁니다. 정부의 주도와 언론의 허약 체질이 전쟁의 실상을 방치하고 제나라 군대의 젊은이들 마저 관심의 영역에서 애써 외면하고 있으니 이보다 한심스러운게 또 있을까요?
2006/07/11 23:59 2006/07/11 23:59
DrunkenSTAR 이 작성.

권한다

2006/07/10 22:11 / 생활

작동할 수 있는 가식을 모두 동원하고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이 프로젝트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번엔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가서 일까? 익숙해서일까? 아니면,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소진해서 일까? 비슷한 말이지만 잊혀지는 떨림과 잃어가는 울림이 공존하면서 어느 것도 침묵으로 대변하거나 전가시킬 수 없는 첨예한 갈등들의 일시적 집합체가 이제 해체되려 한다. 때론 남몰래 기도하던 '제발..' 그날이 충분한 검증 없이 리더쉽만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독재인가, 애써 이 책임의 끝에 그대들을 끌어 들이지 않겠다는 모티브가 어느날은 흐믓했다가도 다음날은 온갖 부담의 축으로 톱니바퀴질을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촉각촉각 다가오는 제발.. 그날에 손가락이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동료들의 피곤한 피부를 본다. 규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갑의 논리에 첨삭 없이 움직여준 을의 뼈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소리를 낸다. 외상이 없다고 하여 정신 노동이고 있다하여 육체 노동일 수 없겠다. 어느쪽이나 노동임금에 응당한 노동, 공평하고 사심 없는 노동을 추구해야 하는 가치관이 쉬울리 없지만 이제는 아낌 없이 노동했다는 것으로 삼아도 되는 위안을 권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같은 노동을 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는 사소함을 권한다. 내가 노동자라는 정체성만 가지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연대는 어렵지 않다.

오늘 행동을 하던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장마와 태풍이 소리치던 동국대역에서 그 스피커를 침탈 당했다. 소리를 빼앗긴 연대에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권력과 권력의 유령들. 죽을 줄 알면서 가는 길에 기꺼이 꽃잎을 깔아 놓는 집권세력과 이를 지켜보는 극우보수의 구경꾼들. 불순한 나의 피가 붉은지, 제 색에 못이겨 부글거리다가 지려 밟힌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꿈을 꾼다. 동료들의 손이 아직 노동중이다.
이럴때면, 세상을 확인하는 작업에 더욱 강력한 편집증을 느낀다. 어김없이 놓칠 수 밖에 없는 기회가 꼭 노동이 채 끝나기 전에 시작했다가 노동과 함께 마치는 건 안타깝다. 세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께 아래의 토론을 권한다.

2006 전쟁과 혁명의 시대

2006/07/10 22:11 2006/07/10 22:11
DrunkenSTAR 이 작성.

낸시 랭 비판

2006/07/07 01:09 / 관심/페인팅
밤하늘을 본다. 별이 빛난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 때문에 서울이 아닐 수 있다. 문득,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이 생각난다. 생활의 자양분이었지만, 별과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통장은 나를 눈물나게 한다. 그저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깨고 난 적금만으로 눈물이 흐를 수 있을까? 여기엔 별이라는 이입장치로 인해 나의 감수성이 자연의 순수한 감수성과 반응한 탓이다. 별은 밤에만 뜬다. 자연은 그것을 보여주는 시간이 다르다. 따라서 서울처럼 별이 빛나지 않는 도시에서 별은 그저 가슴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뜻밖의 호의를 배푼다고 하자,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과 삼나무와 찬란한 마을을 '별이 빛나는 밤에' 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별을 보며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을 떠올린다. 다시 눈가가 촉촉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이란 자고로 사물의 재현과 독자가 발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범위 또는 작가가 전달하는 감수성의 범위가 보편성에 준거했을 때, 이건 예술이야, 감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오래전이지 않은 시대에는 말이다.

이어지는 글..

2006/07/07 01:09 2006/07/07 01:09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