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지식이 세상의 객관적 인식론과 지식인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의 총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관 개념으로 한정되어 있을 때, 지식인에게 이념이나 제도가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지식을 보관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지식인이 사회의 문제에 한정적으로 접근할 때, 그리고 최근 수정주의? 계량주의로 인식되는 근본지향적 지식의 역할이 진보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타협점으로 수입된다면 역시 보관하는 개념에서 한발자국도 진보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요즘의 지식인들이 항쟁의 역사를 되풀이 하자는 선동을 하지는 않지만, 현장성 있는 생생한 참여는 불구하더라도 저항의 제스쳐마저 립싱크로 대신하는 심심치 않은 현상은 역시 진보는 그 좌적인 생리상 섬세하고 섬세한 논리 정연으로 자멸하고 마는 역사만은 온전할 수 있겠다 싶다. 이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자멸, 공멸에 가까운 정책 입안은 그 비판거리에서 한참을 빗겨나간 사안이라 볼 수 있다. 어찌됐던 수많은 지식인과 수백, 수천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의 정책에 대해서 공청하고 토론하고, 깃발과 함께 저항을 일삼고 있음에도 사회의 현안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른바 풀뿌리 지식인의 산실인 대학은 정치적 언론 플레이와 부당함을 상식으로 여기는 비겁함을 소실점으로 삼는 분위기다.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이 정계 개편의 서막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그들만의 정치공학은 혹독한 선거 결과를 견디는 그들만의 무기가 되었을 법도 하다. 한나라당의 치졸한 법안 연계 처리의 작태는 입에 담다가도 토해 낼 역겨움이지만, 토양을 보고 씨를 뿌렸어야 했을 노무현 대통령과 그 일당들이 정권을 통해 추구한 변질의 시대는 다른 토양을 다른 판을 짜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지점에서 다른 토양, 다른 판이 될 수 있는 지식인의 산실에 매우 주목할만한 정치적 사안은 사학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이 교육 전반의 개혁을 가져올리 만무한데다가, 사학이 이를 통해 투명한 인사, 회계는 물론이고 교육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로써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또한 의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성을 내포한다. 의문이 있다는 것은 현재의 부정으로 말미암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정계 개편의 서막은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도 그는 이미 그 포지션의 유지를 위한 동상에 불과하다, 즉 그는 불신임 되었다. 정계든 지식인의 토양이든 개편의 꼭두서니에 사학법이 서 있다고 보는 것은 정권이 말한 개혁과 우파 야당이 말한 보수가 그 지점에서 가장 첨예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있는 그들이 얘기하는 정치공학적 개편은 그 맨끝에 서 있는 사학법에 손을 대느냐 마느냐에 있는 것이다.
사학법 개정안의 통과로 동국대 강정구 교수나 강남대 이찬수 교수 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지성의 후퇴가 갑자기 전진의 깃발을 찬란히 휘날리리 없겠지만, 최소한 그 교수들이 당한 봉변을 판단하는데 누가 비겁하고 누가 반지성적이며 누가 반사회적인지 가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해본다. 물론, 법을 지키며 개혁의 요구에 노력하는 사학에 대해 그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겠다는 교과서를 더듬거릴 시간 조차 없다. 우파의 속절 없는 뭇매에 장사가 되지 못한 사춘기인 좌파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결국 다음 대선까지로 한정된다. 여전히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에 대한 현실감각이 이를테면 더 천천히 바꿔가기 식의 섬세한 논리정연보다 상쾌한 이유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현안적인 한미 FTA 에 찬성하고 반공주의 같은 편협한 사고의 매몰이 주체적 지성에 반동적이라는 지식도 아닌 역사의식을 숱한 지식인들이 결국 모른체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비겁할 뿐이다. 비겁은 권력을 숭배하며 기생하는 것. 정권을 회피할 줄 모르는 비겁이라는 지식인의 반지성은 그 권력이 추구하는 이념이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역시 관계가 없다. 남은 시간은 2년이다. 권력이 과연 제대로된 좌파 사회주의로 바뀌게 된다면 그 반지성적 지식인들의 청산이나 뼈를 통해 요구 받을 혁신은 권력의 입장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어차피 그들은 구체적인 사안에 구체적인 대응과 구체적인 진실을 알릴 지식인도 아닌데다가, 진정한 사회적 책임은 모른체 하고 그들이 숭배하는 이사장의 자본이나 예수의 불관용과 편파에 종사하는 대중의 맨끝에 선 자들일 뿐이다.
그 반대편 맨끝에 사학법이 있다. 실은 국가보안법도 동무를 하고 서 있어야 되는데, 그 맨끝에 선 자의 가슴 시림을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좌파의 할 일이다. 반은 좌파라고 주장하는 좌파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당면과제로 인식될지, 정계 개편을 하려는 것인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검색어 '2006/06'에 대한 13 개의 검색 결과
- 2006/06/30 사학법과 지식인 by DrunkenSTAR
- 2006/06/28 장마 by DrunkenSTAR
- 2006/06/27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by DrunkenSTAR
- 2006/06/22 우리는 어떻게 되는데? by DrunkenSTAR
- 2006/06/22 나는 얼마나 무지 한가... by DrunkenSTAR
- 2006/06/21 상기하자 육이오 by DrunkenSTAR
- 2006/06/20 미시담론의 역습 by DrunkenSTAR
- 2006/06/16 민주노동당이 나아갈 길 by DrunkenSTAR
- 2006/06/12 좌파신자유주의와 김근태 by DrunkenSTAR
- 2006/06/09 다시, 인간의 퀄리티 by DrunkenSTAR
여름, 오후 1시에 떠나는 KTX 에 표가 동이 났다. 도시의 감성으로 낮은 구름이 내려칠 듯 말듯, 장마는 여전히 꾸물거리고 있다. 1시 30분 표를 사고 나와 담배를 피웠다. 쓰고 달고, 몸이라고 구색을 맞춘 장기들이 니코틴을 받아 들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나이가 실존에 간섭하는 범위가 그 모양새만은 아닐 것이다. 행색이 추레한 5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조금 전부터 나의 흡연을 확인하려는 듯 바지 주머니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는 것 쯤은 그가 2개피의 담배를 꿔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는 추레했지만, 내가 담배를 꺼내면 그가 다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부러 5천원 신권을 준비하고 있었던 동정심 같은 것은 여름 오후 1시 KTX 와 함께 장마속으로 출발했다.
1,500인 선언과 박종철 인권상 수상에 힘입었다고는 하지만, 전단지 뒤에 얼굴을 디민 영화인과 정치인들의 지지글은 마치 새로 개봉될 영화의 30자 단평 같았다. 1000만인 서명을 받는 탁자에 다가갔더니 전직 승무원이며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가 의식적인 호들갑을 떨면서, 얼마나 외웠을까?, 지지 서명을 가늘게 호소했다. 지난번에 서명 했는데 또 해도 될까요? 예측하지 못했던 나의 물음은 그를 비롯하여 옆에 있던 동료 까지도 나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이름을 쓰고 주소를 반쯤 쓰던 대학생만이 허리를 세우지도 고개를 올리지도 않고 하던 서명을 할 뿐이다. 1명이 중복되어 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명이 되면 어쩌나, 그래도 될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짧게 동요했지만 이내, 한참을 살지 않고 견뎌왔던 자 만이 낼 수 있는 눈빛을 막막한 내 눈에 쏘아 댔다. 고맙습니다! 이거라도 읽어 보세요, 그는 전단지를 내민다. 힘내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가방 1KG, 가방 안에 노트북 2KG, 잡다한 부속품들 1KG, 다이어리 1KG, 역사란 무엇인가 0.7KG, 대략 5.7KG 이 오른손 뼈마디에 매달려 달각달각 소리를 낸다. 파이이야기 0.7KG 과 반도에서 나가라 0.8KG, 0.8KG 도합 2.3KG 을 사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억제는 순전히 무게 때문이었다. 소설 다운 소설이란 감수성을 잃어 버린 뇌가 소비 전파를 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여전히 읽을 꺼리가 숱하기 남아 있는 방켠의 수북스러움이 최근 결심한 편찬 수준의 작은 글쓰기의 결과 또한 저 수북스러움과 동질감을 느끼는 터였기에 읽는 것보다 사는 것에 두었던 비중을 바꿀 수 있었다. 그냥 그저 써내려가기의 적은 무게를 편찬 수준까지 끌어 올려 보려는 특정 근육들의 쓰임은 아직 적당히 단단하지도 보기 좋게 기름칠을 하지도 않았다. 그럴때면 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뿐이다. 역시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들에 대한 읽음이 당분간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훼방은 그 고된 고독보다 달콤하고 쌉사름하다.
이를테면, 어제 밤 11시에 반포에서 인사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길에서 만나지 못했을 참여연대 C 간사와 비교적 명료한 관계가 되게 해준 쌉사름한 훼방을 마다할리 없는 술마시며 연대는 본능적으로 그 훼방 대오를 쫓아 가는 듯 했다. K 간사는 서러운 투쟁에 대해서 얘기해줬고, 나는 의리 없는 자살의 추억을 리바이벌 했다. 나의 이야기는 말해도 말해도 담즙이 나오는 부르조아를 닮아 있었다. 설명되어 질 수 없는 닮아 감이 싫어서 다시는 리바이벌이 없다고 다짐했지만, 내 얇은 관계는 허락치 않았다. 나의 작은 글쓰기를 스스로 소시민의 개화로 설명할 채비를 갖추었던 허술함도 한몫 거든다. 장마가 오려나 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발이 젖는다.
장마가 오가면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던 순진한 계절 터울, 그 하늘과 바람이 마냥 좋았던 지난 일요일의 삼청각에는 내가 그동안 비난했던 대중들이 좋은 것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충동이 오직 두가지로 압축된 시간을 거슬러 착지한 곳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 충동 중 독서는 이곳이 최고의 환경을 주겠다며 히죽였던 나의 비열함을 털어 내지 못하고 1시30분 동대구행 KTX 에 오른다. 10호차 1A 좌석에 역사란 무엇인가 를 던져 놓고 플랫폼에서 짐짓 여유롭게 담배를 피운다. 아까 그 추레한 사내도 남은 담배 1개피를 피우고 있는 중일까? 한국철도공사 서울지부 건물이 뿌옇다. 삼청각은 보이질 않는다. 눈이 방향을 훌터가지만, 오염된 안개를 뚫을 수 없었다. 답답한 안개, 담배갑속에 담배들이 널널해지기 위해 나의 폐는 얼마나 고되었던가, 그 사내는 내 폐의 은인이다. 담배값을 올리라는 유시민은 내 호주머니를 탐내던 그 사내의 눈빛일 뿐, 그 사내는 빌려 보이면서 나의 은인이 되었다. 나는 담배를 끈다. 다시 일터로, 누군가는 부당하게 빼앗긴 그것을 찾기 위해 맨끝에 홀로서서 시린 눈으로 서명을 받고 누군가는 가기 싫어서 발뒷굽에 꽁초를 지진다.
역사란 무엇인가, 60페이지까지 두번을 읽었지만 홍신문화사의 번역이 형편 없는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런 예의없는 문체란, 30페이지 정도로 조망 가능할 정도가 되니 졸음이 온다. 대게의 경우 충동을 이긴다. 하지만 KTX 를 50번쯤 타고 생긴 실증적인 경험에 의하면 KTX 에서의 졸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짧은 시간과 안락하지 못한 좌석의 섬유가 사타구니를 조여오기 때문이다. 정신을 소멸시켜서 만들 휴식은 육체를 불편하게 만들고 다시 돌아온 정신이 급작스럽게 두통을 호소한다. 이것이 KTX 에서의 졸음이다. 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묻고 답해야 하는데 산만한 조사와 부사의 쓰임으로 인해 방켠에 두고 온 계간 창비 132호나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의 표지가 솔찮이 오버랩된다. 많이 읽는 것은 많이 쓰는 것보다 어렵다. 나의 방켠이 그것을 증명하며 미래와 소통하고, 내가 물려 받을 아버지의 보수적인 서재가 과거를 끌어 온다. 미래는 나에게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벌써부터 경고를 하고 나선다. 나는 그 울림을 바닥에서도 천장에서도 듣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처럼 무의미한 질문을 삶 속에서 건져내어 속절 없는 인생들이 벌거숭이로 뛰어 다니는 해수욕장에 쳐 박어 놓고 나니 갯뻘의 그것처럼 구체성을 띤 생명들이 간신히 숨을 쉰다. 짐짓 모른체 살아 왔던 이웃들의 구덩이와 개화되어야 할 의식의 껍질과 부서지고 트여야 할 사회의 뚝이 소시민에게 시민으로 살아야 할 세상의 모든 예언으로 다가 온다.
하지만, 다짐하기에 나는 너무 낡고 너무 얕다. 유행가를 빌려서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등을 맞대었던 나의 친절한 복종이 이 세상의 황사 바람이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잡음이었다. 나의 말미에 들어 찰 성찰의 시간에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정치적이며 세계적인 폐배의식과 오만에 두려움 없이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인간성을 호주머니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의문한다. 그리고 충동한다. 이 장마가 차라리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 추악한 도시와 자본주의자들이 바라볼 감상 어린 노을을 덮고, 지상의 꽃에게 비를 뿌려 줄 수 있도록, 그동안 그 비 안에서 나는 나를 끊임 없이 배반할 것이다.
Should the United States allow a country openly hostile to it and armedwith nuclear weapons to perfect an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capable of delivering nuclear weapons to U.S. soil? We believe not. TheBush administration has unwisely ballyhooed the doctrine of"preemption," which all previous presidents have sustained as an optionrather than a dogma. It has applied the doctrine to Iraq, where theintelligence pointed to a threat from weapons of mass destruction thatwas much smaller than the risk North Korea poses.
[미국은 인정할 수 있는가? 미국을 적대시 하는 나라가 핵무기를 가지고 놀며 미국의 수도 중심부를 강타할 것처럼 까부는 것을, 그렇지 않다. 부시는 선제공격의 수단을 도그마로만 생각했지 선택적으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선전만 했던 것이 실수다, 결국 이라크에 사용했는데 실은 그들의 위협은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쏘리하네..), 하지만 북한을 선제공격하는 것은 이라크보다 위험이 적으니까 하자.]
Third, the U.S. system is unproven against North Korean missiles andhas had an uneven record in its flight tests. A failed attempt atinterception could undermine whatever deterrent value our missiledefense may have.
중략... 대포동 2호를 MD 로 요격하면 되는데 그게 말야...
[세번째로 문제는 미국의 이 MD 시스템이 북한의 대포동 2호를 요격할 수 있다는 증명이 없어, 해본적도 없고 그래서 하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그동안 MD 한다고 쏟아 부은 예산을 다 토해낼 판이야 그러니 선제공격을 하자]
The United States should accordingly make clear to the North that theSouth will play no role in the attack, which can be carried outentirely with U.S. forces and without use of South Korean territory. ..... South Koreansshould understand that U.S. territory is now also being threatened, andwe must respond.
[하지만, 미국은 북한에게 확실히 해야 하는게 있어, 이번 일에 남한은 아무 역할도 안한다는 것을, 남한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무 짓도 안하는 거라는 것을. 단지 미국이 수행하는 것이지 남한의 영토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에는 확실히 해야 하고, 남한 사람들은 미국의 영토가 위협 받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해, 그렇다고 안하면 어떻게 할건데..]
In addition to warning our allies and partners of our determination totake out the Taepodong before it can be launched, we should warn theNorth Koreans..... We should sharply warn North Korea against further escalation.
[게다가, 우리는(우리의 동맹까지) 니네들이 대포동을 준비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북한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하고..... 그러니까 북한! 너희들은 우리의 선제공격 후에 더 이상 사태가 진전되는 어떠한 일도 하지 말 것을 세련되게 경고하는 거야, 그러면 될거야]
North Korea could respond to U.S. resolve by taking the drastic step ofthreatening all-out war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t is unlikely toact on that threat. Why attack South Korea, which has been working toimprove North-South relations (sometimes at odds with the UnitedStates) and which was openly opposing the U.S. action? An invasion ofSouth Korea would bring about the certain end of Kim Jong Il's regimewithin a few bloody weeks of war, as surely he knows.
[북한은 아마도 한반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덤벼들거야, 하지만 그러한 위협을 얼마나 많이 들어 왔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남한을 공격하겠어? 남한과 북한은 그동안 잘 지내왔자나,(때때로 미국하고도 잘 지내왔는데) 김정일은 잘 알꺼야, 몇 주간의 피비릿내 나는 전쟁이 끝나면 그는 파멸될 것이란 것을, 그런데 어떻게 전면전을 일으키겠어, 그러니 선제공격을 하자]
미국이란 나라가 이렇군요, 아니 윌리암 페리라는 양반을 비롯한 그 권력 집단의 생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했다고, 누가 어떻게 할꺼야?' 이게 도대체 무슨 근거를 통한 자신감 일까요? 남의 나라를 공격해 놓고 무턱대고 그들은 아무짓도 못할 것이란 자신감은 오만의 폭거 입니다. 게다가 바로 코 앞에서 미국은 우리의 친구, 우리의 혈맹이라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친구들에게 쏘고 남은 미사일이 돌아갈 판인데, 인도주의인척 했던 헐리우드 액션이라도 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부시 독트린 이라고 불리는 '예방적 선제공격'이 도그마가 아니라 선택적 결단으로 격상되면서 우리의 안전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방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나라 사람이 무고하게 죽던 말던, 몇 주간의 유혈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인간의 삶이 부서지고 사라지던 말던, 한때 미국의 친구라며 침흘리는 혈맹이던 말던, 먼저 때리고 자기는 튀어 버리고 남아서 수습하던 친구는 징역 사는 꼴이 예방적이란 미국의 의도 입니다. 그런 좋은 친구가 계속 되시겠습니까? 그럼 그런 좋은 친구가 되실 분들은 그렇게 하시고, 좋은 친구가 아닌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게 일찍 좋은 친구가 될 걸 그랬나요? 몸과 영혼을 다 바치고 하이에나 새끼처럼 침이나 질질 흘리면서 생존을 구걸하는... 그러다가 식상하면 버려져도 되는 친구가 되시겠습니까?
우리의 생존이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아직 수양이 부족하든가, 배움이 모자른 탓이다. 나는 무지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책 몇자 읽었다고, 시민단체 사람들과 술 몇사발 먹고 다닌다고, 바쁘니까 기부나 좀 한다고, 우쭐대는 시건방을 떠는 것은 아닌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즐겁지 않은데,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 속절 없는 글귀들과 유희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던가?
여전히 명품 신발을 신고, 고집스럽게 순대국집에서 소주를 마신다고 계급이 바뀌는가 계급을 이해하는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작정할 수도 없는 우리의 진실한 모습 앞에 서있을 수 있는가?
정말 알아야 할 것들을 내게서 떨어 내면서 잃어 버리려 노력했고, 잃었던 것 마저 잊으려 노력하던 나는, 그렇게 떨어져 나간 나의 울림을 들으려 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게 강력했던 것은 무엇인가? 오직 기득권을 줍기 위해 부르조아 하려는 생각과 행위만이 강력하지 않았던가? 그런 나의 인색함이 사회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프로페셔널이라든가, 지위라든가, 권위라며 누구에게도 서운하게 대접 받을 수 없다는 듯 체면 차리던 모습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볼 줄 아는가... 나는 무지에서 너무 멀리 와 있지 않은가..
[전태일통신]나는 무지하지 않은가..
육이오를 순진하게 김일성이 일으킨 민족전쟁 내지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맞짱으로 상기하는 것이 사실일지 모르나 역사는 아니다. 최소한 육이오를 역사로 상기하려면, 응당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카이로에서 조선의 식민지 해방을 결의한 승전국들이 왜 굳이 모스크바에 다시 모여 조선, 중국(내정간섭에 대한),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주권행사에 대해 논의를 해야 했고 왜 그 중 조선만 신탁통치에 의해 주권을 담보 잡혀야 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대체로 쏘련이 찬탁, 미국이 반탁했다는 어용역사의 가르침을 굳이 스딸린의 고백으로 소급 기억할 필요는 없겠다.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적 통일정부 수립에 미국이 훼방을 놓기 시작한 이유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시도한 도입기적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판단은 남지나반도의 미군이 조속히 조선으로 이동하여 주둔함으로써 주둔군 지위(식민지 지위)를 얻으려는 것이었으나, 2차대전을 마친 미군이 조선까지 이동하기 위해 정비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쏘련이 대륙의 육상경로를 통해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는 시간보다 턱 없이 모자르게 된다. 루즈벨트를 비롯한 백악관 관료들은 황급히 카이로 선언을 보완하는 3국외상 회의를 제안하고 조선의 국민성이 아직은 독립국가를 이룰 자격이 없다는 점을 중점 부각, 쏘미공위를 조치하여 5~10년간 탁치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 전후 식민지 패권정책의 확장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쏘미공위를 통해 통일정부를 위한 민주주의적 선거를 할 의사는 애초에 있지 않았다. 끄나불인 이승만 동원하여 반탁운동에 간접지원토록 하고 공위 1차 협상이 결렬되자마나 1946년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면서 적극적 찬탁으로 돌아서게 된다. 여전히 반탁을 주장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인사들과 좌익 세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이승만의 특기는 이때부터 잘 발휘되기 시작한다. 1947년 본격적인 우익의 좌익 탄압이 이루어지고 2차 협상이 결렬되자 더 이상 조선의 문제는 쏘미공회가 아닌 UN 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군정이 남조선에 그들의 제도를 펼쳐 놓고 그 제도를 이끌어 갈 세력이 우파의 뿌리인 한국민주당임을 선언함으로써 그동안 반민족주의자, 매국노로 찍혔던 낙인을 벗게 된다. 좌익을 불법화하고 박헌영,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후 남로당)은 불법단체로 법제화시켜 탄압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여러 인사와 조직들을 거쳐 현재까지 확고한 반공주의와 미국지향적 사대주의를 신념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상기하자 육이오, 강정구 교수의 통일전쟁의 시각은 실은 김일성이 일으켰기 때문이지, 이승만이라도 민족염원에 조금이라도 기대어 있었다면 그도 같은 방법을 활용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관심이 미군정의 의도와 반대세력의 숙청에만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우파의 거두 조선생처럼 우파통일전쟁을 조장하는 듯한 뉘앙스는 절대 아니다. 전쟁은 어떤 신념으로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인간 행위이다. 반공주의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 이다. 전쟁이 나더라도 적화가 아니라 右화 여야 된다는 착각, 그로인해 미군은 핵무기를 남한에 배치해도 되고 북한은 안되는 일방적 사고방식, 더 나아가 북한에 의한 적화전쟁의 전쟁을 지지하지도 현재 북한의 체제를 이상향인양 추구하지도 않는 않는 진보세력(그들은 좌파라고 하는)들을 마치 김정일의 괴뢰세력으로 매도하고 국가보안법으로 매장시키려는 시도들은 스스로 부르짓는 자유? 자유라는 의미를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해방전후 우파인 그들이 처음부터 민족주의자 였는지, 민족의 염원을 헤아릴 줄 알았던 무리였는지 따위들을 증명해보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육이오로 상기해야 할 점은 바로 그런 점과 전쟁의 참상이다.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자, 현재 전쟁을 일으키게 할 수 있는 키를 누가 쥐고 있으며 그 키를 꽂고 돌리는데 우리의 주권적 자세가 마땅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키를 가진 자의 의도에 순응하고 있는지.. 생명에 관계된 명백한 일들이 벌어져도 반공타령만 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이고 무엇때문인지.. 어려운 조합이 아니다.
종범들의 노예 의식은 그 심각성이 이미 도를 넘었지만, 대체로 나타나는 현상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피해 의식 또는 열등 의식, 100분 토론에 나오는 지식인들이 현학적 수사로 현안을 갈기갈기 분해하여 부위별로 이름을 정하는 의식을 보며 질려 버리는 피해 의식은 그나마 애교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따로 공부 할 취미도 없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책이라도 사봐야 한다는 계몽근본주의로 구속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우유 구멍을 밀고 들어와 있는 신문을 펼치고 '액면이 Fact' 라는 고정관념도 모자라 팩트가 아닌 가정에 역사까지 소급하고 적용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작태다. 분리 수거 하시기도 힘든데 스스로 사절을 권유해야 마땅한데, 100분 토론의 현안까지 만이라도 알아야 하는 열등 의식은 그러지도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액면이 Fact' 다는 말도 안되는 의식이야 말로 근본적인 피해 의식 이다. 이러한 '의심 없는 흡수' 의 상태가 매몰이다. 이러한 상태의 개인들은 대게 '코끼리가 춤을 출 때, 춤을 춘다.'
둘째로 타자적 자아 의식, 보고 배운다는 가부장적 전통에 의해 제자를 보고 배우지 못하고 토고를 보고 배우지 못하는 팽배한 강박 관념은 거대함을 지향한다. 가부장적 형태는 자아의 형성 시기부터 순혈의 관계에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애교라고 하더라도, 자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에 부터 자아가 지향하는 바가 제대로된 가부장적이었을 때, 그 의식은 오로지 의식, 즉 '거대 지향적 오로지 의식' 이 된다. 이러한 거대한 타자를 향하는 자아는 내가 속해 있는 어떤 거대함이 끊임 없고 성실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거대함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격화 시키는데 능통해진다. 이러한 능통함은 민족주의를 가르는데 대단히 엄격하게 사용되곤 하는데, 자신의 순혈적 민족보다 거대함이 지향하는 민족이 앞서고 언제든지 순혈 민족을 이반시키는 행위 또한 거대함이 거대했을 때 더욱 더 능동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대 지향적 의식이 최근 가장 잘못 받아 들인 유행어가 세계화이다. 세계화가 시작되는 지점이 우리 라면 우리가 향하는 지향점이 세계이며 방방곡곡인가? 세계화는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포장지 이름이 아니란 상식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각종 사회이념 서적들을 봤는가 여부를 떠나, 세계화가 지향하는 단순한 지점을 살펴보면 간단히 마무리 된다. 세계화가 트리니나드 토바고나 우크라이나도 살펴보는가? 오직 미국이 세계화이다. 이쯤에서 향후 20년쯤후에 유행 될 '우주화' 에 있어서 미국이 그 거대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미국이 점령한 안드로메다 USA42 혹성이 곧 우주화의 정점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화가 꼭 방사형일 필요는 없다는 재정경제부 고위관료 같은 말풍선은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미시담론을 절제하는 의식이 없다면, 거대담론을 그대로 충돌시킬 이유가 없다. 불행한 것은 권력의 습성이고 미시담론이 닮지 말아야 되는 감정이 이른바 관료주의이고 보면, 여전히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의식은 패러다임이다. 거대담론을 충돌시키지 않고 종속되지도 않기 위해서 교과서적인 해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전환은 저항을 수반하지만, 세계가 지금까지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돈과 시간을 팔아 세상을 싸돌아 다니는 것과 다른 경험, 그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퇴근 후에 촛불이라도 들 수 있고,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서명이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는 신발을 신은 것이다. 그 역할에 맞게 우리는 세상을 천천히 바꿀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미시담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결코 이상주의가 아니다.
현 집권세력이 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좌파 진영에서 조차 외면 당하는 작금의 사정에 있어서 사상적 피아 식별이 여간 쉽지 않다. 진성 우파가 아닌 성격화된 뉴라이트라든가 또는 스스로 개혁성향이라는 일단의 민족주의 우파논객들의 식견이 비난하는 대상의 공통성, 즉 대상동질의 감수성으로 인해 여간해서 어떤 편향을 지니고 있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매한가지다. 따라서 논지에 대한 짜투리성 문서와 동조하는 논객들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는 그 문법 자체의 비약만으로 넘겨 짚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여 실제로 비판 되어야 할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매혹되기 쉽상이란 생각이다.
실은, 정치적 피아식별이 미시담론에서 명확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최근의 이유가 이러한 대상동질의 감수성에 있는게 사실이지만, 진성 좌파라 하더라도 그 사상을 담는 테두리가 제도권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체제적 현실이 지리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우파적 논리가 유효한, 사회 구성원의, 미시담론의 암묵적 합의가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최근의 반목적 현안인 한미 FTA 와 같은 내용을 보았을 때, 한미 FTA 를 찬성하거나 그 이상으로 예찬하는 진영에서 반대하는 진영에 흔히 쏟아 내는 질문이 '그럼 안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인 것을 보면 우파, 매파의 한미 동맹은 결연한 의지의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근본주의의 표상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한다.
지난 총선에서 10석의 비례대표로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구축한다' 는 거대담론이 있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목표를 설정한 바 다름 없다. 한미 FTA 찬성론자들, 즉 우파들의 그러면 어떻할껀데? 라는 대안 압박에 있어서 사회경제체제의 구축이다 라는 거대담론간의 충돌이 우파에게 끊임 없이 이상주의다 라고 매장되는 것은 첫째, 현존하는 이념과 경제 체제가 이미 자본주의이고 침체 없이 진행될 것을 믿는 전반적 매몰과 안락함에 있겠지만 둘째, 사회경제체제, 사회주의의 공동체 건설이 생산한 생태, 소수자, 인권, 분배, 젠더, 노동, 인간성 등의 미시담론이 거대담론에 흡수되지 못하고 여전히 겉돌면서 어떠한 사회주의적 표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내부적 이슈에 휠씬 더 진중한 비판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이렇듯 피아의 식별이나 대상 동질성을 떠나, 좌파의 좌파적 신화가 끊임없이 현실감각이 없는 것처럼 매도(?)되는 이유는 의지는 있으되 표상이 없는 운동으로 진화된데 있고, 그 개별 운동들이 집단 이기와 영합 아닌 영합의 길을 걸음으로써 '고귀한 척' 하는 좌파적 패션이 일반 민중에게 어필되어 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비판의 대상일 것이다. 물론, 계급성에 대한 인식이 민중들에게 공산당, 맑스적 사관으로 배격되어 실제로 그 계급적 정체성을 희석시킨 사회적 책임이 언론과 정권에 있고 그에 대한 저항에 좌파의 운동가나 활동가들의 숭고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저 유토피아를 음성신호로 스피커를 울리는 일이 우파의 나팔수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像의 부재가 여전히 무게감을 더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적체계의 상이 집권 이후로 마냥 미뤄지는 일련의 게으름이 오늘의 실패한 집권세력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장황한 민주노동당이 나아갈 길에서 선두되어져야 할 것은 진보라는 체제의 상 이다. 이러한 아쌀한 정리 정돈을 그 브레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물론, 지금도 그에 대한 매진도 5년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일 것이라 희망한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노동당의 감수성이 빛나는 어떤 상을 보진 못했다. 그 짐이 민주노총도 아니고 NGO 도 아니고 왜 민주노동당에 집중되어야 하는가? 는, 상상력 넘치는 운동의 개념에서 비로서 그 운동을 권력으로 법으로 집결시킬 수 있는 거대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민주노동당이기 때문이다. 이미 2년전에 만들어낸 그 통로로 언젠가는 빛나는 감수성이 유유히 걸어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면 욕심일까?
선거 직전 경향신문의 이대근 칼럼의 [반우리당 연합을 구축]하라는 메시지는 참여정부의 무능과 사상 변질에 깊은 고찰과 반대를 견지하는 최장집 교수의 그것에 약간의 선동을 버무린 총론처럼 머리를 하얗게 깨운다. 후미진 나의 이성적 생각 또한 백낙청 교수의 지속적 개방의 원리라든가 통일논리 보다는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위기와 이대근의 선동이 입맛에 맞다. 여전히 조중동은 내각제였다면 정권을 내놓아야 할 판국인 열우당과 노무현 대통령을 재기불능 상태로 몰아가지 못해 안달인 꼴을 보면 그들도 다음 대선에서 정권을 창출하지 못하면 역시 열우당 꼴이 되지 말라는 법 없는, '순환고리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한때 한 진영으로 알았던 진보에게 외면 당하고, 보수에게 청했던 악수는 여전히 민망한 빈손인 노무현 대통령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측은한 동정도 아니 생기진 아니하지만, 이대근의 선동은 아직 추억이 아닌데다가 열우당이 아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라는 판세 유지의 체념이 기권으로 승화 되어야 하는 당위 또한 없다. 민중이 미국의 조작과 의도에 의해, 군사적 도발에 의한 폭력과 기만에 의해, 고도의 정치공학과 술수에 의해지 않고 시대와 개혁의 요구에 진지한 민중적 기대를 걸었던 지도자, 집권세력에 의해서 들어야만 했던 '좌파신자유주의' 라는 신사상적 정체성은 거의 만행에 가까웠다. 이러한 정체성 부정의 만행은 민중들의 사고를 퇴행시키는 지도자적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좌파, 우파가 뭔지 그따위 것에 관심이 없는 민중들은 아무래도 관심 없는 합법적인 기권이면 족하고 이번주 로또 번호가 더욱 궁금할 뿐이다. 대게의 민중이, 국민이, 한나라당의 기조가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그 판단으로 가속화될 정책적 오류(민중적이지 않은 오류)들이 여야 합의로 적극 진행 되었을 때, 국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라는 황우석식 맹목적 추종을 스스로 선택한 책임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요된 가난이 아니다. 어떻게 그것이 오로지 위정자들의 잘못인가? 올바른 판을 벌이지 못하고 판을 접을 줄 모르는 민중들의 책임 또한 간과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이른바 좌파신자유주의이다.
좌파라고 하면, 진보 이전에 친북반미세력 이거나 필시 공산당으로 규정하는 우파의 민족주의는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한내의 좌파를 파괴하고 대립해야 할 세력으로 규정한다. 좌파가 북한과 남한은 모두 한 민족이며 외려 기득권으로 민중의 권리와 노동을 착취하는 남한의 이건희 같은 자본 독재 세력을 파괴하고 대립해야 할 세력으로 규정하는 차이를 좌파신자유주의가 극복할 수 있는 차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민족주의적 의식은 이미 오래전 리영희 선생에 의해 '패권주의, 식민지주의에 대한 저항은 모두 민족주의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주의적인지, 자유(자본)주의적인지에서 확연한 차이가 날 뿐이다' 로 단서를 달 수 있다.
아울러 신자유주의 경제관을 간소하게 살피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산업 혁명의 유럽을 이끌며 자유방임무역을 하던 시대가 자본주의의 1세대, 이후 국가(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야 된다는 케인즈를 위시한 시카고 학파의 수정자본주의가 자본주의 2세대, 이제 다시 예전의 자유방임으로 돌아가자는 현재의 3세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이다. 현재 1차 협상이 마무리된 한미 FTA 의 FTA 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한 방식이다. 미국이 각 나라와 FTA 를 체결하는 이유는, 복잡할 것이 없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각별한 보호를 이유삼아 세계 최대 무역국으로서의 지위를 패권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즉, 군사적으로 감싸줄테니(이게 보호일까? 종속일까?) 경제적, 제도적 불행은 감수하라는 얘기다. 이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은 전 세계를 상대로 조건 없는 경쟁, 예외 없는 개방을 광포하게 요구하는 가치관이다.
이항대립하는 좌파와 신자유주의에 적절한 양다리를 시도한 집권세력을 강타한 펀치는 이러한 어설픈 포지션이 어떤 재앙을 불러 오는지 비로서 깨달을 수 있는 강도였는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반대로, 이제 그들의 포지션이 신자유주의로 급속히 선회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점도 사실이다. 한정된 시장에서 고객을 창출하는 가장 손쉬운 해법은 기존 시장을 침탈하는 것이다. 열우당의 장사아치들의 수법이 그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선은 이제 채 2년도 남지 않았다. 군사 독재에 맞서 그 잔혹한 고문의 고통속에서 고문자들의 이름이며 얼굴을 기억하고 나와 그들을 고발하고 징벌한 초인간적 인간이었던 김근태 의장이 보일 행보는 그래서 한나라당의 그 인물이, 그 인물일 대표 경선보다 관심이 간다. 그가 좌파신자유주의의 허구로 겪은 재앙을 그날의 고문으로 이입하고 기억한다면, 그가 앞으로 고발해야 할 것이 결코 진보 좌파가 아님을 알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가 정동영 전 대표처럼 거쳐가는 장사아치인지, 좌파 아니면 신자유주의자로써 명확한 사상을 행동할 것인지 지켜 봄으로써 그가 대선의 한 경쟁구도로 구상될 인물인지 아닌지... 이제 사뭇 궁금한 그 1막이 올랐다.
이러한 미시담론의 가장 저급한 퀄리티는 취미권리와 생존에 대한 혼동, 자본 유지를 위한 이기심, 체제 순응의 신화에 대한 매몰이다. 자신의 불편함과 남의 생존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해치고, 돈의 정밀한 해석만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그 결정이 돈과 관계 없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이 모여 인간성을 모질게 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경쟁 우위에 서지 못해 부산스럽고 무신경하다 못해 이성과 지성이 쌓이지 못한 교양 없는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부서버린다. 실제로 부서져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고 사회인데도, 본말 전도된 온갖 모습들은 '자신에게 남들에게서 벌어지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고 일어 나더라도 그들에게 빌 붙으면 되는' 더욱 천박스럽게 일그러진다.
어떤 사안에 맞추는 집단 의식의 퀄리티에 개별 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간다고 해도 미시담론의 정체성이 향하고 있는 계급성은 집단 의식의 방향과 거의 같다. 그것을 행복추구권이라고 호도하는 사람이야 말로 저급한 퀄리티와 수미상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퀄리티는 대체로 현안의 문법 읽기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다. 한미FTA 가 되면 부동산 가격이 오를 희망에 부풀어 있고, 외국투기자본의 무분별한 유입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점은 오로지 자신의 주식에 빗대어 상상되어 질 뿐이다. 돈으로 규정되는 여건이 마련되기 전에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 자본의 노예들이 즐겨쓰는 핑계가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고, 도리어 추종하던 돈에게 그 어떤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이들의 중대한 착각은 국가가 잘되어야 개인(아니, 본인이) 잘된다고 믿는 것과 진보성향의 미시담론들이 자기들의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잘되었을 때 개인이 잘되는 경우는 국가의 이익이 양극화의 가난쪽에, 다수결의 소수쪽에, 계급의 천대쪽에 사심없이 종사되어 질 때 뿐입니다. 진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신자유주의적이거나 반공주의일 때 절대 그 사상에 동조나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말하는 것을 통제하는 어떤 부당한 폭력 앞에는 엄연히 맞서겠다는 의미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보다 나의 존재 이유가 고작 결혼해서 가족 건사하며 부동산 투기하는 것에 있는지 부터, 취미활동을 위해 생존의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들의 몸부림을 걷어차는 후미진 인간성이 본래의 인간성인지까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명확한 진실을 찾기 어려울 텐데, 퀄리티가 퀄리티인지라, 쉽지는 않겠다.
KTX 승무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여길 클릭해서 꼭 읽어 보시라!!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