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는 통일 전쟁이라 발언한 강정구 선생은 알고보면 위대한 학자는 아닙니다. 학자에게 그 정도 사상의 스팩트럼 조차 없다면 일단 학자의 탈을 쓴 장사꾼(등록금 받아 쳐먹는)으로 봐야 합니다. 게다가 리영희 선생에 비하면 그의 주장은 평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 강정구 선생이 천막 강의를 하는 코 앞에서 이명박씨가 '청년의 꿈과 도전' 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900명의 학생들이 이명박씨의 특강이 끝난 후 자신들의 미니홈피에 올리기 위해 이명박씨를 애워싸고 디카촬영을 했다네요. 이명박씨가 미니홈피에 올리는 거냐고 학생들과 농을 주고 받고 있었을 때, 밖에서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이명박씨의 황제 테니스 특혜 등을 풍자한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강의 중 학생의 질문(기업이 잘 돼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처분은?)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정보기술산업 시대에서 기업이 잘 돼도 일자리가 안 늘어나는 것은 세계공통적인 현상이고 대한민국이 일자리를 만들려면 첨단분야에도 중점을 둬야 하지만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균형 발전하는 것도 필요하다"


모 이런 강의를 듣는 것도 선택의 자유이긴 합니다. 학생들은 강정구 선생의 '통일 전쟁론' 보다 첨단분야도 제조업도 서비스업도 잘되어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콧방귀 나오는 얘기가 더 유익한가 봅니다. 선택의 자유, 기회의 균등, 자신감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사회에 살아서 행복한 학생들... 선택은 자유지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혜안'은 자유롭게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명박씨 처럼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하는 어른의 얘기를 들으면 귀에서 꿀이 흐름니다. 사회의 모든 것을 파악한 것처럼 얘기하기 때문인데, 실은 그가 파악한 건 돈 밖에 없습니다. (돈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돈으로 다른 것들을 재단하려는 게 잘못된 것 입니다.)


그대들도 대한상공회의소 김상열 부회장 같은 얼빠진 어른이 "강 교수 수업 수강생은 취업 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고 해서 풀 죽었나요? 걱정 좀 되겠네요. 이명박씨나 김상열씨는 어른의 탈을 쓴 장사꾼 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회에 나오는 즉시 비정규직으로 탈바꿈시켜서 2년 단위로 처분할 테니까요. 그래야 이익이 남는 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택적 차별, 망집의 눈을 가진 여러분이 선택했는데...
2006/03/30 21:27 2006/03/30 21:27
DrunkenSTAR 이 작성.

자본교환적 존재

2006/03/29 13:02 / 생각
KTX 가 아무리 시간 혁명을 주도하고, 에어버스 A380 이 무려 555명에 달하는 손님을 한꺼번에 유럽과 미주로 실어 나른다 해도 다른 곳의 일은 다른 곳의 일이 됩니다. 적당한 이기심은 나한테, 내 집에서, 내 식구한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그 시공간이 어찌됐든 내일처럼 간주해주지는 않지요. 이기심을 적당히 접고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다 보면, 이렇게 바쁜 세상에 네 앞가림이나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목하 토익과 고시에 매달린 학생들, 염려는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2월27일 단의원이 울고불고 저항해도 어쩔수 없었던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시끄럽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요즘 학생들 조용합니다.조용한 걸 보면, 내일이 아니라는 도그마가 팽배한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한 대기업이 특정 학교 학생들 뽑지 않겠다(K대학교 던가요?)루머를 흘리면 요즘 학생들 금새 풀이 죽습니다.(기업이 학문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취업이 무섭긴 무섭나 봅니다. 그렇지요, 생존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 법안이야 말로 그대들의 생존과 직결하는 법적 장치인데도 내일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봅니다. 설마, 토익과 고시에 열심히 매달린 본인들이 비정규직은 되지 않을 거라 근거 없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초고용계약법에 대한 프랑스 학생들의 저항을 보며, 합리적 관리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투쟁적 관심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민주주의의 의식과 행동의 선두에는 실천지식인으로써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엔 기업논리를 강조하는 짝퉁 개혁진보세력들이 강철대오를 짜 놓았습니다. 그 대오에는 통계적 방식의 진보, 합법성을 가장한 기득권의 수성이 있을 뿐, 노동의 신성함은 없습니다.


이제 학생들은 의식을 배우지 않나 봅니다. 의식은 고전, 토익은 미래가 된 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천박한 무리들이 사회와 제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상업주의의 중금속이 이제 천천히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을 중독시키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한 성찰은 하지 않고 '돈이나 벌지'라며 체념을 하고 맙니다.


우리의 비정규직법안은 지금 학생들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취업준비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자신이 무엇인지,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사고해보지 않고 제도권으로 쓰며드는 것은 자본주의가 원하는 자본교환적 피의 수혈 입니다. 그것도 2년 단위로 쪼개서 말입니다. (정체성은 사회가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록 정체성과는 멀어집니다.)


그러한 비정규직법안이 날치기로 통과 되어도 전혀 불쾌함 없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성세대의 자발적 복종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썩었습니다. KTX 승무원의 파업으로 왜 내가 불편해야 하는지 푸념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대통령이 나서서 제도며 인프라를 왜곡해가며 인간성을 실추해 놓고 자신감 운운하는 반 칸트적인 선언을 일삼는 사회에서 특별히 깨우쳐야 하는 의식은 기대하지 못할지언정, 현안을 제대로 보는 교양 정도는 갖추고 나이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2006/03/29 13:02 2006/03/29 13:02
DrunkenSTAR 이 작성.

귀농파 노통

2006/03/23 20:07 / 생각
어릴적, 양곡리에 있던 고모댁 과수원의 밤은 종종 화살 같은 별똥별을 구경하기 좋았다. 한참을 별에 넋을 팔고 있으면 흐릿하던 눈이 더욱 또렷해져오면 깊이 잠겨 있던 탄식이 나올만큼 수많은 반딧불이 요정처럼 펄럭거리며 과수원의 루미나리에를 펼친다.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이 온통, 과수원의 밤에 모여 살았었다. 가까스로 탄식을 삼키고 원두막에 가만히 앉아 가지고간 일명 후레쉬를 켜고 흔들면 빛이 닿는데로 훌쩍훌쩍 뛰어 다니는 개구리를 쫓아 다니며 하하하 와와 소리치다가 빛을 닫고 몇번 눈을 깜박 거리고 나면 개구리는 잦아들고 밤의 아지랭이처럼 다시 피워 오르던 반딧불, 그 풍경 동백꽃처럼 붉은 아이의 심장에 고이 녹아 나쁜 짓 하지 않고 살기, 떳떳하게 살기에 조금씩 흘리며 살고자 한다.


"손녀를 위해서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촌의 자연과 공동체를 복원하고 싶다, 사랑스런 손녀를 불러들이는 방법은 고향을 올챙이나 개구리, 메뚜기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꾸며놓는 것밖에 없다."
- 2006년 3월23일 네티즌과의 대화에서


귀농파 노통,
두 농민 죽이고 FTA 로 짓밟은 논에 발 담그고 올챙이 잠 깨울 수 있나?
2006/03/23 20:07 2006/03/23 20:07
DrunkenSTAR 이 작성.

내가 한국보다는 대한민국으로 즐겨 불리우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은 것이 설령 공부를 못해 자꾸만 떨어지는 시험과 충분히 연관성이 있었지만, 가끔은 행운, 하지만 총체적으로 불행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도피 유학이 실상 당시의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비록 몇 번 없는, 없을, 설명 가능한 운명이 아닌가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살아야 겠다며 특별할 것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되면, 기필코 내 제도권의 삶을 극복하고자는 의지 때문에 스스로 헐거운 무장 운운하며 자발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남자가 36살이나 되었는데 늙으신 부모님 챙기는 것은 소홀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다, 시민단체다, 고래다, 달마다 기꺼이 호주머니를 열어주는 모습에 혀를 차는 낯익은 동시대인들에게 힘껏 적도의 열정 같은 주장을 하고픈 갈등의 반동에 휩싸인다.


통계를 빌어 한반도의 남쪽에서 가기 싫은 곳을 가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온 남자가 36살이 되면, 키 2개, 통장 2개, 보험 증서 2개가 생긴다는데 실은 나를 그 범주안에 넣는다면 티도 안나는 기부는 죄의식에 대한 면죄부일 수도 있고, 자본가의 동정어린 적선으로 본다한들 무엇이 다르다고 강성 외침을 지를 수 있는 적절한 논리 보다 변명의 외침을 펄럭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득권과 권력을 가진 자를 비판하는 일갈 현안의 통찰을 즐기기 시작하고, 사회와 역사에 책임감이 없고 도덕을 뽑아 까마귀 밥을 준 기득권자들과 인간이 그대로 공산품이 되는 곳에서 흠뻑 적셨던 정신에 감성의 진정성이 있었을까.


키도, 통장도, 보험도 없는 학생이었다면?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 이념과 행동이 곧 진정성이 아니었겠는가, 나는 분명 그 운명을 만회하려는 36살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도피는 학습부진아의 부적응이 아니라 안전한 이념과 예상된 강성에 대한 격리였고, 이 설명 가능한 운명이 내 상념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


현안의 통찰은 스포츠가 아니다. 즐기며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이유로 안타깝고 단호해야 한다. 태도에 대한 반동적 역설은 명랑, 즐거움이 아니라 진지, 숭고이어야 한다. 나도 모르던 강성과 감성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원했다면 단순히 자격을 얻기 위한 적빈한 자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 내 흑담즙질한 세계의 담즙질한 변화가 어떻게?의 요구였던 것은 무엇보다 명징하다.
아웃사이더의 경외적 매력에 빠져 주류 사회의 좌파적 시뮬라크르는 아니었는지, 비판 자체의 멋스러운 표상에 눈이 먼 패션주의에 매몰된 것은 아닌지 반성. 그리고 뜻깊은 사과가 필요한 때다.
2006/03/23 19:18 2006/03/23 19:18
DrunkenSTAR 이 작성.

2006/03/22 23:18 / 편지
무정부주의자인척 하던 그는 결국 어항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아가미를 가르고 피가 나왔다. 어느 뼈에 걸려 있었던 혈액인지 색깔이 푸르다.
관리비가 밀리고, 가스 사용료 독촉장이 쌓였다. 그, 인생의 고비는 고작 여분의 과태료 정도다. 그래서 그, 고민이 없다. 그의 정신이 고여 피가 푸르다.
피가 말라 뼈만 남아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추억을 더듬는다. 동냥하던 금붕어에게 추억을 팔아 버린 기억만 남아 있다. 그는 여전히 허기지고 문명 사용료를 내지 않은 채 노숙을 시작했다.
딱, 몇달만 그렇게 살아보면 그,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고 했다. 우울한 건 생존 자체에 관심이 없는 자들의 소유물이라고 했다. 그는 아침마다 어제 토해낸 푸른 피를 다시 마신다.
그, 더 이상 몸이 고여 노숙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과태료를 좀 물고 가야할 곳을 만들겠다 했다. 그, 그립고 보고 싶은 것에 편지를 쓴다. 혓바닥에 묻은 푸른 피를 몽당연필에 연신 찍어가며 다시 만드는 내일을 준비한다.
그,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푸른 피를 마시는 무정부주의자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2006/03/22 23:18 2006/03/22 23:18
DrunkenSTAR 이 작성.

승리의 불편함

2006/03/21 13:19 / 생활
이기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기는 것은 정체성의 재발견이며 자존심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 좋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말이 있다, 개뿔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기는 것은 누군가의 굴복을 요구하는 것, 그러하기 위함은 얼마나 잔인한가? 인간에게 정당한 굴복은 없다. 그러함을 포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현실론자들의 설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처에 존재한다.


일본을 이기는 것은 그것이 야구이던 축구이던지 간에 언제나 통쾌했다. 황금깃봉에 매달린 태극기가 마운드에 꽂혀 펄럭이기 전까지. (나만 불편했나...) 월드컵이 다가온다. 우리는 또 이기는 것에 열광하고 도처에 태극기로 잔치상을 차릴 예정이다. 평소에 야구며 축구며 관심 없다가도, 하물며 규칙이나 어떻게 진행되는지 조차 몰라도 태극기가 있고 '이기는 것' 이라면 기꺼이 광장에 붉은 토사물을 쏟아 낸다.(그것을 이명박이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그대들이 어떻게 이용당하고 있는지 포괄적으로 이해가 되려나)


국가 대항의 '이기는 것' 에만 열광한다. 주변 환경이 없어도 정신력만으로 이뤄온 것이 너무 많다. 응원만 하면 '이기는 것' 은 실제로 이기게 되어 온 것들이 너무 많다. 민족과 국가로 스포츠를 덮고 경쟁과 이기는 것만으로 사회의 약자와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김맨다. 현실론자들을 좀 따라가 준다고 치자, 그래서 이기는 것이 있다면 이기고 나서 헤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 좀 하는 건 어떻겠니?
2006/03/21 13:19 2006/03/21 13:19
DrunkenSTAR 이 작성.

자조

2006/03/16 23:56 / 생각
봄이다, 조금 비가 왔다. 개학한 초등학생들이 외투를 벗고 날씬해진 모양으로 저만치에서 걸어왔다. 푸릇푸릇한 보리 머리에 손을 댄 것 처럼 아이들의 머리가 손바닥에 까칠까칠 쓸린다. 아이들은 까닭없이 외간 손이 재머리에 닿아도 부르던 휘파람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들이 펄럭펄럭 멀리 뛰어간다. 그제서야 나도 아이들을 따라 멀리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경쾌하게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곧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피부가 벗겨 나갈 밍크처럼, 귀 가장자리가 죄떨어져 나간 개처럼 생명에 허둥대며 넋이 나간듯 발끝만 바라보았다.


역사를 만들고 조망하는 것도 인간의 몫, 역사가 제 역사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친일파가 그랬고, 고문과 독재의 위정자들이 역사에 반성하고 역사로 재평가된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니 새만금쯤이야 인천에서 인간인척 하며 서서히 개들을 죽이며 보상금에 침을 질질 흘리는 것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입속엔 말이 적고, 손이 비어 있어 자연에서 상상하고 경쾌하게 걸으며 청푸른 보리 머리를 쓰다듬던 생명의 취미는 점점 줄어 든다. 아~ 그 입속을 달달 구르던 보리의 생명이 있었다. 자연의 경쾌함과 더불어 사는 것을 포기하고 역사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 사이 새만금엔 보리며, 아이들은 사라지고 반도체 공장과 미군 활주로가 놓여지고 철조망이 쳐질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다.


새만금을 위한 시

2006/03/16 23:56 2006/03/16 23:56
DrunkenSTAR 이 작성.

성별 없는 미소

2006/03/14 18:34 / 사진
봄이 바람의 언덕을 넘었건만,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 그대 처럼 봄꽃 같은 미소를 낼 수 있는 것인가?
파타야에서 소외와 멸시을 넘어 온 짠한 봄을 보았다. 한 세상, 우리가 머무는 모양이 고작 여성 아니면 남성인데, 되어야 하는 것 되지 못하던 그대는 얼마나 추웠던가. 비록 지금은 양지의 무대에서 성가신 호기심이 열광이 되었다가 이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시들어 버리면, 그대로 그 외로움이 여성이면 어떻고 남성이면 어떠랴, 누구라도 곁에 있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내 온기로 너를 품어 여직 내가 살아 있는 줄 알아, 가슴 켠을 열어보니 내 온기는 심장 가장자리에 겨우 보이는 작은 불씨, 내 가슴 덮히기에도 모자랐다. 그동안 너는 얼마나 추웠는가...





[태국, 파타야, 알카자쇼극장]
2006/03/14 18:34 2006/03/14 18:34
DrunkenSTAR 이 작성.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게이 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라고 말했다. 애니스와 잭의 러브 스토리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성급하지만, 게이의 사랑이라 하면 대번에 동물적이거나 퇴폐로 이어 부치는 것과 다른 사랑을 나눈다. 영화가 카메라의 시선으로 말 한다면, 이 영화의 화자는 애니스도 잭도 아닌, 브로크백 마운틴 그 자체이다. 인간과 인간의 감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결여되어 있을 뿐,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감정의 참된 의미를 찬찬히 그리고 관조적인 만년설로 응시한다.


'게이의 사랑은 금기' 라는 담론에서 무엇으로 부터 인지, 누구로 부터 인지 모를 금기는 영 개운치 않다. 게다가, 게이의 금기에 대해 뿌리 깊은 담론은 인정하면서 인간 감정의 보편성에도 동시에 감동하는 것은 영 모를 일이다.(이점에서 이안 감독이 '브로크백 마운틴은 게이의 러브 스토리다' 고 명확히 선언해주기를 바랬다. 사람들은 아직 게이의 사회성과 사랑의 감정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가 제목은 거반 게이성임에도 권력에 관한 내용이라며 한발 물러서서 평가 받기를 바라는 속내와 같을 테지만.)


사랑이라는 맨탈을 배제하고 육체적이며 직접적인 정체성의 모양으로 보자면, 남성의 모습으로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적 사랑과 남성이었다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여성의 모습을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처럼 보인다. 대상이 어떤 행위를 하는 익숙함에 의한다면 남성이 남성과 나누는 육체의 정열적인 감각은 금기의 테두리에서 변태와 모멸로 취급 받는다. 하지만, 남성이었으나 현재는 여성의 모양을 한 남성과 남성의 그것은 마땅치는 않지만, 변태까지는 가지 않는다. 경험론적인 상상력은 이렇게 취약한 변별력을 가진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남성의 육체 행위를 보았단 말인가? 단지, 자신이 이성과 가진 육체적 사랑 행위, 그 경험을 기초로 한 동성과의 행위, 그에 따라 각자 다른 수위로 가지고 있는 비위의 세기만으로 그 사랑의 의미를 고작 변태며 모멸감으로 몰아 가지 않았던가? 알 수 없다, 그러고도 왕의 남자에 자그마치 천이백만명이 몰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He was a friend of mine 을 들으며 거부감은 커녕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쯤에서, 멜로에 감격도 하지 말란 말인가? 라 말할 수 있다. 감격할 수 있다, 그러나 감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하다고 생각했던 게이의 사랑이 실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아름다운 초원 뿐만 아니라, 동시상영 극장 화장실에서도 그 사랑은 존재한다.
2006/03/13 22:12 2006/03/13 22:12
DrunkenSTAR 이 작성.

기득권을 쟁취한 위정자들은 대중의 심리를 자신의 야심에 맞게 통제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대중의 심리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믿는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전통적이며 규범적인 가치관의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중의 속성은 위정자들의 좋은 표적이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대부분 옮다는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실은 위정자의 야심에 의한 재단이거나, 정치적 한계성을 드러낸 대중 심리의 신화성이라는 점은 결코 파격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황우석을 보았고, 지난날 전두환을 보았다. 게다가 도덕적 위험 인물로써의 최연희까지.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맹목적 추종자들의 해로움을 본다.


성에 관한 도덕적 인식에 있어서 대중들은 파쇼가 파악한 대중의 일반 속성을 그대도 답습하고 있다. 성의 인격에서 술의 인격으로 본질을 흐리더니, 과업으로 도덕을 덮고 사람과 나라를 동일 시 하는 전체주의의 망령을 무덤에서 파 낸다. 같은 여성이라도 다른 정치적 위치에서 도덕을 바라본다. 진보세력의 문제가 내부에 있듯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최대의 해로움이 도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관이 정치성에 의해 다른 판단을 하게 이른다면 여성의 최대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수도 있다.


대중들의 집단 인격이 불분명하더라도 대중이 취하는 관심이나 무관심, 추종이나 반동에는 책임이 있어야 한다. 그 책임의 수위는 공인에게 기대되는 수위와 결코 낮아서는 안된다. 책임이 낮을 수록 대중의 다수결은 신화성에 근접하게 되어 있고, 신화는 위정자들의 입맛에 맞게 파쇼로 재단된다. 대중은 몇몇 야심찬 기득권력자들에 의해 심리를 파악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정리된다.
사건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태도는 담론의 가치조차 없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대중의 규범적 다수결이다. 책임이 떨어진 대중에게 깊은 통찰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므로 대중은 철저히 어떤 야심가가 펼치는 레토릭에 편 갈라진다. 그리고는 상대적으로 다수가 집결한 편에 서서 웅성거리는 립싱크에 열중한다. 그 편의 가장 뒷줄에 황우석, 전두환, 최연희가 졸졸 따라 붙어 있다.
2006/03/10 15:43 2006/03/10 15:43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