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몸

2006/02/27 23:45 / 생활
며칠 전부터 엄지와 검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목덜미에서 팽팽한 끈이 검지를 잡아 당기고 엄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는 3초 가량 정지하여 후크 선장의 오른손을 오마주 한다. 튕기 듯 끈이 풀리면 팔과 연결된 어깨는 매운 손바닥이 치고 나간 것 처럼 화끈거린다.
몸의 일부는 유해가 증명된 디지털의 파동에 억류되어 결국 어느 꼭지점부터 선지피의 동력을 끊어 버리기 시작했다. 내 몸은 알록달록 움직이는 이퀄라이저가 되어 있는데 입김이 살아 있는 말의 아날로그가 맥박이 멈춰버린 막대 하나를 다시 뛰게 하지는 못하리라...


조각난 몸을 억지로 맞추려 하지 말자,
너무 오래 살려고 욕심 내지 않으면, 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보는데 까칠해지지 않으리...
2006/02/27 23:45 2006/02/27 23:45
DrunkenSTAR 이 작성.

사사로움

2006/02/23 17:01 / 생활
햇수로 5년전에 무버블타입을 설치하면서 블로그를 하기 시작했으니, 그때 썼던 글들이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아카이브가 되었을 터였다. 무버블에서 피머신으로 옮기면서, 사랑에 치였고 역사는 잊혀지기 쉬운 곳으로 입양되었다. 그 역사에 아까운 것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나 사랑하고 이별하며 생겼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감정들이 그것이었다. 솔직히 그 보다 사랑하기 위해 따로 열심이었던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미루고 공부하고 정리해갔었던 수많은 업무 모델과 정신과학적인 모형들, 안국동을 쏘다니다가 문인들과 어울려 오랜 술에 쩔어 새벽을 맞게되면, 되도 않는 시를 낭송하거나 등단하겠다는 지망생들과 어울려 문파를 조직했던 일, 미술학원 두달 다닌 미천한 예술 경력에도 불구하고 집착 성향마저 보였던 서양 미술사 등이 있다.(생각해보니 이별하고 그리움 때문에 생긴 취미도 있다. 사진)
사랑해서 보신탕 맛을 알게 되었다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처럼,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비록 입양되어 그리울 수 밖에 없지만, 술이 깬 아침에 기억은 나지 않아도 몸이 지난 밤 한 일을 느끼는 것처럼 감정의 아카이브가 되어 사랑을 하지 않는 지금에도 삶의 온전한 일부가 되어 있다. 때때로 그 영위의 것, 예전에는 없었는데 사랑하다가 생긴 일부가 미래의 나를 가르키며 '그것이 되라' 던가, '그것을 해라' 던가 불쑥불쑥 얘기하는 통에 당황할 때가 있다. 그저 존재자로 낯설게 하지 않고, 나의 존재로써 내 적잖은 삶이 살아지는 동안 이탈하지 않고 꼭 안겨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갈등은 애초에 안착의 성질이 없는 것 같다.
안착은 차재하고 갈등은 말굽 자석처럼 완전히 다른 갈등을 간단히 끌어와 부쳐 버리는 성질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를 사랑하게 되어 현재 온전한 삶에서 갈등이 된 것들이 있다면, 정치시각과 언어관점은 이제 나서 한창 걸음마를 하는 갈등이다.
정치시각에 변화가 온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해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살아야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따로 따로 생각했던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꺼번에 고민하게 되었고, 따로 때어 냈을 때 무엇이 현상의 무엇으로 국한되었다면, 같이 고민했을 때의 무엇은 철학의 무엇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자연히 내 생각을 표출하는 이런 공간은 어떤 철학인가로 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행위가 한정되어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직한 표출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다시 한정하기 때문에 일단 표출하는 이런 공간에 생각을 배설하고 나면 가벼운 목로의 주점에서도 자유로운 행위 이전에 생각이 절제되고 절제된 만큼 이전에 분방했던 행위가 제한되어 갑갑함을 느낄때도 있다. 그래서 아직 성찰이 덜 된 탓이라, 아예 끝까지 술을 마셔버리고 태초의 인간의 되어 버리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몸은 갑갑해도 생각은 자유로워서 그냥 친구여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 웃음이 되어 버리던 이야기도 토론이 되곤 한다. 친구가 화장실이라도 가고 나면 왜 아직도 저런 비인권적이고 수구적이면서 투철한 자본주의적 생각만으로 제단을 할까? 앞으로 대화가 안되겠거니 하곤 했었다. 하지만, 좌파건 우파건 그들끼리 이념이 다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듯, 실은 이념시각 이전에 정치시각은 품위와 태도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깨닿는다. 그러고 보니 대화가 안통하던 친구가 있어 토론이 되고 바람 잘 날이 없기에 술자리도 재미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른, 즉 완전히 다른 시각이 존재하는 관계도 태도가 서로 공유된다면 마찬가지 일 것 같아 보인다.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시각이 달라서 어느 한쪽은 매장되어야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시각도 마찬가지지만, 언어관점은 특히나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긴 것이 아닌, 이제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선언하고 나선 대표격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컨설팅을 하면서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와 어감의 차이가 실제 살아온 삶과 생각의 바로미터가 되고, 더군다나 미래 소실점의 위치가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인 사용법이 아니라 정치시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유추되는 언어감정과, 그 언어가 만들어진 본래의 관점들을 조망해보는 의도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는 곧바로 갈등이 된다. 언어관점을 새로 바라보자니 시덥지 않은 것도 취향에 맞지 않은데다가, 그것을 따르자니 상당한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겠음을 많이 느끼게 된다. 그것이 미학이던, 경영학이든, 정치학이든지 간에, 언어를 통해 현상, 현안을 조망하는 다양한 관점의 기술은 지금 시작한다고 해서 나중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기원이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생겨난 것이므로 나의 오롯한 조망은 단지 꿈이거나 상상일수도 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필연적인 것 보다 대체로 우연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우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 날 수 있는 일이고, 아니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 하는 것.
언어의 조망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다른 상상을 기술하고픈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욕심에서 시작했기에 여러 사람이 같이 꿀 필요는 없다. 나의 사사로움을 읽고 다른 꿈을 꾸어도 그로써 멋지고, 아름다울 테니까.
2006/02/23 17:01 2006/02/23 17:01
DrunkenSTAR 이 작성.

이방호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모든 세계 국민들은 두 나라를 섬긴다고 했다지요, 그것은 모국과 미국이랍니다. 뉴라이트가 라이트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전향좌파들의 연구연합으로 진보의 옆구리를 찌르겠거니 내심 경계했지만, 어제 이방호씨의 발언을 듣고 보니 그럴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네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수구기득찬미세력들이 꼬불쳐둔 장농캐쉬를 참여정부의 증세정책이 뒤지는 것은 아닌가 화들짝 거리던 한나라 당입니다. 서민들도 그 증세가 싫습니다. 그런데... 한곳에 세금 내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두 나라에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까? 두 나라 섬기는 것은 두 나라에 다 세금 내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방호씨는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봉건주의자인가요? 나중엔 마음속으로 대통령은 임금, 나는 백성, 시키지 않아도 납짝 기는 천민사상에 빗대어 마음속에만 있으면 된다는 것으로 갈음할 예정이신가요?


이거 다시 생각해보니, 세계 국민이 마음속에 미국을 섬기고 세금도 낼 계획인 것 같은데 이 참에 잘 됐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세계 국민이 뽑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좀 뉴라이트적으로 미국과 연이 있으신 이방호씨께서 잘 말씀해주시면 미국을 마음속에 섬기는 분으로써 미국이 안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요.


참여정부가 FTA 한다고 굼실거리며 야금야금 스크린쿼터며, 쌀이며 넘겨주면서 비자면제나 따오는 마당에 그것도 모자라서 마음도 미국에 줘야 한다니, 그럼 왜 마음속에 있는 미국을 미국이라 부르는, 당신이 얘기하는 세계 국민은, 미국을 미국이라 부르는데, 그 임금(대통령)을 뽑는 일에 참여 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서러운 세계 국민!
이방호씨! 세계 국민이 무슨 홍길동 입니까?
2006/02/21 12:13 2006/02/21 12:13
DrunkenSTAR 이 작성.

Web 2.0 의 체제의심

2006/02/15 22:03 /
요즘 IT 에서 Web 2.0 이 뜨거운 감자다. 벌써, 개념화 단계에서 실천적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전에 이 개념을 들었을 때, '트랜드에 목맨 사대주의 노드(Node) 들의 선동' 쯤으로 일갈해버렸다가, 두 달 전에 시즌 첫 철야보딩을 가던 중 졸음을 쫓기 위해 주고 받았던 얘기에서 다시 내 생각의 범주로 쏜살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예상은 하였으나 보딩메이트는 web 2.0 의 신봉자였다. 대번에 김중태의 시만택 웹 을 추천했고 지난 주 용산 회집에서 건내 받았지만,(고맙습니다) 이미 그 두달의 시간동안 web 2.0 에 대해 꽤 공부가 되어 있었다. 공부는 바로 의식화 되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빠진 나와 신봉자는 만날 때마다 web 2.0 아니면 참여연대식 토론(제주도에서 참여연대 간사님들과 보낸 이틀밤동안 터득한 방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을 즐기게 되었다. 열뗬다기 보다, 즐겼다는 게 맞다. 그랬기에 파무침 같은 몸을 이끌고 남대문 순대국집이나 용산 회집을 기웃거릴 수 있었을 테니까.


방금 전에도 신봉자는 내일 월차를 내고 web 2.0 conference 에 같이 가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다. 언감생심, 지방에서 클라이언트의 위세와 나의 자존심을 줄타기 하고 있는 新왕의 남자에게 있어서 몸의 위치는 세치줄을 벗어 날 수 없었다.(미안합니다) 신봉자보다 먼저 간 제자들은 개념과 토론의 단계에서 실체성으로 들어난 web 2.0 의 열기에 긴장 됐는지 현장 실황을 해왔고, 그대로 나에게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일단, 팀 오라일리가 등장하는 다음달, 이 열기는 보일러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단번에 열기가 아닌 현상이 될 조짐이다.


Web 2.0 을 간소적확하게 접하고 싶다면 이정환 닷컴의 관련 포스트를 무료로 읽어 보길 바란다.


고로, 여기서 국민의 9.9할이 모르는 web 2.0 에 대해서, 9.9할에 포함되는 사람으로써 되던 안되던 기술 논리를 펼 생각이 없다. 열기가 있는 영장류 속에 냉담한 파충류로 사는 것을 즐겼던 속사정을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지만, 열기에 대한 경계는 확실하다. 열기를 즐기는 혈액일 수록, 어떤 현안에서도 무임승차에 익숙해질테고 그때마다 쌓인 촛농은 주체를 다른 것과 다르지 않게 일반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행스러운 건 web 2.0 이 다루는 소재가 독과점적인 MS 나 네이버의 폐쇄회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한 테크놀로지의 플랫폼에서 사용자의 편의성을 미끼로 던지는 윈도우가 아니라 것, 확장성 브라우저 지원, 어느 언어도 탐색 가능한 유니코드, 사용자 경험의 확대를 위한 AJAX 등이 기동되어 인간 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의 창조를 돕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플랫폼이 아니라(혹자는 web 2.0 이 플랫폼의 변화라고 하는데, 귀에 걸던걸 코에 걸었다고 플랫폼이 달라지진 않는다.)인간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 이란데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데, 정보의 분류에 참여하고 해석하는데, 마지막으로 정보를 생산해내는데 협력적이냐는 물음에 긍정적이어야 성립되는 메카니즘 되겠다. 컨퍼런스에 스피커나 참석자는 web 2.0의 메카니즘을 더 이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실체로 접근하고자는 사람들이다.(그래서 나는 신봉자에게 비즈니스적으로 "누가 먼저 실천하는가" 만 남았음을 설했다.)


잠시, web 2.0 의 개념적 원칙인 참여구조가 가져오는 네트워크 효과, 체계질서의 혁신과 분산되고 독립된 개발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짜인 사이트, 콘텐츠 신디케이션에 의해 가능해지는 가벼운 사업모델, 소프트웨어 채택 순환의 종결(영원한 베타), 긴꼬리 효과(Long Tail) 등에 기대어 현실의 열기와 더불어 생각해볼 때 역시 대한민국이란 씁쓸한 단정은 허술하지 않다.

다시, 컨퍼런스에서.. 참여구조와 체계질서의 혁신에 열기를 보여준 0.5할의 참여자들에게 묻는다, 컨퍼런스 스피커가 과연 이 참여와 혁신에 적합한지 의문은 들지 않았는가?, web 2.0 을 핑계 삼아 성장 동력으로 삼기에 충분한 정보 권력자들이 모여 열기를 팽창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싸이좋게 살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 SK, 내 정보는 내 정보 니 정보도 내 정보인 네이버가 web 2.0 을 얘기하고 그에 열광한다?
어쩐지 이 열기는 그들이 앞으로 분명히 펼칠 한국형 web 2.0 의 출발이며 독점적 정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전 포석 쯤으로 보인다. 나는 그 열기에서 2년전 노무현 정권이 보여준 정보 통합의 마인드, NEIS 의 사상을 보게 된다.


인간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질 어떤 메카니즘이 체제의 혁신에서 비롯될 것이란 희망적인 메시지는 단숨에 한국형 체제의 종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정보 통합을 통한 권력의 유지를 선호하는 실용진보의 씁쓸함을 느낀다.(정보의 통합은 정보의 권력을 낳는다. 왜냐하면 통합은 독점을 의미하고 독점속에 나누어야 생기는 기본권은 줄어 들거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참여와 혁신을 통한 정보의 질적 향상도 애초에 어떤 2.0 속에서도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보의 질적 향상은 정보의 양적 보편성에 대한 반기이지만, 나아가 정보 복지 즉, 나누는 정보로 이어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특히, 정보를 이합집산하고 그를 통해 자본 계정을 만들어야 하는 네이버 같은 집단은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체험적으로 구글 애드센스를 설치해보았으나, 그로 인해 구글이 web 2.0 의 모범생인지, 수혜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게다가 의심까지...)
한국형 web 2.0 은 우연에 기댄 낮은 정치 수준에서 원칙없는 모호성이 가미 되어 체제 2.0 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2006/02/15 22:03 2006/02/15 22:03
DrunkenSTAR 이 작성.

점.잖다

2006/02/14 22:49 / 분류없음
칸트의 형식미학은 몬드리안의 대상의 본질적 구성과 칸딘스키의 대상의 분해의 유희를 낳았다.
하지만, 오늘 서울은 아름다움의 미학을 견적화시켜 추정하는 계량주의 미학이 창궐하고 있다. 서울은 아름다움을 대하는 순간 쪼개고 분류하여 아름다움에 투입한 성분과 각도를 분석하고 곧바로 각 분류별로 비교 가능한 견적을 계산하는 미학의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 시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 것이 아름답고 그래서 더 젊어져야만 하는 필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울은 햄릿 처럼 껍질을 깨고 자기를 포기하여 다른 것으로 변화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서울은 더 젊은 피부에 열광하고, 더 젊은 피를 숭배한다.
따라서, 서울은 진보적이다.
따라서, 규범적으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 생김새를 부정한다. 철학과 관계하고 있는 어떠한 진리에 대해, 그에 대한 지배적이고 특정한 관념에 투쟁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을 담은 형식이 우연적이든, 필연적이든 변하거나 깨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울에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범죄가 되지 않지만, 젊지 않으면 범죄가 된다.


젊은 서울은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된 어른이 없다. 황아무개씨는 큰 사기일 수록 짜릿함을, 조아무개씨는 전쟁으로써의 쏙아냄의 미학을, 전아무개씨는 파쇼와 고문의 함수관계에 의한 현실적용의 가능성을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젊고 변화를 추구하는 조선일보 무리가 싱싱하게 전달해준다.
어찌나 싱싱한지, 형식을 바꾸지 않아도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안하고 애도 낳지 않는다. 서울은 계속 젊고, 형식적으로 범죄가 점점 줄어 든다.


젊고 형식적으로 젊어지면서, 젊지 아니한 사람이 줄어든다. 대신에 나이로 젊지 아니한데, 나이가 있어서 허둥지둥 소리를 지르고 논리가 없어서 윽박을 내지르고 원칙이 없어서 손찌검을 하는 늙은 사람들만 넘쳐난다. 하지만, 서울은 이렇게 늙은 사람을 범죄로 다루지 않고 도리어 관대해진다. 규범적으로 늙은 것은 보호해야만 한다는 공허한 예의가 껑충 뛰어 올라 두꺼비처럼 자리 잡는다. 서울에선 형식적으로 젊었다가 급격히 늙어야, 범죄가 되지 않고 예의로 보호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젊지 않아, 점.잖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기회, 인간을 존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 서울은 존경스러운 점.잖다 로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인가?



[점.잖다] : '몸가짐이 가볍거나 까불지 않고 례절있게 듬직하고 의젓하다. [조선말대백과사전 : 점.잖다(점지 않다, 점다 : 젊다의 옛말, 점지 않다 : 점지 아니하다]
2006/02/14 22:49 2006/02/14 22:49
DrunkenSTAR 이 작성.

쓸데.없다

2006/02/13 18:36 / 분류없음
언어의 취지에서 모든 철학적 대입을 제하고 나면, 그것이 생겨 났을 때, '어떤 필요'에 의한 기원적 쓰임새만이 남게 된다. 이런 USE 에 대한 언어의 관점은 모든 단어의 쓰임새를 한정하게 되는데, 그 한정은 단어에 있지 않고 상황에 근거한다. 도구가 환경에 한정되 듯, 모든 언어도 상황에 한정되고, 상황은 적시성과 적소성을 포함하고 있다.


언어가 그리고 그 쓰임새가 외부의 영향과 상황에 의해 한정되고는 있지만, 실제로 언어는 그 쓰임으로 인해 그 영향과 상황을 제한하기도 하고 자유를 제공하기도 한다. KAIST Concordance Program 을 통해 단어 색인의 용례를 검색해보면 '쓸데.없다' 는 3천가지가 넘는 용례를 가지고 있다. 쓸데. 없다며 외부 영향과 상황을 제한하지만, 그 자체는 구체적이며 다양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


쓸.의 쓰임새 기능과 데.의 적소성은 있다. 없다. 로 외부의 영향을 중대한 상황으로 반전시킨다. 있다. 없다 라는 극적인 주체성의 표현이 필요와 합쳐 졌을 때 현실은 드라마가 된다.


쓸데가 있음과 없음의 판단은, 도구의 쓰임새를 판단하는 전문가 양성의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에서 대체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이 된다. 무엇의 필요와 사용처는 쓸데가 있음으로 해서 자본적 가치와 이동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쓸데. 있다. 가 많을 수록 자본의 탄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자본주의의 성격이 쓸데. 로 판단할 수 있는 고전적인 도구의 개념을 넘어서 쓸데. 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자본적 가치와 이동의 범위안에 넣으려 하고 있다. 고전에 대한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반동을 신자유주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볼 수 있다.


쓸데.없다 는 자본가치의 쓸데.없음, 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데.없다를 자본으로 규정했을 경우, 생산성을 떨어 뜨리는 감정과 철학의 요소들은 그야말로 이념적 쓸데.없다 로 분류되어 인간의 수고, 염려, 배려의 아름다움은 쓸데.있다 에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상황에 한정되는 언어의 속성 상 쓸데.없다 로 분류된 진정 쓸데.있다 의 세계는 수요와 공급의 그래프에 지배되어 내재적 가치마저 잃어 버릴 것이다. 그때 세상은 황혼의 바닷가 백사장을 물컹물컹 걸어 다니며 자연과 발가락이 나누는 사랑은 쓸데.없다 가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나쁜 버릇은 모든 쓸데. 없다 를 쓸데. 있다 로 바꿔 부르려 시도한다는데 있다.
2006/02/13 18:36 2006/02/13 18:36
DrunkenSTAR 이 작성.

소통의 개념

2006/02/10 14:06 /
6시 동대구발, 서울행 KTX, 8시에 시작할 회의 전까지 그나마 선잠이라도 자려던 요량은 여지 없이 깨지고 대전역까지 쉴새 없이 전화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직업이란 태두리에서 가치의 노동이 이루어 지기 위해 여러 필요 요소를 들었을 때, '커뮤니케이션 하다'(이하, 소통하다) 라는 행위가 있다. 중요한 것으로 따지자면, 이보다 더 한게 없다. 지식이나 기술은 커뮤니케이션의 부수적 촉진이라 봐야 할 정도이다. 하지만, 흔히 소통하다 라는 동사절를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유사 동사절이 있다. 그것은 '말하다' 이다.


직업에 있어서 지식을 말하고 기술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소통 하느냐에 따라 리더쉽과 태도로 연결된다. 그래서 소통하다라는 것은 감관을 이용하는 유용함의 장르가 아니라, ~에 의한 설명의 장르, 그 설명은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내가 이룬 세계의 장르가 대상이 된다. 내가 이룬 세계의 장르는 지식과 기술, 사상과 이념, 표정과 자세, 억양과 눈빛 등 현재의 나를 이룬 과정의 총체가 된다. 의지와 표상이 다른 세계가 순간적으로 소통을 이룰 때, 그 총체는 오로지 나를 보여주며 소통을 하나의 사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냥 말하다와 소통하다는 테마가 틀려야 하고, 소통의 대상(대체로 사람)에 대해 책임과 경외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그냥 말하다 만으로는 어떠한 공유도 진정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타인의 세계를 엿보기 위함이 아니라 내 세계로의 초대임을 잊었을 때, 소통하기는 말하기가 되고 그냥 말하기는 쉽게 세계간에 충돌을 야기 시킨다. 그러므로 힘들고, 우울증(센치의 우울과 다른 우울)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아직 그의 세계가 누구를 초대할 만큼 형식이 없거나, 애초에 품위, 즉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통해야 될 시점에, 내용 없이 그냥 말하려던 사람이 있어 다시 원래 자리에서 소통의 테마로 돌리기 위해서는 대략 1시간, 피곤과의 투쟁, 저녁 식사 정도는 가볍게 스킵해줘야 한다. 사회적으로 그 책임 때문에 나에게 노동을 허락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그나마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것 쯤은 서글픔과 거리가 멀다.
2006/02/10 14:06 2006/02/10 14:06
DrunkenSTAR 이 작성.

어제, 충남대 정심화 국제 문화 회관에서 뉴라이트 대전연합 창립식이 열렸다지요, 여기서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화의 독이었다고 했다지요, 오른쪽에 계신 분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지요. 왼쪽이 뭉치기만 하면, 평양방송에서 지시한 혁명노선 활동이란 것이지요. 2002년도에 그 붉은 색의 장관은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빨간 악마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는 뉴라이트의 견해도 있습니다만...
뉴라이트 대전 연합 창립식에서 대전충청 지역은 특히, 모범적인 뉴라이트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면서요, 그래서 양현수 충남대 총장은 세계화에 발맞춰 정심화 국제 문화 회관에서 김밥 할머니의 이름인 정심화를 그토록 빼고 싶었나 봅니다.
뉴라이트식 체면은 간판에서 비롯됨을 세계 만방에 떨쳐야 세계화되는줄 아는 여전한 수구시네요(마음이 촌스러운건 그들의 양심에선 용서가 되는가 봅니다), 인간은 아무리 뉴라이트라도 세계인은 안되는가 봅니다.
뉴는 부쳤는데, 주사파에서 전향 주사파로 신묘한 간판 바꿔달기, 세계화에 맞춘 우파의 라이트 그리고 뭐가 있는지?
사상의 연구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김밥 할머니가 세상을 말아 모은 가치를 다시 세상에 펼치셨던 품성은 NEW 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
2006/02/09 14:07 2006/02/09 14:07
DrunkenSTAR 이 작성.

그래서, 식구??

2006/02/09 00:25 / 생각
너무 간편한데요...
얄미운게 아니라, 귀찮은 것 같은데요...


우리 식구는 누구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귀찮은데, 식구니까 왜, 참여 안하냐며 윽박을 지르기 시작합니다.(1인 시위 피켓처럼, 가벼운데, 무겁습니다, 제길 스타라서...)


장동건이 나갈때, 안 나갔으니... 우리(별로 그렇고, 그렇게 증세 같은거 받아 들이며 소주 마시는 사람들)는 꽤나 귀찮았나 봅니다.


남에게 넘기면 안되죠...(젠장, 그건 식구가 아니어도 알아야 하는데)


얄미워도 귀찮아도...


여하간, 7년전이나, 8년전이나... 지금이나...


장동건은 장동건인데, 우리는 그대로 우리인가요?


근데 식구라...?


2006/02/09 00:25 2006/02/09 00:25
DrunkenSTAR 이 작성.

봄이 온다.

2006/02/07 22:59 / 생활
아직, 끝도 없이 어딜 가고 싶거나, 훌훌 털고 엔진을 돌려야 겠다는 충동은 일지 않아,
춘곤증처럼 밀려드는 텍스트의 파토스를 줄세우고 싶은 소름만이 돋을 뿐이야,
술을 마시다가 안주를 몇점 집어 먹은 케케한 입냄새로 내 얘기, 남 얘기, 세상 얘기 하던 것도 양은 주전자 속에 담긴 물일 뿐이야, 서서히 덮혀져서 흔적도 없이 연기로 흐트러지고 말지,
바람이 불어와 이런 저런 술 얘기가 담긴 연기를 휙 쓸어가 버리고, 걱정스런 별들이 침침히 박혀 있는 검푸른 융단으로 아틀라스의 땀이 떨어졌어,

소원이 사라진 실망스러운 도시에서 심장 약한 현대인들에게 별똥별은 떨어졌어, 춘분이 지나면 이제 그것도 그만 그치고 말지,
황사때가 그것마저 덮어버리고 나면 훅훅 컴퓨터의 팬에서 불어오는 인공 바람을 들이키며 꽃가루 증후군에 숨결은 만진창이가 되겠지,


봄은 푸른 소생의 길목에서 염세의 끝을 잡고 당당히 서있을 테지,


인생이 그렇듯,


봄날이 가면 그 뿐,


관념 텍스트만 질펀하게 남도의 미친년처럼 육자배기를 하는 것으로 이 봄을 보내려고 하니... 시인처럼 봄이 오는 어느 밤에 심야영화라도 봐야 할 것 같아,

내 눈은 사구 포구에 내 놓은 고등어의 눈,
심연을 바라보던 활기는 사라지고 겨우내 사나운 가난을 견뎌내지 못했지, 분실한 사랑은 지하철에서 찾을 수 없었어,

내 눈은 포구로 가야 해, 포구로... 봄이 오는 포구로...


아직 심연은, 작은 포구에서 시작하니까,


이제 봄이 온다, 앞으로 35번, 잘하면 40번 정도 어김없을 봄이 온다.
2006/02/07 22:59 2006/02/07 22:59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