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고집의 똥을 빼더라도 고집은 여전히 허튼 짓처럼 선입관을 가지게 한다. 반을 되새김질한 나이 동안 고집은 그 자체가 선입관을 가지게 할 만큼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로의 주점에서 두부 김치를 고집하는, 매번 막히는 올림픽 대로를 고집하는 경험은 충분한 선입관이다. 고집은 상황에 따라 허튼의 똥이 붙지만, 그 자체로 경험에 의한 판단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경험에 의한 판단은 나이가 주는 지혜와도 같아서 고집이 아닌 판단은 적절함이란 미래가치를 부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상황 by 상황으로 고집이란 반 지혜로, 되새김질로 결과하게 된다. 똥의 허튼은 얼마나 안해도 되고, 할 필요 없는, 누구나 하는 경험을 했는가에 대한 똥이 되겠다. 똥은 누구나 싸니까...
담론의 기저, 신념은 전적인 경험이 아니다. 뚜렷한 직접 경험 보다는 간접 경험에 의한 세계관의 형성이다. 따라서 신념이란 자체는 왠지 멋져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담론의 기저가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누구나, 라는 전제로의 고집과 희소한, 신념이라는 차이도 한몫 한다. 신념이 있다는 것은 어떤 담론이 전개될 때 어떤 기저에 의해서 전개되는 논리 또는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신념은 위험하다. 기저가 바뀌면 담론이 바뀌기 때문에 신념으로써의 기저는 바뀌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뀌면, 바로 모든 것이 허튼이 된다. 따라서 신념은 아무렇게나 가지는 것도 아니고, 선술집에서 꼬부랑꼬부랑 지저귀는 것도 아니다. 신념이 나타날때는 올림픽 대로를 탈때가 아니라, 어떤 담론에 부딛쳤을 때다.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말할 때,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질때, 신념은 찬란하게 빛난다. 하지만, 그 신념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에게 강요된 위험에 대한 극복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어떤 기저인가에 따라서 그 가치도 달라지게 된다.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 오리발 내밀기 신념? 이라면, 정말 할 말 없다.
거대 조직은 개인에게 부당한 결정을 할때가 있다. 또는 작은 조직에 부당한 조치를 취할 경우도 있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 말했다고 그로 인해 일부 상사가 감정을 다쳤다고 해서 그 행위가 잘못됐다고 시인할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인지 시켜줬다는 것에 감정을 다쳤다면 이미 그 사람은 신념과 고집이 대단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중이거나 이루어진 사람이다. 따로 만나 세계를 논하는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극복의 대상이 된다.
신념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집과 신념의 교집합 상태이고, 신념으로 내세우는 기저가 역시 대부분 허튼 것들 뿐이다. 많이 성찰해보아야 할 생의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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