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에 대해서...

2005/06/21 22:07 / 생활
반은 되새김질하고 반은 모르는 나이가 되어 버리고 나니, 고집과 신념의 차이가 무진 모호해진다. 나이라는 것과 고집이라는 것의 상관은 똥고집에서 드러난다. 똥을 허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면 모르는 반의 나이는 관념적으로 허튼 것을 계속 해오던 이전의 반을 되새김질을 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문제는 허튼 이라는 것에 있다. 해서 쓸모 없는 짓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짓이다! 라는 명확한 행위 정의는 없다. 허튼이 비교적 불온한 단어가 되는 것은 허튼의 허와는 무관하게 그 행위가 상황에 따라서 똥이 되기도 하고 신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똥고집의 똥을 빼더라도 고집은 여전히 허튼 짓처럼 선입관을 가지게 한다. 반을 되새김질한 나이 동안 고집은 그 자체가 선입관을 가지게 할 만큼 빈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로의 주점에서 두부 김치를 고집하는, 매번 막히는 올림픽 대로를 고집하는 경험은 충분한 선입관이다. 고집은 상황에 따라 허튼의 똥이 붙지만, 그 자체로 경험에 의한 판단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경험에 의한 판단은 나이가 주는 지혜와도 같아서 고집이 아닌 판단은 적절함이란 미래가치를 부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상황 by 상황으로 고집이란 반 지혜로, 되새김질로 결과하게 된다. 똥의 허튼은 얼마나 안해도 되고, 할 필요 없는, 누구나 하는 경험을 했는가에 대한 똥이 되겠다. 똥은 누구나 싸니까...

담론의 기저, 신념은 전적인 경험이 아니다. 뚜렷한 직접 경험 보다는 간접 경험에 의한 세계관의 형성이다. 따라서 신념이란 자체는 왠지 멋져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담론의 기저가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누구나, 라는 전제로의 고집과 희소한, 신념이라는 차이도 한몫 한다. 신념이 있다는 것은 어떤 담론이 전개될 때 어떤 기저에 의해서 전개되는 논리 또는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신념은 위험하다. 기저가 바뀌면 담론이 바뀌기 때문에 신념으로써의 기저는 바뀌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뀌면, 바로 모든 것이 허튼이 된다. 따라서 신념은 아무렇게나 가지는 것도 아니고, 선술집에서 꼬부랑꼬부랑 지저귀는 것도 아니다. 신념이 나타날때는 올림픽 대로를 탈때가 아니라, 어떤 담론에 부딛쳤을 때다.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말할 때,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질때, 신념은 찬란하게 빛난다. 하지만, 그 신념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에게 강요된 위험에 대한 극복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어떤 기저인가에 따라서 그 가치도 달라지게 된다.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 오리발 내밀기 신념? 이라면, 정말 할 말 없다.

거대 조직은 개인에게 부당한 결정을 할때가 있다. 또는 작은 조직에 부당한 조치를 취할 경우도 있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 말했다고 그로 인해 일부 상사가 감정을 다쳤다고 해서 그 행위가 잘못됐다고 시인할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인지 시켜줬다는 것에 감정을 다쳤다면 이미 그 사람은 신념과 고집이 대단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중이거나 이루어진 사람이다. 따로 만나 세계를 논하는 즐거움을 같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극복의 대상이 된다.

신념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집과 신념의 교집합 상태이고, 신념으로 내세우는 기저가 역시 대부분 허튼 것들 뿐이다. 많이 성찰해보아야 할 생의 과업이다.
2005/06/21 22:07 2005/06/21 22:07
DrunkenSTAR 이 작성.

서늘한 이사

2005/06/15 21:34 / 생활
마음은 여전히 동하지 않는다. 앞으로 살아갈 곳이 지금까지 살아 온 곳 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건너온 추억과 사랑이 앞으로 더 나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온 종일 연고지도 없는 도시를 뒤지는 걸음은 항상 피곤하고 서늘하다.
화요일까지 내 소굴은 움직여야 한다. 솜털 하나 하나가 저려온다. 무심코 나를 무장하고 있던 주소는 낯설은 거리가 되고 바람이 된다. 아직도 그대가 보내줄 소식 듣고 싶은데, 이런 내맘 아는지 모르는지, 부친 편지는 갔는지 안갔는지... 이제 내 사서함은 말끔히 바뀌는데. 내가 살던 창문은 조금씩 벽이 될텐데. 내맘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주었던, 한때는 찬란했던 계절이 타 들어 가는데...
2005/06/15 21:34 2005/06/15 21:34
DrunkenSTAR 이 작성.

연애의 목적

2005/06/12 17:09 / 생활
비밀스러운 목적을 시원 섭섭하게 밝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 일상이 투영된 것이라면, 내가 배워온 세계의 바라봄으로 그치게 된다. 최소한 나의 감정이 그것과 배치되지 않고 정밀하게 따라가 볼 수 있는 정도는 된다. 목적의 일반 이성적 열거와 연애의 차별 감정적 비선형에서 우린 영화를 보러 가는 목적을 배반하고 지나친 감정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이, 생의 단조로움에서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반항인 것 처럼, 무엇하나 1차 함수적인 것이 없듯이.. 그래서 였을까, 다른 사람들이 웃는 동안 나는 울었고, 다른 사람들이 복도로 쏟아지는 동안 OST 의 라.라.라 를 부르며 눈물을 삼키고 앉아 있었다.

홍과 유림이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 나의 상처는 꾀맨 자리에서 선혈을 뿜었다. 유림의 양아치 행위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영화를 보러간 목적과 행위보다 초졸하지도 배반적이지도 않았다. 나의 이성은 감정을 다독이며 은폐하고 있었다.
이렇게 너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나의 연애는, 목적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음악이 줄어 들면서, 빈틈이 없던 복도가 천천히 비어 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즐겁다. 연애의 목적을 이룬 사람들 처럼 즐겁다.
2005/06/12 17:09 2005/06/12 17:09
DrunkenSTAR 이 작성.

도덕 망각

2005/06/02 22:01 / 생활
수많은 정보와 정보의 분석과 분석의 근거와 경험적 요소의 대입과 이성과 지성의 트랙킹을 통해서 나는 하나의 판단을 이끌어 내야 한다. 감정의 개입은 양념이며 타인의 간섭은 갈등이다. 내 귀엔 공상이 없어야 하며 내 입은 온몸이 말하는 사실의 진술이 있어야 한다. 나에겐 수많은 정보가 있지만, 어떤 것도 아직 분석되거나 근거가 있거나 경험적 이거나 지적이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의 고독속에서 반드시 판단을 해야 하며 그 판단의 진술은 소매를 걷어 부칠만한 웅변이어야 한다.

아래의 완곡하지 않은 가정들은 '결코 타인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고 말해주고 있다. 정보와 가정을 충분히 분석했다고 결론지었으나 나는 잠시, 내 판단에 무엇이 빠진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그건 역시 도덕이었던 것 같다. 부끄럽다.
도덕이 망각되면 그 판단엔 흠집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목적에서건 *** 기업를 평가할 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셔야만 합니다. *** 기업의 사업과 미래의 고객이 위험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고, 일반적으로 경기 불황이 닥칠 수도 있으며, IT spending 경향에서 불리한 변화가 생길 수도 있으며, 고객을 늘이는 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 기업의 판매 사이클은 길고 복잡하며, 고객과 미래 고객의 필요과 우선순위는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시장 수요가 감소할 수도 있고, 증가하는 경쟁회사 수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며, 기술적인 변화를 관리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제품 가치 상승, 신제품과 웹섭비스 아키텍쳐 그리고 전략의 시장 수요 발생, 직접판매의 규모와 생산성 향상, 비용 관리, 고객 투자회수율 증가 등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 요소들은 Company's Prospectus 에 Securities and Exchange Comission("SEC")과 함께 Form S-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SEC로 정리된 서류 복사본는 SEC의 전자 데이터 모음 복구 시스템 EDGAR(electronic data gathering retrieval system)를 통해 www.sec.gov 에서 이용 가능합니다. 이 웹사이트의 컨텐츠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 마시기를 주의 드립니다. 우리는 이후 어떠한 결과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2005/06/02 22:01 2005/06/02 22:01
DrunkenSTAR 이 작성.

아버지에게

2005/06/01 21:01 / 편지
아버지와 저는 무심코 노을이 뜨는 날처럼, 무심코 아버지가 계시구나, 아들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에 잠시 멈춰서서 인사를 하는 사이처럼 보입니다. '사이' 라는 말은 맞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닷없이 아버지가 되셨고, 아들이 된게 아닐진데 사이라는 말속의 뼈가 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저는 저의 공장에서 기계처럼 쉼없이 돌아 갔던 때문이 아닐까요. 가끔 노을이 뜨면 아버지가 저렇게 계시는 구나, 그렇게 안락하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노을도 꽃을 피게 하는 볕인데도 말입니다.

미국에 가기전, 생각도 잘 나지 않지만 필시 그랬을, 제 귀찮은 손을 잡아 끌고 동행했었던 소백산, 기어코 정상에 가야 한다며 지쳐버린 자식을 또 잡아 끌으셨던 아버지의 손이 젓가락도 잡기 힘드실 정도가 되었다고. 아직도 아버지의 쉼 없는 노동은 어린 자식 끼니를, 다 큰 자식 결혼을 위해서랍니다. 아버지의 35년간의 지루한 노동에 대한 댓가는 그것뿐이랍니다. 저는 아직 아버지의 짐을 나누어 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손은 제게 준비를 하라고 이르십니다. 소백산에서 가득 부어주시던 막걸리만큼의 힘인데도, 아버지는 이제 그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걱정처럼, 이 놈이 커서 제 앞가림은 하고 살까?, 아버지의 노동을 저는 부정했을 테지요. 아버지의 노동속에 신념이 저 때문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시련이 비록 저 때문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청춘은 온통 제 밥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否定이 전통에 대한 극복인양, 가부장에 대한 투쟁인양 저는 얇팍하게 떠들었을 테지요. 아버지의 세계속에서 공과 사의 구별, 겸양의 미덕, 사리의 비판은 차가웠지만 어버지의 모습이셨죠. 아버지는 제가 그것을 닮아 갈꺼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삶은 어쩌면 그대로 저의 삶이 되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살아 보이심에 함부로 들어 섰으면서도 저는 그게 싫어 투쟁하기만 했지, 겸손할줄 몰랐습니다.

어제는 아버지, 노을이 풍경속으로 점이 되버리고, 오늘은 제가 옥상위에서 두들겨 패던 이불에서 먼지가 날아가 노을에 번집니다. 저로부터 나온 먼지가 여전히 아버지의 노을이 됩니다. 아버지는 오늘의 노동이 있기에 쉼이 없으며 아직도 자식이 혼자서 저렇게 있는 꼴이 아름답지는 않는 것이라며 병원도 가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저 독신자로 살 생각 없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사랑을 잠시 기다리고 있는 것 뿐이라고, 말씀 드렸었던 가요? 그러니, 이제 아버지의 가열찬 노동을 멈추셔도 됩니다.

아버지는 제 삶을 위해 소백산을 오르셨지만, 저는 고작 아버지를 위해 병원을 수배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저 사이의 폐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물이 약이 된다면 며칠을 흘릴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대지엔 잠시 적셔지기만 하겠지요. 아버지의 책꽂이에 제 책이 쌓여 가는 두려움, 하지만 아버지, 전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질주하셨던 숨찬 광야이기에 전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직도 이렇게 징징거리기만 하는, 미덥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자르고 못박은 의자를 거기에 내 놓을까 합니다. 언젠간 제 책이 나머지를 채울 것을 아셨던 것 만큼은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의자에서 아버지의 뼈가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식사는 잘 하셨는지, 이제 제가 전화를 겁니다.
2005/06/01 21:01 2005/06/01 21:0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