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쉬탈트 이론은 근접성, 유사성, 연속성, 폐쇄성, 형과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잘라 말하면 군집의 이론이지요. 웹 설계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만큼 근사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심리학파에 하나인 게쉬탈트 학파가 본질을 모호하게 이끌어간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군집으로 인해 발생하는 보기 좋음(즉 마지막 항목인 형과 배경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군집의 형태에서 인지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만’ 이란 단어를 쓰면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기 때문에 일부러 씁니다) 군집의 형태는 하나의 샘플을 통해서 전체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거나 하나의 매뉴얼로 다른 것들도 쉽게 배울 수 있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애플리케이션들 이겠죠(익스프래스를 쓸 줄 알면 아웃룩을 쓸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매뉴얼, 또는 같이 군집하고 있다고 해서(이것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정의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지각하는 정신모형이 그대로 인지할 것이란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정신모형은 매우 불안정한 모형입니다. 우리들의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경제학자의 논리가 언제나 맞지 않는 이유도 이런 불안정한 모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모형이 불안정한 이유는 적절한 시기와 경험에 비추어 능동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는다는데 그 첫번째 이유가 있으며 여러 가지 정신모형(즉 슬프고, 기쁘고, 힘들고, 하기 싫고... 등등)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비슷한 성질의 것들이 모여 있어서 형과 배경이 보기 좋을지 모르나 정신모형을 수정하거나 인지를 촉진시키는 작용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대상(정신모형과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게다가 그런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는 설계자가 군집 시켜놓은 구조란 비슷한 모형끼리의 충돌현상과 혼돈을 초래할 가능성이 큼니다. 스토리가 많을 수록 본질이 모호해지는 것과 같습니다.(옴니버스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쯤에서 저는 게쉬탈트, 이 넘 이론이 아니라 소설 아니야? 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이 넘의 이론은 고객체험의 경제를 꽤 뚫어봤다는 생각이 들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군집의 성향은 고객의 성향과 일치합니다. User 에서 Customer로써의 변화 관계와도 비슷한데... User 는 개별적인 존재인데 반해 Customer 는 Mass 적인 존재입니다. 검색엔진을 통해서 들어오는 User 가 아니라 누군가를 데리고 같이 들어와 즐기는(이 부분이 중요합니다)Customer 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Customer는 내가 즐기고픈 것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즐기는 것에 대해서 희생할 수 있는(주로 남친이나 남편이죠)사람을 원합니다. 잘 보십시오, 주위에 진정한 Customer가 있는지... 그렇다면, 고객체험의 경제에서 흡수와 몰입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체험과 미적체험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군집이라는 매우 탄탄한 이론과 함께 말입니다.
위에 말씀 드렸던 “즐긴다”는 것은 체험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체험이죠... 내가 직접 참여하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겁니다. 옷을 고르면서 직접 입어보는 것도 이런 체험 마케팅의 한 방법입니다. 미적체험은 그 상황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 체험입니다.
친구와 내가 잘 가는 백화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숱하게 돌아다니다가, 혼자서 쇼핑을 하다가 우연히 아주 멋진, 정말 멋진 공간 또는 매장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입이 싼 나는,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과장해서 말하고 친구를 끌고 이 공간 또는 매장을 찾습니다. 친구도 만족을 하겠죠(가정에 의해서)… 나와 친구는 반드시 지금 무엇인가를 사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사겠노라고, 그것도 경쟁적으로친구보다 먼저 사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 사람은 반드시 참여, 즉 엔터테인먼트 체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비싸건 싸건 그건 문제가 안됩니다. 싸면 바로 사겠죠… 비싸더라도 나중엔 반드시...

군집의 이론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국한된 매출이 두 사람이 되고 입이 싼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돈의 군집은 늘어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차명계좌의 기술적 보안이나 자금도피에 대한 세탁이론에 더 관심을 가질 것 입니다.

[2001년 10월9일, Gestalt 이론과 고객체험의 관계]


모든 경우에 모든 컴포넌트를 이용해서 모든 설명을 하고 싶어 하는 Management 마인드가 모자라신 클라이언트에게 딱히, 컨설팅적인 회피 언어가 생각나지 않던 머리를 대신해서 입술이 군집이란 단어를 뱉어 놓았다. 이어서 입술보다 늦게 머리가 과거를 소급해서 2001년 10월의 게쉬탈트 이론을 찾아 냈다.
조망하지 못하는 정신모델은 끔찍한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고 리스크를 생산한다. 그 정신모델은 경험과 인식의 범주를 부정한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을 향한, 모든 것을 위한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는 미국식 Business administration 의 합리론적 견해이다. 비즈니스의 합리성은 필요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란 비즈니스가 합리화 된다. 실제로 그러한 administration 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즉, 필요의 인식과 추진력만 있으면 비즈니스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어떤 사업, 사업성의 믿음이지 사업을 진행하는 관리의 믿음은 아니다.
비즈니스를 조망하는 management 는 비즈니스의 인식이 곧 관리와 동일하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Management 는 경험과 데이터에 의한 관찰에 의해서 완성되는 비즈니스에 촛점을 둔다. 비즈니스가 완성되는 것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간트차트, WBS 같은 것에 경험적 판단을 동원하여 정해진 것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활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관념적인 '모든' 이란 믿음은 관찰할 수 없는 덩어리로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논외의 대상이 된다.

관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합리적이란 이유로 믿음을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합리란 무엇인가? 도덕, 세상사, 제 각각 다른 가치관, 규범 등이다. 이를테면, 왜? 노인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관리한다고 했을 때, 합리적이라면 나이 많으신 노인 이고 도덕적으로 그래왔으며 경험이 많고 지혜의 대상이기에 깍듯이 인사를 해야 한다, 로 정의하고 모두 인사를 '잘' 하도록 관리할 것이다.
관리하는 사람의 관찰에 의한 관리는, 노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먼저 양손을 다리에 부치고 두발을 모으고 제자리에 서서 목을 60도 굽히면서 동시에 허리를 40도가량 정면으로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머리는 그대로 각도를 유지하고 먼저 허리를 천천히 펴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세운 다음 노인의 반응을 기다렸다가 가던 길을 간다, 그렇게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단계가 빠졌고 어떻게 하면 빠진 단계를 할 수 있게 하는지를 관리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면 Gestalt 이론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지적이라 생각했던 설득보다는 술한잔과 인간적인 뭉개짐이 휠씬 효과적인 소통이 되기도 한다. 다만, 비즈니스의 믿음만으로 근대화를 이룬 성장경제의 이념이 실은 관리 부실이었다는 역사를 부정할 수 있을까? 이항대립쌍에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 이전에 무엇의 산출물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관리의 이항대립과 대립하는 Post
2005/04/26 21:41 2005/04/26 21:41
DrunkenSTAR 이 작성.

오래간만에 자유 표현의 의지를 몸소 보여준 어른이 있어 환영할만 하다. 그는 조영남이다. 전기톱을 든 정부와 숲속에서 몰래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네티즌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자르고 뚫어 버릴 기세를 하고 있는 전국민 무조건 흥분 시기에 '친일선언'을 하고 나섰으니, '맞아 죽을 각오'를 하긴 한 모양이다.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죽을 각오로 적산가옥문서를 쥐고 대동아 전선에 이바지할 궁리에 목구멍이 쉬는 극우 기득권의 과거사 진상규명법에 비하면 개천에서 용나듯 청량감 넘치는 선언에 다름없다.
희대의 딴따라 조영남이 딴따라 기절 넘치는 문체로 알다가도 모르게 때로는 천진난만 하기까지한('일본에서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여고생 포르노 촬영장이다' 라니까...) 솔직함으로 쓴 책은 그가 한일 교류 단체로 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며 다시 보게된 일본에 대한 문화기행기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아스쿠니의 규모에 속았다느니, 신사참배! 얼마나 멋진 일인가, 라는 그의 표현은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일견 가능할 듯도 싶다. 민족적 사상의 결여나 역사의식의 조악함 등 가져다 부치면 다 맞는 반일 사상어로 공격하자면 조영남의 표현의 자유는 맞아 죽기 딱 좋다.
그런 친일선언이 개천에서 용나다가 이무기 된 건, 얇팍한 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할말하면 들을 사람이 있는 위치의 사람이 무식하게 표현을 했다손 치더라도, 거기까지 가진 않았지만 굳이 더 나아가 그 쌍스러움이 사악한 의도가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금새 상기된 얼굴로 '안했다고' 손사래를 칠 건 무언가... 자반 고등어 일색인 할인마트에 서슬 퍼런 은비늘 산 고등어처럼 친일 선언한 김에 '일본이 한수위' 라고 덧부쳐본들 달라질게 무언가...
지역감정 살려서 어떻게든 기득권을 유지해야 하는 정권 앞에 화개장터에서 영,호남 사람들 만나서 사이좋게 살아보자고 반정권적 행위를 자행하던 양반이 '나는 일본을 배우는 친일이오' 라고 외쳤으면 진중권의 가벼움('가령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선포한다면, 우리 쪽에서는 “시마네현의 울릉군으로의 편입을 축하합니다”라고 대꾸해주며, 시마네현을 시마네면으로 개칭하여 울릉군 시마네면(面)의 면민들에게 울릉군의 명예 군민증을 선사해주면 될 일이다.' 라고 한...)처럼 대해 주었다면, 어차피 심오한 진보적 사상의 문체나 네셔널리티한 보수적 규범의 문체가 되지 않는 딴따라 아니었던가?, 그의 자유 표현의 의지는 얼마나 명쾌한 다름인가. 비꼬았다는 확인불명의 해명을 통해 다름을 환영하고픈 마음이 싹 가시는 것은, 역시 책을 내려면 묵직함 보다는 센세이션해야만 성도 차고 주위도 끌고 돈도 벌고 일석삼조하는 짧은 사유의 일그러진 표상이라 판명되기 때문이다.

지금 민족과 국가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독도도 지키고 배용준도 지켜야 하는 이 절명의 시기에 어디 감히 친일 선언을 하는 책도 모자라서 우익 신문과 인터뷰를 하는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 중용했고 똘레랑스 했던가? 표현의 자유가 있어 사상을 주장했으면 다름이 있는 대중에 대해서도 오롯이 투쟁할 수 있는 강철대오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 없이 민족의 이름 앞에, 민족주의 앞에 무조건 분신을 불사하는 대중 앞에 떳떳하려 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내공이 약한 그저그런 어른으로 남기 딱 좋은 조영남의 손사래를 통해 사유의 노동이 부족한 근력은 외부 에너지에 의해 얼마나 부자유스러워지는지 정밀하게 알았을 뿐이다.
2005/04/25 21:33 2005/04/25 21:33
DrunkenSTAR 이 작성.

수상한 평화

2005/04/24 16:40 / 생활
가족의 일부분은 서로 거리를 두고 적당히 간섭하고 따로따로 소풍을 다니며 반쪽 사진을 쌓아간다. 아직은 아프지 않고 아직은 깨끗하다. 복선을 두고 일을 꾸미고,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전제 조건과 해결방법의 정치성이 실무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깨닫고 나면 깊게 고민하는 엄살만 가지고도 위험요소를 관리할 수 이다. 아직은 착한척 아는척 할 수 있다. 아카시아 향기가 나던 날 저녁에 이사를 와서 벌써 3년을 살고 있는 청릉윗길을 내려와 대형 수퍼마켓에서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스파게티와 만두봉지를 계산하고 외상장부가 있는 세탁소에서 와이셔츠와 바지를 찾아서 느릿느릿 이 언덕에서 좌절하며 비틀대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오른다. 아직은 잊지 못하고 아직은 덤덤하지 못하는 이별이 있다. 하지만 대충...
사는게 쉽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요하다.

이제 엊그제 잠깐 나온 물음에 답을 할 차례다.
"전 아직 순수한가 봅니다."
녹슬기 마련인 취미도 가지지 않고, 부대끼는 운동도 하지 않고 사람과 분리되서 지내는 방부제 같은 주말이 있기에 나는 아직 평화롭다. 전화기도 입출금 통장도 바지 가랭이도 간의 ADH 분비도 가열참없이 평화롭다.
2005/04/24 16:40 2005/04/24 16:40
DrunkenSTAR 이 작성.

나이와 내공

2005/04/20 22:59 / 생각
나이에 대한 담론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소재다. 사람과의 소통에 나이만큼 안락하게 금가르기를 할만한 잣대가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오직 나이에 의한 금가르기는 가부장적 규범에 의한 지표로써 강박관념과 고정관념의 주된 생산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양적 나이와 질적 나이에 대한, 역시 달갑지는 않지만, 촌철살인은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은 좀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 영양이 좋아졌고 화장술과 성형 의술이 발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겠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가장 큰 이유는 나이를 먹기 싫어하는데 있지 않나 싶다. ...과거에는 나이를 먹는 건 점점 더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이를 먹을 사람들이 존경받는 극적인 예는 무협지에 있다. 무협지의 고수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공이 높아진다. ...오늘날에는 나이 먹은 사람을 부양 대상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이요, 신기술, 신문물에 적응할 수 없는 덜떨어진 인간으로 취급하기가 일쑤이니 누가 나이 먹는 걸 달가워하겠는가. 그래서 악착같이 나이를 덜 먹으려고 하고 먹은 나이도 물리려고 한다. 이십대의 생각으로 삼십대를 살고 삼십대의 말투를 사십대가 쓰고 불혹의 사십대가 할 법한 주장이 천명을 안다는 오십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을 때에 한번쯤 내 삶의 내공이 나이와 일치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나이와 내공] 성석제


그렇다고 굳이 금가르기를 하는 호모 폴리티쿠스에게 나이가 아니라 내공을 지표로 삼으라고 하면 사회는 강호로 변할테고, 내공에 관계 없이 편하게 나이를 드시며 정책도 '너 나이 몇살이야' 로 따지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예의지국적 국민의 자세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때론 순식간에 권위가 필요할 때 순식간에 그 자세를 잡아주는데 필요충분하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것들이 명확해지는 경험의 축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강박관념이 줄어 들기를 바랄 때가 많다. 나이와 내공의 함수 관계, 집행유예 기간을 둔 결혼, 부르조아로 요약되는 사회속의 경쟁적 위치는 그 강박관념 이상이다.
나이에 따른 내공의 발산은 다분히 경험론에 기대어 있는 논리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통해 전통적 규범이 깨지면서 나이가 그대로 내공이 되는 자연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성석제 선생의 얘기는 그런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존경받고 공경하는 시대가 아니고 부터 사람과의 어떤 소통에서 건 '몇 살이야' 로 순서를 정하게 되면 바로 병신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내공이 왜 내공이겠는가? 액면을 까뒤집지 않고도 이면의 분위기가 액면을 압도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내공은 손바닥에서 나오는 장풍의 세기가 아니라 '살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나이와 내공의 관계로 생기는 피치못할 현상의 명확함은 비로서 자의식에 대한 새로운 세계적 인식이다. 명확함은 불분명했던 나와 세계, 나와 배경에 대한 선이 또렷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확함은 흡수가 아니라 다양성이 되고 이 다양성에 대입한 사상으로 인해 좌우가 되기도 하고, 제국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자유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숭배해야 할 내공은 '나의 정체는 무엇이고 그것으로 살아 보여주는 것' 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나이가 들면 그걸 잊고 독선과 편견으로 살면서, 사는 걸 보는 사람들로부터 병신 소리를 듣는다.

조금 관련성 있는 post : 인간의 퀄리티
2005/04/20 22:59 2005/04/20 22:59
DrunkenSTAR 이 작성.

퓰리쳐 유감

2005/04/09 22:29 / 생각
2005년, 나날이 간행하는 기록의 의미는 새삼 새롭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포퓰리즘적 편집증에 가까운, 사람들은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고 흔적을 생산한다. 퓰리쳐가 사망한 1917년에 기록이란 의미는 아마도 '기록적인 어떤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기록적인 것과 나날이란 의미가 현학적으로 파생하여 저널리즘이란 포괄적인 단어가 탄생했고, 수백년동안 그 단어는 매스 미디어의 횡포에 앞잡이 역할을 했다.
미디어와 기록의 생산자가 동시에 멀티의 개념, 권력의 이동, 을 가지면서 기록적인 어떤 것은 매스 미디어의 특징 즉, 기록을 순식간에 사회적 합의점으로 이끄는 획일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획일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근대 저널리즘의 한 축(기금을 조성해서 상을 만들었다고 한 축이 될 수 있나?)인 퓰리쳐, 퓰리쳐상의 매스주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멀티 미디어는 기계적 다중화라는 축소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모반적 반기의 개념이다. 매스 미디어가 저널리즘을 앞세워 기득권을 수호하며 스스로를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시키는 것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초의 개인 권력이 바로 멀티 미디어다.
멀티 미디어는 개인 이라는 다양한 유니버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제된 저널리즘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기반은 초극의 다양성으로 기득권이 보수하는 민족주의적 공공선에 대항하는 태생임을 증명한다. 매스 미디어는 그 반대의 개념이 된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바보가 된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미덕이다. 미국의 저널리즘, 미국적 저널리즘인 퓰리쳐가 과거의 영수증을 오늘의 반성으로 기록하지 못하고 표현 그 자체로 미국적 저널리즘, 나아가 제국주의의 목소리를 2005년 퓰리쳐 어워드를 통해 내고 있음을 개인 유니버스의 멀티 미디어니어로써 심히 유감을 쌔린다.

AP 의 이라크 전쟁 사진에게 돌아간 2005 퓰리쳐 상(Breaking news photography 부문)은 제국주의 전쟁의 충견을 휴머니즘으로 견실하게 포장한 카메라 옵스쿠라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 사실의 기록에 대해서 상을 주는 아이러니가 있기에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필름의 윤곽은 뚜렷이 전쟁이다. 하지만, 온데간데 없는 인권과 파괴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적 감성과 강대국의 폭압적 우월주의로 부터 시작하여 재기 발랄함으로 마무리가 된다. 시퀀스가 없어도 사실의 사진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말하는중 임을 들을 수 있다. 침묵하고 있지 않은 표현의 자유가 죄책감을 덜어주기라도 한다는 듯, 퓰리쳐는 한껏 뽐을 낸다.

침묵은 지적 자유도, 중간자의 미덕도 아니다. 퓰리처의 표현은 침묵과 표현의 자유가 별개라는 것을 말해준다. 침묵은 비판받지 않는다. 고작, 말을 해라, 정도다. 표현은 그 자유가 보장될 수록 다른 의견에 대해서 비판받을 준비와 주장의 모반과 반성의 기저를 동시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의 역사적 위대함은 침묵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것은 퓰리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퓰리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국인, 최소한 미국 언론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 전제로된 어워드의 정체성이 역사적 위대함과 그 자체의 권위와는 관계없이 그 사회의 기득권과 권력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바로미터로 보여주는 사례다. 보도 사진의 지적 존재는 사실을 전이시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사실은 있되 전이의 과정엔 사상이 전제되는데, 이때의 사상이 무엇을 조망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마땅히 그래야할 사실이 다른 전이현상을 가지게 된다.
한 사진을 보며 다른 전이를 느끼는 것이 멀티 미디어니어의 기본 덕목이라면 죽은 동료의 유품 앞에선 청년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아니 군대가 없고, 전쟁이 없었다면,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바벨탑의 이야기를, 타클라마칸 사막의 고운 모래를, 그곳에 핀 한줄기 무지개와 죽지 않았을 동료를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퓰리쳐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가?
2005/04/09 22:29 2005/04/09 22:29
DrunkenSTAR 이 작성.

비록 생동감은 없었지만, 나도 싸이라는 데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이젠 없어졌다.) 2001년 송년회때 싸이를 기획했던 이람씨가 클럽을 싸이에 만들어 주십사 말해줌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30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새 주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대화가 없었음으로 나는 그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유를 분배하는 공동의 공간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모두 답사할 수 없다는 결핍의 인정과 내가 답사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엿보기가 더불어 존재하는 비정형적인 공간으로써 싸이는 신화에 가까운 텍스트가 됐다. 싸이와 같은 포탈이라는 유기적 구조속에서 개인의 답사는 변증법적 비물질로 총체화 되어 닮아가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싸이는 자유로운 개인의 사유를 비물질로 간주하고 타인의 상상력과 소통시킴으로써 비물질에 현실감을 심어주어 긴가민가 했던 정의를 단번에 믿음으로 승화 시키는 신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개인은 자신의 답사가 정의하지 못했던 불완전함을 타인의 정의를 통해 믿음을 부여 받게 되며, 그로인해 자유로운 사유의 분열은 멈추게 되고 믿음을 확대하기 위한 닮아가기 신드롬으로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유는 누군가가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 빠져서 서로가 서로를 믿는 대변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현실은 현실임을 받아 들이자 라는 말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패배자들은 유기적 구조가 개인의 권리를 지배하는 현실의 엥똘레랑스를 현실로 받아 들이고 대중 뒤에 숨을 것을 강요한다. 싸이는 그런 패배자들을 양산하는 공동의 공간이 되버렸다.
개인의 권리와 사유가 자유롭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라는 국가주의적 동원은 비판 받아야 한다. 싸이는 개인의 자발적 의지를 미끼로 보편적 권리가 확장되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사유의 분배를 배급으로 바꿔버린 하나의 세계이다. 그 공간에서는 패배자들이 사유를 배급하고 기득권에 목마른 프롤레타리아가 순서를 기다린다. 국가가 그렇다고 하는 것에 무비판적으로 동원 되는 관제와 다를바가 없다.

타인 만큼 행복함에 안도하고, 타인의 불행에 적당히 동정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다름의 차이는 오직 대중의 트랜드가 인기 순위로 매겨 졌을 때만 인정한다. 배급된 인기가 정해지면 나도나도 대변자가 되려고 줄을 선다. 이를테면, 시가를 꼬나문 체 게바라가 배급되면 그 이미지에 열광하며 그를 규정한 타인의 아티클이 배급의 파도를 탄다. 자신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일상의 영위가 불편하지만 않는 범위에서 배급된 것에 열광한다. 소수자의 보편적 권리와 제국주의의 총부리에 투쟁했었던 혁명가 체의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오직 빨간 바탕에 시가를 꼬나문 이미지로만 날조되는 것이다. 닮아가기 신드롬에 일단 동참하기 시작하면, 체 게바라는 사랑하지만 출근하는 아침에 비정규 근로자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전단지를 받아 드는 것에는 그 열정을 거둬버린다.

현실 세계의 사회주의는 패망하였다. 개인의 보편적인 권리는 내가 처한 세계 뿐만 아니라, 내가 답사해보지 못한 세계에도 보장되어야 하는 국지주의적 소수까지 인정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책임있는 발언과 선언의 자유가 소수의 곳곳에서 들려야 함을 불안정으로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 개인의 사유가 공공선으로 보장되는 공화주의가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 들여 지면서도, 유기적 구조속에서 안락하게 사유를 배급 받는 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세계의 딜레마를 지고 갈 의지의 결여이다. 현실 세계는 그 결여를 착취의 수단으로 개인에게 파쇼적으로 사용하였고, 의지가 담보된 개인은 사회주의와 공화주의를 자연스럽게 패망시켰다. 결여가 지속될 수록 자기 목소리를 듣고 낼 줄 아는 보통 인간으로써의 희망도 역시 패망할 것이다.
2005/04/02 20:55 2005/04/02 20:55
DrunkenSTAR 이 작성.

취중전화

2005/04/01 22:31 / 생활
형수

동생
고양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인데,

노린내 풍기며 외상진 술에 기대어 그 세월을 거스리지 말자.

술 마시고 전화하지 말자...

이별이 긴 소설속에 희망은 언제나 내편이 아니었자나...

술 마시고 전화하지 말자...

초라한 아침부터 서정시를 쓰며 몸 부비는 자세가 형벌이었자나...
2005/04/01 22:31 2005/04/01 22:3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