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와 Y와 L 에게...

2005/03/31 20:18 / 편지
이 지상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휠씬 많은 사람들이 한줌의 삶을 기탁하며 살고 있다. 내가 아는 이름 중에 20명이, 그들의 삶속에 기록될 공통의 노동을 위해 여기 모여 있다. 그것을 프로젝트 라고 낭만하고는 담쌓은 언어로 부른다는 걸, 알고 있지?
알다시피 20명중에 3명이 있다. 그 3명은 자기들 C, Y, L 이다. C 는 사념없는 노동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모르고, Y 는 마음이 여려서 안되는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곧잘 눈물을 흘리지, L 은 팀의 막내면서 몸이 약해서 잘 아프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야, 그리고 C,Y,L 자기들은 모두 신입사원이지. 걷고 걸어 별까지 가야 하는 삶속에 C 와, Y 와, L, 자기들은 위태한 서까래 밑에 잠 재운 아이들 같아.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어제 철야한 Y 는 집에 들어가 자고 있을까? 어제 저녁 밥을 거른 L 은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을까? 오늘쯤 C 는 관점을 바꾸고 제대로된 문서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출근을 하지... 정말로...
내가 오늘 자기들한테 한 말들을 적어보자, "또 밥 안먹었어? 따라와 나랑 같이 밥 먹자, 다시 한번 이런 컨셉으로 해보자, 이 정도 가지고 팔아 먹을 수 있겠어?, 이메일만 날리면 끝? 체크를 해야지, 여긴 모르고 있자나..." 등등 이었지.
하나하나 닦아주고 입혀주고 떠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사람은 쉬더라도 노동은 쉴 수 없다는 나의 관점. 더 이상 성실한 노동이 아름다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Y 에게 온몸이 부셔지도록 추궁을 했고, Y 는 울었어. C 의 관점은 더 이상 인정해줄 수 없었기에 가차없이 노동에서 철수시켰어. Y 는 울면서 담배를 피웠고, C 는 입맛이 없다며 밥을 걸렀고, L 은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는 것도 알고 있다.
Y 와 C, 자기들을 불러서 이런 말을 했지...
"지금 현재 뭐가 제일 힘드니? 자존심 상하지? 쪽팔리고? 상심하고 있지? 왜 이 직업을 택했나 회의가 쓰나미로 밀려오지? 옥상 올라가면 확 뛰어 내리고 싶지?"
"지금 상심하고 있으면, 계속 상심해... 더 상심하고 더 쪽팔려해... 죽고 싶을 만큼 해... 대신, 기간은 오늘까지야. 그리고 앞으로 99번 더 상심해야 할테니까 이 기분을 잘 기억하고 있어, 100번은 상심하고 100번은 자기일에 회의를 느껴야, 남에게 충고할 수 있는 가치관과 신념이 생기는 거야, 17명은 다 걸어서 별에 가려고 하는데 니들만 뛰어서 별에 가려고 했어? 이제 시작했을 뿐이야, 앞으로 99번 남았는데 이렇게 어깨가 죽어 있으면 어떻게..."

C, Y, L... 노동엔 사념이 없는거야, 대신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면 꼭 날 찾도록 해... 도움을 청하는데 손을 내려칠만큼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진 않으니까... 밥 맛이 없을 땐 소주라도 사줄테니, 특히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을 땐 꼭 날 불러...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도 손은 잡아 줄테니...
2005/03/31 20:18 2005/03/31 20:18
DrunkenSTAR 이 작성.

독신과 이사의 발견

2005/03/29 22:56 / 생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그건 오랜 시간이야' 의 범주 안에서 독신자라는 지위로 살다보면 세상에 귀찮은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귀찮은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님을 알게 되면, 정말 귀찮은 것,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 하고 싶은데 안하는 것,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것, 안해도 되는 데 굳이 하는 것, 하고 싶은데 하도 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등등... 비교적 구획이 명확해진다. 말하자면 지몸 하나 간수하는 독신자가 지몸 하나를 이동시키기가 어렵고, 지몸 하나를 간수한다는 생각이 자신을 은연중에 귀족화 시키기 까지 한다.
이사라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 생각이야 열심으로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서서히 속물이 되어 간다. 지몸 하나의 귀족감에 젖어 자기 관리의 우선 순위나 결정의 계기가 희박해져 가는 것이다. 가정의 윤택, 자식의 교육, 배우자의 상황 등으로 계기와 순위가 있는 이사의 고민을 독신자는 거추장스럽게 생각 할 뿐이다. 그 계기와 순위가 정해질 동안 지지고 볶을 삶의 부대낌이 남루하게 조차 느껴질 뿐이다.
화려한 싱글이란 없다. 화려함이란, 타인이 조망하는 존재의 정의이다. 화려함 속에는 나를 스스로 정의하는 너그러움이란 없다. 대신에 타인이 함부로 규정하는 경박함이 있다. 나를 조망할 수 있는 독신자의 삶이란, 느닷없는 웃음소리도 잠을 깨우는 구들장 구르는 소리도 없는 고독속에서 이루어 지며, 타인의 조망이 끊기고 여운만 남아 있을 때, 비로서 화려함을 때고 지극한 외로움과 우울로 점철되버린다.
싱글에게 화려함이란 경계의 대상이다. 타인에 의한 조망에서 독립적이지 못할 때, 화려함은 외로움과 우울로 부폐한다. 싱글에게 독립적 고독이란, 정신적 유목 상태로 개척의 비타민으로 삶에 작용할 때를 말한다. 결국, 야망을 가진 독신자에게 고독은 투쟁의 대상이다.

투쟁은 고사하고, 이사조차 못가고 망설이다니...
망설임의 이유는 대략 이렇다. 제한된 자본, 고증적 의미의 위치, 반대로 실사구시적 위치, 진일보한 혜택, 기회비용의 감소, 추억에 대한 숙제 등으로 미사여구를 부칠 수 있지만, 절대적으로 이건 오랜 독신 생활로 인해 몸에 밴 '해야 되는데 서글픈 것' 으로 생각된다.
오랜 독신 생활? 이 부분도 나에겐 새롭게 설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추억과 약속이 있으므로 나는 여전히 독신이 아니다. 고독의 연무가 나를 강심으로 끌고 갈 수 없는 날개 같은 것이 있기에, 오랜이란 아득함과 독신이란 표류 때문에 내 발자국을 보려고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이사, 그것은 서글프지만 여전히 고독을 가지고 갈테니 눈물까지 흘릴 청승은 부릴 필요가 없고, 여전히 내가 날아 가고 있는 사랑은 신기하게도 조금의 탈 속에 여전히 찬연하다.
이미 많이 갔다고 부정 했다면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에겐 그때처럼, 지금도 소중한 사랑을 모래 주머니에 간직하고 태양으로 나른다. 모래 주머니가 무거워서 날지 못할 것 같으면, 내 이빨을 모두 뽑아 버리면 되지.
어떤 것도 늦지 않았다, 이제 겨우 봄이 시작됐으니까...
2005/03/29 22:56 2005/03/29 22:56
DrunkenSTAR 이 작성.

오늘날 매체의 발달은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고정관념에 지배되어 있던 말과 글을 해방시켰다. 보조 수단이었던 이미지와 멜로디는 거추장스러운 부연과 서술 없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토대로 계층적 지배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매체의 혁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본능적 순수함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는 인간과 인간이 가까이 있게 됨으로써 기원되었다. 루소의 '언어기원의 시론'에 의하면 인간의 객체가 적었을 때, 상호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객체가 늘어나고 비로서 인간과 인간이 하나의 일을 하며 협동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필요하게 된 도구가 언어이다.
협동의 기표이며 기의인 언어의 형태로써 말과 글은 속지적이며 즉시적이다. 협동과 거리의 관계로 언어를 전달하는 수단의 발전이 있었다면, 목적과 파급의 관계로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의 지배관계가 변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장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고의적인 영향을 의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말과 글과 이미지와 음악의 지배관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간과할 수는 없다.
협동의 장르에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지금까지 정의한 4가지가 복합적으로 결합, 분해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협동을 통해 어떤 산출물을 내는 목적성에 따라서 구별되기도 한다. 영상이나 광고가 목적이라면, 이전에 협동의 언어는 그것을 밑그림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적 속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속지와 즉시의 성질은 산업화의 '블루 웨이브 협동'에서 지식화의 '화이트 웨이브 협업'으로 변화되었어도 변질되지 않고 있다. 매체와 각종 도구의 첨단화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협업에서 이미지와 음악의 단절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속지성과 즉시성을 가진 말과 글을 대체하진 못하고 있다.

협업 언어는 즉시성이라는 문제가 암묵적으로 고찰되었기 때문에 그 특징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말과 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과학의 발전이라는 후속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원과 달리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객체가 늘어 나고 거리에 대한 복구가 요원해지면서 음성과 텍스트를 나르는 도구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촉매로 산재될 수 있었다. 물론, 현장에서 협업의 언어가 특징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제도와 특수제도의 구조로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제도안에서 말과 글은 1차, 2차 집단에서 오랜 세월동안 선택권 없이 인간에게 주입되었지만, 이미지와 음악의 부수적인 언어의 특징은 제도의 특수제도에서 습득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협업의 언어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로 받아 들여지는 말과 글의 주입적 교육의 상태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 선택권이 넓지 않다는 - 전제의 논리로 인해 인간 개개인을 규범적 동원체제로 만들었다는 이론으로 공격할 수 있다. 말과 글의 속지성이 그것인데, 태생적인 지역성으로 인해 모국어의 선택은 자유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 계급적 지위에 의해 다국어의 선택이 극도로 제한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도의 기저로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 박탈된 선택권으로 얻은 말과 글의 즉시성이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의해 속지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과 글의 협업 언어는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협업의 궁극적 단계인 산출물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상식적이며 고전적인 도구 임에도 불구하고, 즉시성을 위해 선택권을 상실해야 하며, 속지성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해야함을 가르친다.
2005/03/29 20:41 2005/03/29 20:41
DrunkenSTAR 이 작성.

사랑의 예감

2005/03/24 21:46 / 관심/텍스트
김지원의 '사랑의 예감'(이상문학상 당선 '97)을 읽고...


'생명이 있는한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예정된 사랑'

플롯부터 다른 글쓰기였다. 1장과 2장으로 나뉜 중편크기는 장의 내용부터가 독자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하는 의지가 있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등장인물들은 수다로 시작한다. 넓지만 인종적인 이해관계가 마천루처럼 쌓인 뉴욕은 그다지 옆사람만을 응대하여 대화하기에는 좋은 장소는 아니다. 겹겹이 쌓인 문화적 혼합은 차라리 카오스적이지만 그들의 수다는 그런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몇가지 모티브적인 개체가 확연히 등장한다. 별, 시계,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다. 별은 넓은 공간에 나름대로 빛을 내며 그대로 떠있는 섬이다. 무엇이든 두 개이상의 물체사이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별은 미약하지만 짜내듯 빛을 내며 공간이 있음을 채우고 있다. 시계, 시계라는 사치품(?)이 흔해졌음을 흐름으로 간주하며 시간은 공간속에서 어느것과도 섞이지 않는 평행선으로 우리들 삶중간을 꿰뚫고 누구나 손목에 찰수 있을 만큼 많아졌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대화를 하는 유부녀(신옥과 장미) 둘은 그들에 인연의 끈을 위해 뉴욕이라는 먼곳을 택했고 동창이라는 설정에 반가워했다. 대화의 주체로써 유부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공간에 배제된 상태로 그동안 공허로 남아있던 그들에 인연의 끈을 이으려한다. 그들의 남편들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에 책임을 맡고 있다.
몇가지 설정된 대화관계, 즉 신옥과 장미, 신옥과 장미의 시누이, 신옥의 남편과 장미의 남편, 은 제대로된 선형적 구도에서 점차 순환적인, 복합적인 연결로 어지럽게 뻗어 나간다. 간간히 대화속에 인용되는 닥터유(장미 시누이의 남편)의 환상적인 운명은 시공을 잇는 삶에 도정을 의미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해 질 수 있는 대화소재를 하나의 점으로 이끄는 구심역할을 한다.

"시인(詩人) 이태백은 시간은 지나가는 과객이라 읊었으나,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물현상뿐이더라, 시간은 '늘' 그대로다. 그래서 오'늘'이다"


닥터유의 독백같은 추억속에 간간이 산재되어 있는 이런 시간정의는 인간 개개인의 의식에 접근하고 대화 주체들의 개념적인 행동양식을 정하는 역할로 자리 잡는다.
시계라는 모티브로 전개방식을 정하고 미국교포사회와 한국적 현실-분단, 민족정체성, 인종, 언어장벽-을 대비시키고 자칫 주제를 빗나가는 소재적 빈곤의 극복을 인공수정과 결혼등으로 매꾸고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이 소설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열정적이고 애끊는 만남과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그들의 대화속에선 그런 거추장스러움은 대화거리 조차도 되지 않는 듯한 구성이 사뭇 제목과 대비되어 독자를 조롱한다.

"대화는 피곤합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부부사이에는 대화가 오히려 없는 것이 좋습니다....중략... 어떤이는 사랑을 한답시고 주고주고주고, 어떤이는 주고받고, 주고받고 어떤이는 받고받고받고, 그런데 어떤이는 시간과 공간을 줍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이어서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될일이 아닙니다."


신옥 남편의 대사는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다. 인간관계로 깊이 자리잡은 부대낌과 미움과 고움의 정, 구속같은 사랑을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연한 개기지만 강한 인연과 우연성으로 만난 결혼에 개인적인 독립과 암시적인 주장으로 익명적 행복을 요구한다. 행간 밑에 잠재적으로 깔아놓은 분단이라는 모티브와 개인 또는 민족의 정체성은 사실 커다란 줄기는 아니다. 간혹이지만 자연적, 또는 인공적인 생명의 연장이 소설을 이루는 페러다임으로 보고 싶다.
그런 연속선상에서 시간, 공간, 인위적인 국경같은 것에서 조차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이 예감을 의미하는 사랑으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대화의 종점에서 그들은 서투른 만남을 기약하지만 연속선상에 생명을 믿지 않았고 생각보다 빠른 만남이지만 그들에 존재는 다시 원래의 섬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올림픽은 그 우연성을 촉매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은 못됐다.
이 소설은 1장은 뉴욕, 2장은 서울의 상반되는 구도속에서 상대적으로 작아진 사적공간과 만남의 우연성을 소설적 필연으로 연결시키며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속성을 말하려 한다.
2장은 1장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혼자사는 그저 평범한 여자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지만 약간의 특별한 장치가 있다. 다시금 등장하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합성되어 1장에서 부부라는 태초적인 본능적 관계를 부인하는 인위적 효과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납북된 남편에 대한 한스러운 망부가는 아니다. 단아하고 단정한 이야기 흐름은 어쩌면 5년이라는 시간차가 덮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호한 안정감이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현실속에서 무거운 안정을 유지하다가도 무의식상에서 보여지는 환영과 환청을 꿈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질때가 많다. 그 무의식의 현상속에서 수천년전부터 정해져온 인류의 것, 생성과 소멸은 여성의 봉긋이 오른 배에서 생성을,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고속, 구역질나게 찢겨진 시체에서 소멸을 보여줌으로써 대비되는 시공, 현실과 꿈을 관조적으로 매듭 지어버린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만남이 이곳에서도 있다. 여자와 신옥의 남편, 지루한 서술 끝에 분열적인 대화는 이상하리 만치 운명적임을 상징하려는 질긴 교감이 눈길을 끈다.

"저도 살아나가 기쁨니다... 중략...
아내의 뱃속에 든 아기를 초음파로 검사해 보았습니다. 눈물이 솟더군요 감동이 치밀어 울다가 웃다가 했습니다. 장례식을 가봐도 그렇고 사람들은 죽는일과 태어나는 일을 큰일인 듯 여기지만 그중간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언제 죽는지 다 잊어먹고 그냥그냥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구나"


너무나 먼곳에서부터,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생성과 소멸을 눈앞에 대놓고도 시리도록 감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과 생명의 잉태는 자기유사성이라는 독선으로 말미암은 침착함 같은 것이다.
생명에 대한 아집은 너무나 본능적이다. 소설은 그런 아집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인간의 만남이 영원은 아니지만 공간과 공간속을 연결하는 목숨으로 인간은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진다. 부부라는 질긴 끈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끊기도 하고 잇기도 한다.
생명이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의미하듯이 약속시간을 정한다. 사랑의 예감은 그런 연속적인 생명의 흐름속에서 단호함을 보여주고 열정적이지 않아도 우연같은 만남속에 사랑을 의미하는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생명은 그런 사랑을 감격으로 알게 해준다. 멀거나 가까워도 그것은 교감으로 교통으로 이어준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2005/03/24 21:46 2005/03/24 21:46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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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조망

2005/03/23 12:55 / 생활
고요한 방안에서 내 등을 살짝 밀어주기도 했던 천진난만한 노래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 몸을 뉘이고 뒤척이고 눈을 떴다. 눈 앞에 노란 샐로판지가 덮고 있는 것 같다. 안경을 써야 할까? 노인이 된 것일까? 지난 밤 영화(냉정과 열정사이)를 보다가 혼자 맘껏 누추한 눈물을 흘린 탓일까? 우울을 거둬 줄 노래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간만에 수당도 없는 주말 노동을 접고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러 간 아침, 눈이 이상하다. 눈이 판단을 느릿느릿 하는 동안 세종문화회관 R 석에서 몇사람이 졸았을까? 나를 포함해서... 콰지모도가 슬퍼보이지 않는 까닭은 지난 밤이 너무 누추했던 탓일까?
내 눈은 마티스가 조망하는 노트르담의 야수적인 색깔처럼 무대를 번지게 하고 있었다. 마음이 언제나 정성껏 운 탓이다. 철저한 사회주의자가 될 것을, 냉정하지도 열정적이지도 못하면서 그런척 아닌척... 지겹다. 달이 거의 차오르고 별이 총총한 밤이면, 끝까지 명료하게 잘 살꺼라고 나에게 기원한다... 지겹다.
허물도 없이 지겹움이 소생하듯 봄이 왔다. 그런 밤에 클라이언트 C 는 자본주의적인 우울함을 이기지 못해(아니, 이기지 못하게 하여) 사무실에서 목 매단 동료에 대해서 얘기한다. 소주한병 마시자고 한 약속은 저절로 깨졌다. 작년 봄, 알지는 못하지만 나와 같은 병세의 그가 죽었단다. 또, 죽음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봄이다. 죽음도 카타르시스가 된다. 스티브와 알지 못하는 그 사람과 나를 빗대어...

철이 되어 이사를 갈 참에 이상은 마티스가 노트르담을 조망한 생 미셀가의 남루한 아파트지만, 현실은 카드키와 옵션이 달린 요염한 복층식 원룸이다. 봄을 조망하는 괴리감이다. 낭만과도 괴리를 두고 조망하고 싶다. 난 너무 지나치다. 일도, 낭만도...


Matisse Hemi 노트르담의 조망
2005/03/23 12:55 2005/03/23 12:55
DrunkenSTAR 이 작성.

스티브에게

2005/03/19 19:20 / 편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벌써 며칠이 지났다고... 네 살갖이 내 살갖과 부대끼던 10년전의 시간을 거슬러 너는 나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구나. 살아 있을 때는 소식 한번 없던 네가, 죽어서 비로서 말을 건네다니...
겨우 서른, 흐린 눈을 부비고 나니 너와 나의 10년의 공터가 새삼 서운하고 서글프다. 이제 슬퍼도 울 수 없는 공터가 되버렸다. 너를 끔찍이 사랑하던 네 누나와 너를 보살피지 못해서, 가슴 한켠을 너에게 내주지 못해서 내내 어둡기만 하던 네 아버지... 너를 보내고 기적처럼 견디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목구멍에서 가시가 돋는다. 이제서야 네가 보고 싶구나, 어떻하다가... 지지리도 운도 없고 지지리도 못난 녀석아...
또 한 10년쯤 지나서 네가 죽은 뉴욕의 어느 에비뉴에서 만나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되면 네가 묻힌 묘지가 날 기다리겠구나. 잘 살기를 바래, 무엇보다 건강하기를... 그런 막연함이 너에게는 통하지 않겠구나.
너와 내가 아슬아슬 하게 보냈던 시절만이 잿더미로 남아 뜸금 없는 어느날 무턱대고 생각나겠지, 해픈 웃음을 짓다가도 네 죽음이 두르마리 화장지처럼 풀리는 날이면, 목이 메어오겠지... 마치 내 허망한 질주를 탓하듯... 매 순간 목숨처럼 살다가도 그것이 없으면 무슨 소용일 건지, 그렇게 너는 나에게 또 하나의 빈집이 되는 구나.


1993년 봄, 네쉬빌 테네시 ~ 2005년 3월 8일
2005/03/19 19:20 2005/03/19 19:20
DrunkenSTAR 이 작성.

봄이 오면

2005/03/18 18:02 / 생활
담배 22개비, 맥심모카커피 5잔, 아침햇살 1병, 카페테리아 점심 3,200원, 택시비 8,900원, 가끔 소주 2병, 내 일상을 이루는 타일들은 이런식으로 숫자와 짝을 이룬다. 숫자는 그것들의 어떤 범위나 가치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일상의 숫자들은 시간과 편린을 의미한다. 시청앞 잔디광장이 보이는 옥상에서 담배 22개비를 소모하는 시간동안, 방금 잔디를 스치고 솓아 오른 바람속에 사람들이 흘려놓은 수천개의 눈물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택시비 8,900원을 지불하면 30분정도 눈에 촛점을 없애고 너덜너덜해진 네온사인에 구부정해진 세월을 널어 놓을 수 있다. 나는 일상의 같은 타일 위에서 기어다니는 도마뱀 같아 보이지만, 에셔의 상승원리의 판화처럼 도마뱀에서 개구리로 개구리에서 비둘기로 매일매일 다르다.
일탈이란, 사소함을 깨는 것. 사소함은 일상의 타일, 타일을 깨는 일은 때론 목숨의 담을 넘을 수도 있다. 담배 22개비를 깨고 살았을 때, 그것이 그리워 길 건너에 서 있는 공중전화에서도 그리워, 그리워 통화음이 들릴 것만 같아 후다닥 건너가고픈데 마주 달려오는게 보일리 없다. 그래서 늘상 있는 일은 단지 그것만으로 소통하고, 그 안에서 사념없는 노동을 하고 간결한 성공만 있기를 꿈꾼다. 욕심이 지나친 윤택을 만들지 않고, 일탈이 목숨을 담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 였던 와인바에서 유학을 결심했으나, 나는 그 결심이 상상과 약속의 일탈이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빨갛게 타오르는 우체통에 귀퉁이가 슬픈 편지를 넣고, 우체부의 자전거가 굴러가는 상상을 오래도록 할 것이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았을 편지를 속절 없이 기다리는 일탈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니라고 내팽개치지는 않으련다.
오늘, 담배 22개비를 소모하는 옥상엔 정말 봄이 온 것 같다. 불어오는 바람속에 눈물의 습기가 며칠 전 같지 않다. 지난 몇개월 동안 내 마음에서 마음은 쉬지 못해 어느덧 시체가 되었는데,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엔 묻어 나지 않는다 한다. 춤추던 겨울은 찬물로 몸을 헹구고 감옥에 들었다. 봄이 오면 도마뱀은 꼬리를 끊고 꾸역꾸역 강심으로 사라진다. 봄이 오면 한번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짐승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타일들을 위해서 옹알거리던 짓거리를 도마뱀의 등에 태워야지, 이 녀석들의 꼬리는 당췌! 믿을 수가 없다.
2005/03/18 18:02 2005/03/18 18:02
DrunkenSTAR 이 작성.

봄날

2005/03/14 22:19 / 생활
아침뉴스가 난데없는 선언을 하고 나섰다. 오늘부터 봄이라고. 출근을 하는 중에 라디오에서도 부산을 떨었다, 오늘부터 봄이라고. 징후가 없는 변화를 명확하게 선언할 수 있는 배짱도 좋고, 순수하기까지한 대중매체가 많은 우리나라의 상서로움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반복되는 Groundhog day 처럼, 계절은 여전히 오토리버스 중인 것 같은데도...
무엇을 명확하게 끊어 버린다, 는 것은 부러 찾아 다니지 않는다, 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내가 드라마 같은 것을 끊어 버린 명확한 지점은 모래시계 이후가 된다. 모래시계 이후엔 어떤 드라마도 쫒아 다니며, 부러 찾아 다니며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를 잠시 끊어 버린 고현정씨가 컴백한 드라마 '봄날' 이 어제 종영되었다. 앞에 내용은 죄다 남에게 듣고 19회, 20회만 봤지만, 어째됐던 마지막 두편은 쫒아 다니며 본 격이 됐다. 마지막 두편만 본 나로서는 서정은, 고은호, 고은섭은 결국 끊지 못하는 존재들의 상처, 고은호는 서정은과의 사랑을 끊은 대신 배신감과 안타까움으로 매듭 짓고, 고은섭과 서정은은 고은호에 대한 서로의 인연에 상처를 주어가면서 매듭 지어버린 '봄날' 이 됐다. 매듭지어서 모두가 봄날을 맞이 하게 됐거나, 될 것이라고 봐도 될까?

끊지 못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못한 것도 없다. 끊음으로써 자유롭지만, 그것만큼 정치적인 판단도 사상도 인간성까지 위협 받는 것도 없다. 하지만, 끊지 못하는 현재의 의지로 미래가 자유롭지 못한다고 하여 냉정함이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늘의 냉정함이 미래의 후회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다가, 추억으로부터의 격리가 자유의 반납보다 낫다는 생각을 아직은 하지 못하겠다.

순진하게 봄을 선언 당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은지도 모를일이다. 고은섭의 말처럼 숨을 쉬려면 서로가 아무는 시간이 필요할테고, 황망한 들판에 봄이 찾아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다가 피던 꽃 모가지가 동강동강 끊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렇게라도 난데없이 봄날이 왔다고 말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 던 기형도의 시가 누렇게 오줌핀 자폐의 다락방 벽을 손가락으로 구멍내도 좋을 봄이 왔으니, 지금 만나러 가도 된다고 말해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5/03/14 22:19 2005/03/14 22:19
DrunkenSTAR 이 작성.

TO JACK

2005/03/11 18:20 / 생활
큰 형님께...

생각과 생각의 방식에 쨉과 어퍼컷을 날려주신 큰 형님.
아직까지는 너무나 높게 보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
그 동안 애써 챙겨주시고, 생각해주시고, 다독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저를 챙겨주시겠지만, (ㅋㅋㅋ 이젠 제가 앵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모션에서의 3년. 그리고 그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베풀어 주신 정(=술).
정말 쉽게는 잊혀지지 않을 일들이 될 겁니다.

들려주신 이야기들. 생각들.
이제 그릇의 모양을 만들어나갈 저로서는 힘이 되는 양분들이었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 살아감에 있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만드는 데에 있어,
어디 하나 큰 형님의 사상이 묻혀지지 않은 데가 없네요.
이젠 같은 소속의 소속감으로 예전과 같은 꺼리로 공감대를 만들고
술잔을 부딪치지는 않겠지만,
사회에서 만나게 된 큰 형님으로써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세요. ^^


그 배경 속에서 또 다른 사상의 내음을 풍기며

새로운 얘깃거리로 저를 채워주시고 키워주시구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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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시간과 제도에 얽매있다 한들,
'고여있지 않은 자유롭고 바쁜 정신'으로 삶을 독려하며 살자...
그동안 나도 고마웠다.

재크형이...
2005/03/11 18:20 2005/03/11 18:20
DrunkenSTAR 이 작성.

혹자는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전문가' 를 '자본주의의 특정 도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이' 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전문가는 도구 사용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자이며 노하우가 발휘되는 도구는 자본주의에 종속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경쟁이 있는 곳에 전문가가 있다는 말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전문가란 입지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의된 도구가 지닌 복잡성과 불연속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구의 전문가가 사상의 전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도구의 작동원리에 대한 진지한 사상을 가지고 통찰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을 지식인이라 말한다.

지식인의 통찰력은 복잡한 도구의 사용성이나 자본주의적 생산성과의 연관성이 아니라, 도구의 사용성이 인격의 유지, 공공권리의 보장, 보편적 인간애 등에 어떻게 작용하여 궁극의 사용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촌철의 살인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의 통찰력은 그 사상적 배경이 무엇이기 때문에와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한 지식인의 사상이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팽창에 있다면 그의 통찰력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선에서 발휘될 것이다. 우파는 우파, 좌파는 좌파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발휘되는 통찰력이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중도, 양비의 선언은 통찰력과 거리가 멀다.

사상의 가치는 이념 안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
민족적 비난의 대상이 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승조씨는 그 이념 안에서는, 또는 과거 지식인들이 그랬듯 적군의 울타리 안에서는 가치있는 선언으로, 가치있는 지식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가 그 이념안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통찰력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어디 가치가 그뿐일까?

그가 주장하는 통찰력은 나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다른 이데올로기, 사상을 가진 사람, 지식인, 또는 양비론자 에게도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그의 것보다 훌륭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하는 공공의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나는 한승조씨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제2의 임라일본부설 같은 그의 주장에 털끝도 동조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적 가치는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그렇다하여 표현의 자유조차 부정해서는 안된다. 엥똘레랑스에 대해서 엥똘레랑스로 대응한다는 가치가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되고 보편적이며 공공선의 가치가 되려면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 는 전문가의 사용성 노하우에 앞선다. 사상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는 사상에 앞선다. 한승조씨가 우리시대에 매국노,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어떤 사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에 있을 뿐이다. 한승조씨는 그의 사상을 표현했고 그 사상에 대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것이며, 그는 마땅히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함으로 비난을 견딜 것이다. 그 사상의 적은 엥똘레랑스로 표현 할 것이고 그 자유는 쌍방간에 지켜져야 하는 절대 가치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퀄리티는 있다. 따지자면, 한승조씨는 표현의 자유에서 High quality 였지만, 한승조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지만원씨의 표현의 자유는 저질이다.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고 지만원에게 조차도 평등하게 부여되는 것은 군부가 광주를 짓밟았기 때문에,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인격의 상실화를 강요했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도발을 성심성의껏 막아줬기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군부와 박정희와 미국은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고 간섭하고 있는 세력이었고 세력이다. 그러한 간섭과 억압의 폭력 앞에 굴종하는 노하우에 대한 전문가가 지만원씨라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가 질적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되겠다.
'한교수는 국제잡지에 격조 있는 글을 썼습니다.' 한승조씨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표현의 자유는 지만원씨의 말대로 격조가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표현의 자유가 동반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대다수 Low Quality 의 덧글과 무엇이 다른가?
당신이 Low Quality 덧글과 달라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당신은 우파 전문가가 아니라 우파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2005/03/10 19:11 2005/03/10 19:1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