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의 '사랑의 예감'(이상문학상 당선 '97)을 읽고...
'생명이 있는한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예정된 사랑'
플롯부터 다른 글쓰기였다. 1장과 2장으로 나뉜 중편크기는 장의 내용부터가 독자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독법을 요구하는 의지가 있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등장인물들은 수다로 시작한다. 넓지만 인종적인 이해관계가 마천루처럼 쌓인 뉴욕은 그다지 옆사람만을 응대하여 대화하기에는 좋은 장소는 아니다. 겹겹이 쌓인 문화적 혼합은 차라리 카오스적이지만 그들의 수다는 그런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
몇가지 모티브적인 개체가 확연히 등장한다. 별, 시계,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다. 별은 넓은 공간에 나름대로 빛을 내며 그대로 떠있는 섬이다. 무엇이든 두 개이상의 물체사이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별은 미약하지만 짜내듯 빛을 내며 공간이 있음을 채우고 있다. 시계, 시계라는 사치품(?)이 흔해졌음을 흐름으로 간주하며 시간은 공간속에서 어느것과도 섞이지 않는 평행선으로 우리들 삶중간을 꿰뚫고 누구나 손목에 찰수 있을 만큼 많아졌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대화를 하는 유부녀(신옥과 장미) 둘은 그들에 인연의 끈을 위해 뉴욕이라는 먼곳을 택했고 동창이라는 설정에 반가워했다. 대화의 주체로써 유부녀들은 과거와 현재를 공간에 배제된 상태로 그동안 공허로 남아있던 그들에 인연의 끈을 이으려한다. 그들의 남편들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에 책임을 맡고 있다.
몇가지 설정된 대화관계, 즉 신옥과 장미, 신옥과 장미의 시누이, 신옥의 남편과 장미의 남편, 은 제대로된 선형적 구도에서 점차 순환적인, 복합적인 연결로 어지럽게 뻗어 나간다. 간간히 대화속에 인용되는 닥터유(장미 시누이의 남편)의 환상적인 운명은 시공을 잇는 삶에 도정을 의미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해 질 수 있는 대화소재를 하나의 점으로 이끄는 구심역할을 한다.
"시인(詩人) 이태백은 시간은 지나가는 과객이라 읊었으나,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물현상뿐이더라, 시간은 '늘' 그대로다. 그래서 오'늘'이다"
닥터유의 독백같은 추억속에 간간이 산재되어 있는 이런 시간정의는 인간 개개인의 의식에 접근하고 대화 주체들의 개념적인 행동양식을 정하는 역할로 자리 잡는다.
시계라는 모티브로 전개방식을 정하고 미국교포사회와 한국적 현실-분단, 민족정체성, 인종, 언어장벽-을 대비시키고 자칫 주제를 빗나가는 소재적 빈곤의 극복을 인공수정과 결혼등으로 매꾸고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이 소설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열정적이고 애끊는 만남과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그들의 대화속에선 그런 거추장스러움은 대화거리 조차도 되지 않는 듯한 구성이 사뭇 제목과 대비되어 독자를 조롱한다.
"대화는 피곤합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부부사이에는 대화가 오히려 없는 것이 좋습니다....중략... 어떤이는 사랑을 한답시고 주고주고주고, 어떤이는 주고받고, 주고받고 어떤이는 받고받고받고, 그런데 어떤이는 시간과 공간을 줍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이어서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될일이 아닙니다."
신옥 남편의 대사는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다. 인간관계로 깊이 자리잡은 부대낌과 미움과 고움의 정, 구속같은 사랑을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연한 개기지만 강한 인연과 우연성으로 만난 결혼에 개인적인 독립과 암시적인 주장으로 익명적 행복을 요구한다. 행간 밑에 잠재적으로 깔아놓은 분단이라는 모티브와 개인 또는 민족의 정체성은 사실 커다란 줄기는 아니다. 간혹이지만 자연적, 또는 인공적인 생명의 연장이 소설을 이루는 페러다임으로 보고 싶다.
그런 연속선상에서 시간, 공간, 인위적인 국경같은 것에서 조차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이 예감을 의미하는 사랑으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대화의 종점에서 그들은 서투른 만남을 기약하지만 연속선상에 생명을 믿지 않았고 생각보다 빠른 만남이지만 그들에 존재는 다시 원래의 섬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올림픽은 그 우연성을 촉매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은 못됐다.
이 소설은 1장은 뉴욕, 2장은 서울의 상반되는 구도속에서 상대적으로 작아진 사적공간과 만남의 우연성을 소설적 필연으로 연결시키며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속성을 말하려 한다.
2장은 1장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혼자사는 그저 평범한 여자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지만 약간의 특별한 장치가 있다. 다시금 등장하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합성되어 1장에서 부부라는 태초적인 본능적 관계를 부인하는 인위적 효과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납북된 남편에 대한 한스러운 망부가는 아니다. 단아하고 단정한 이야기 흐름은 어쩌면 5년이라는 시간차가 덮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호한 안정감이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현실속에서 무거운 안정을 유지하다가도 무의식상에서 보여지는 환영과 환청을 꿈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질때가 많다. 그 무의식의 현상속에서 수천년전부터 정해져온 인류의 것, 생성과 소멸은 여성의 봉긋이 오른 배에서 생성을,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고속, 구역질나게 찢겨진 시체에서 소멸을 보여줌으로써 대비되는 시공, 현실과 꿈을 관조적으로 매듭 지어버린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만남이 이곳에서도 있다. 여자와 신옥의 남편, 지루한 서술 끝에 분열적인 대화는 이상하리 만치 운명적임을 상징하려는 질긴 교감이 눈길을 끈다.
"저도 살아나가 기쁨니다... 중략...
아내의 뱃속에 든 아기를 초음파로 검사해 보았습니다. 눈물이 솟더군요 감동이 치밀어 울다가 웃다가 했습니다. 장례식을 가봐도 그렇고 사람들은 죽는일과 태어나는 일을 큰일인 듯 여기지만 그중간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언제 죽는지 다 잊어먹고 그냥그냥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구나"
너무나 먼곳에서부터,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간의 생성과 소멸을 눈앞에 대놓고도 시리도록 감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과 생명의 잉태는 자기유사성이라는 독선으로 말미암은 침착함 같은 것이다.
생명에 대한 아집은 너무나 본능적이다. 소설은 그런 아집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인간의 만남이 영원은 아니지만 공간과 공간속을 연결하는 목숨으로 인간은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진다. 부부라는 질긴 끈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끊기도 하고 잇기도 한다.
생명이 그들의 의지에서 비롯됨을 의미하듯이 약속시간을 정한다. 사랑의 예감은 그런 연속적인 생명의 흐름속에서 단호함을 보여주고 열정적이지 않아도 우연같은 만남속에 사랑을 의미하는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생명은 그런 사랑을 감격으로 알게 해준다. 멀거나 가까워도 그것은 교감으로 교통으로 이어준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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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ive is life 2005/03/25 13:45
독후감, 김지원의 '사랑의 예감'(이상문학상 당선 '97)을 읽고...'생명이 있는한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예정된 사랑'플롯부터 다른 글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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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5/04/15 09:5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좋은 선배세요. 이 글을 보고 갑자기 좋은 묘안을 떠올리고 갑니다. 옥상으로 팀원들을 하나씩 불러내서 '밀어줄까?' 물어봐줘야지. ^^
Jack 2005/04/15 12:4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그렇게 좋은 선배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