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기고 나서 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는 염려가 있다. '혹시 이 아이가 갑자기 죽지나 않을까, 병에 걸려서, 한창 걸음마 중에 넘어져서 사고로..' 심히 불경한, 나아가 분열증에 가까운 염려 때문에 아이가 방에서 혼자 자고 있으면 아이의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가끔 확인도 한다. 아이가 금새 13개월이 됐다. 아이는 옹아리를 언어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온갖 외계어로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잡고 어미에게 건내기도 하고 빨대로 물을 마시며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넘어가는 과정을 차례차례 아비와 어미에게 시연해 보인다. 아이가 13개월이면 사고를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소유의 개념은 모르겠지만 손아귀에서 빼앗기는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아서 울고 소리를 지른다. 나아가 그야 말로 조직적으로, 이렇게 울고 소리를 지르면 아비든 어미든 빼앗은 상황을 돌이키려 애쓴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는 워낙에 부산스러워서 안고 있어도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아비는 아이에게 '그만' 이란 지구어로 말하고 아이는 안드로메다를 향한 외계 소통을 시작한다.
가족의 달, '사랑' 이란 주제로 MBC 가 휴먼다큐멘타리를 방송하고 있다. 요즘엔 이런 다큐를 보는 것도 곤욕이다. 아이와 부모가 얽힌 회복되기 힘든 상황 속에서 가족, 사랑 같은 일상에선 단물 다 빠진 감정이 얼마나 숭고하게 작동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눈물 몇 방울로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소심해졌다. 내가 저럴까봐 겁나고 어미가 혹시나? 해서 더 겁나고 우리 아이는 어떻게.. 여기까지면 우울과 분열증이 융단 폭격을 가해버린다. 이쯤되면 사랑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조악한 상상의 결과겠지만 아이를 빌미 하는 모든 것에 허약해진 이성이나 자존감을 발견하는 일은 흔하디 흔해 빠진 스토리다.
육아는 아이가 자라면서 아비, 어미를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인가 보다. 세상이 아무리 흉악하여도 수천년동안 인류가 겪어 오며 그나마 사람 사는 곳 처럼 보일 수 있던 이유가 육아의 과정이 염색체 인자로 인류에게 자리 잡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아비, 어머가 아이를 위해 현대 의학이 규정하는 정신적, 육체적 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임상적으로 그런 경우를 민족적 특성을 빌어 '화병' 이라 WHO 조차 규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 있다. 물론, 육아 과정에 반드시 임상적 화병이 동반된다거나 화병 자체의 인과관계가 육아에만 국지된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이 환자들을 민족적으로 내지는 국제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만, 희생이란 숭고한 수사로 위로가 가능하다. 이 악랄한 세상에서 부모가 아이를 사고로 부터 회피 내지는 지켜내는 것에 어떤 정치나 사회성이 가미될리 없다. 미혼일 때 이른바 개차판이었더라도 기혼과 출산의 상황이 벌어지면 육아와 희생의 유전자가 복원되는 것이 일반적인 영장류다. 사실 환자가 되는 지점은 아비와 어미가 스스로를 지혜롭고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발병한다. 어이 없게도 호모사피엔스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잠복기를 거치고 호모사피엔스가 되었을 때 발병 악화된다. 육아의 단계에선 부모가 환자가 되는 시기를 '교육' 이라 부른다.
외계어를 구사하는 13개월 영장류에게도 지구어와 지구의 온갖 이미지로 편집된 책이 필요 하다. 아이를 지구로 불러 오는 작업인데 방식이 다르다. 한국어로 불러 오느냐 영어로 불러 오느냐 차이가 난다. 아니, 난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아이가 어떤 언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된다. 다들 알겠지만, 한국어를 알기 전에 영어을 알아야 하는, 알도록 하는 교육의 방식이 오늘날 부모들에겐 중흥의 역사를 쓰는 사명이 됐다. 지혜로운 부모들 중에서도 더 지혜로우려면 더 빨리 아이의 입에서 "에이", "비", "쒸" 를 나오게 만드는 방식을 도입한 부모가 되면 된다.
아직도 '어륀쥐' 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울러 '학원 영업을 10시까지만 허용하겠다' 는 지배구조를 헤아리지 못한 멍청한 선언도 여전히 비웃을만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현상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 맘껏 비웃고 조롱해도 개개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륀쥐와 학원의 메카니즘은 현실 정치의 아류나 다름이 없다. 정치는 정치고 교육은 교육인 것, 애써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뤼쥐를 못해 사회적으로 낙오 되는 끔찍한 공포에 대결할 수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 아비, 어미는 좌파가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이명박이 만들었을까? 도처에 깔린 학원의 선동 때문일까? 아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됐다.
아이에게 선택의 폭을 넓게 주지 않는 파렴치한 부모들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폭이다. 정치적 신념이 아닌 것이다. 아이의 적성이 대통령이나 과학자 보다 더 다양한 스팩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직한 부모들의 희생이다. 그 요로에 영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영어는 선택의 폭 따위도 아니고 그냥 언어의 일 뿐이다. 좀 더 무게를 둔다면 수능의 골격 쯤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게 이런 잣대가 어울리기나 한가. 영어는 자본주의, 글로벌 지향 사회의 선악과 다. 한번 베어 물면 경각심, 공포, 할아버지의 땅, 어륀쥐, 이명박, 학원 이 줄줄이 새 나온다. 아이가 선택을 생각하기 전에 아비, 어미가 베어 문다. 문제는 유전자다. 이것을 베어 물지 않으면 호모사피언스가 되지 못한다. 아니, 아이를 망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아이를 위해 희생 하지 않는 부모는 강제연행감이다.
영어를 하게 되면 외국인을 편하게 만날 수 있다. 가끔 연애질에도 도움이 된다. 취업? 당연히 도움이 된다. 영어는 유용하다. 단지 유용할 뿐이다. 강제연행된 부모들을 좌파로 몰아 넣는 논리가 여기에서 작용한다. 즉, 영어불용, 내지는 영어척결을 주장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조서를 꾸민다. 나는 한번도 영어를 배워서는 안되는 언어,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조서에는 언제나 선처를 바래야 한다. 영어의 지위가 이쯤되면 상류층이고 이러한 지위는 고스란히 각 가정에 전가된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그 고유의 스팩트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영어 교육을 받느냐 못받느냐 차이로 발생하게 된다. 받는 축에서도 몰입식, 문화 체험형, 조기유학형, 부띠끄형 그 다양한 패턴에 따라 계층적 차이를 보인다. 영어 교육의 질적 차별이 사회적 인간적 계급으로 승화되는 현실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영어가 언어이고 수능의 골격이라면 공교육이 문법과 회화를 가르치면 되고 가르친 대로만 시험 문제가 출제되면 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유전자가 문제다.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교육 기관의 대표이사의 말에서 어쩔 수 없는 벽을 본다. 유전자가 문제인데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는 당연함을 당연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것을 받아 들이면 역시 좌파다. 노래방 도우미를 나가건,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하던 어떻게든 유전자를 극복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희생의 범주는 아이를 병이나 사고로 부터 보호하고 회피하는 일련의 본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되어야 한다. 유전자를 바꾸는 일인데 정상적인 상태에서 할 수 있을꺼란 생각은 한가롭기만 하다. 사교육의 시작은 대게가 영어다. 언어가 감수성, 소통, 계몽의 수단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 이상 영어의 지위는 날로 향상된다. 부모들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영어로 잘 말하려면 사유체계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 부분을 간파한 강남에 살고 석.박사이면서 경제력도 되는 부모들의 영어사교육은 놀랍긴 하지만 이들은 환자가 아니다. 이들은 유전자가 그렇다. 대한민국 1%의 유전자,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날로 영어의 지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영어를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고 영어가 자신이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정치성향과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환자다.
한국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니다. 영어에 관한 교육적 문제는 정치적 신념이며 사회 구조다. 영어는 우리 사회의 엄연한 계급적 문제다. 영어로 인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무산와 유산의 명확한 경계가 가능하다. 영어가 계급적 문제가 된 사회, 수백년전 한문으로 소통하던 사회, 수십년전 일본어로 사유하던 세대와 오늘날 부모들의 광기에서 어떤 은밀한 맥락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지나친 비약이라 볼 수 있을까.
- 13개월된 딸에게 영어로 된 동화 전집을 사주겠다는 집안 문제? 로 인해 두서 없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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