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

2007/06/17 02:46 / 생각

잘 살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사랑? 늦은 밤에도 파자마 바람으로 부러 나와주는 친구? 요즘 세상에 이런 낭만스러움은 싸이월드에 박제된 안락한 자랑이나 안도다. 보다 현실적인 안도는 도시 근로자 평균 임금보다 웃도는 자신의 임금을 재발견 할 때, 가구당 평균 부채를 걱정하는 뉴스 아나운서의 어두운 표정을 보며 미소지을 수 있을 때 이다. 잘 살려면 기본적으로 재발견의 미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미소에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시선이 존재하는데 대게 잘 살려는 개인적인 기준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맞춰진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을 사회적 기준으로 오인하는 대중영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잘 살려는 개인적 기준으로서의 의지는 이율배반이 되거나 반사회적인 불순 분자가 되기 일쑤다. 여기에서 잘 살려는 개인적 기준 또한 모호한 것이 개인적 다양성인지 아니면 공공선에 대한 의지 박약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희생을 통한 배려를 위해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희생을 통한 배려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을 넘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문제이다. 정확히는 공화주의의 부재.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남한의 정치역사가 의례 그러했듯 현실적으로 더 잘 살려는 것을 추구했고 그것을 이룩해주는 것이 민주주의인양 선전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 사대사상은 신자유주의와 구분점을 잃었으며 정치와 언론은 민주주의를 향한 추파 만이 정치적인 고감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고착화시켰다.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오직 민주주의는 정치인이나 언론이 만들어낸 조각에 불과하다. 주위를 둘러 보라, 민주적인 것은 알량한 투표권 밖에 없다. 투표권조차도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 소속이다. 투표권이 알량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공화적인 행동을 통해 잘 사는 것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든, 즉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잘 살려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 또는 그 형식에 대한 아름다운 계몽이 없었던 사회구조의 문제로 치부해도 결코 틀리지 않다. 잘 산다는 것, 그것이 결코 강남에 아파트, 귀족적 대화, 다듬어진 네일, 아메리칸 스타일의 브런치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 결코, 사회의 천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개인적인 얘기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2007/06/17 02:46 2007/06/17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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