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정의는 국사 점수에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얻은 지식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역사 자체를 구태의연하고 고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학문으로 폄하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역사를 조망하고 현실을 진보시키는 그야말로 역사관의 역할은 알싸한 부동산 투자 정보 보다 저급한 취급을 받아도 이의가 없을 지경이다. 하다못해 역사관 운운 따위는 엘리트 의식에서 나온 이기주의의 소산으로 즐거운 술자리를 망치는 식상한 이야기이거나 지배 계급의 논리를 추대하는 정치적 메카니즘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였다.
지배 계급은 역사를 통해 기득권을 쟁취하고 영위한다. 즉, 정치의 흐름에 영합하고 들쭉날쭉한 여론 몰이배로서 역사를 들먹이며 민중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그들의 역사관 속에는 현재의 정치 안목과 국가의 안위 따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거나 주입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론이나 국익에 목마른 대중들의 애국감정에 호소하여 역사의 본질을 꽤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 목적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근간이 사상이나 교양의 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거취가 만들어 낸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부도덕하게 관리하고 세습한 결과로 불리우는 기득권을 수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이러한 기득권을 착취 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의 본질을 진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조망한 진보로 규정한다. 대중들이 현안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집적거리는 이유도 과거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없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에 빗대어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관을 통해 기득권이 착취되지 전에 지배 계급의 정략에 현혹되어 그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인양 합리적이지 못한 계급 동질화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권을 획득한 민주화의 노력을 마치 지배 계급의 아량으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모든 민주화가 이루어 졌고 그들은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 처럼 과거를 이해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남한 대중의 정치 수준은 남한의 민주화가 선거권이라는 공화주의의 형식을 갖춤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지점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한 인권과 인간성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천박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라는 취미의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부재하다. 대중들의 무지는 그 열띤 파쇼와 포퓰리즘이 속성도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행위가 어떻게 책임을 전가하고 권력으로부터 무한한 보호를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양심과 의식에 지독하게 악랄하여 단기적으로 무마할 수 있으면 장기적으로 면책 되는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옮바른 역사관은 청산하는 역사관이다. 전쟁을 벌인 자,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한 자,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옹호한 자들을 청산하는 것이 옮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관은 기득권을 착취하고 반지성적인 지식인을 지배할 때 바로 선다.
지배 계급은 역사를 통해 기득권을 쟁취하고 영위한다. 즉, 정치의 흐름에 영합하고 들쭉날쭉한 여론 몰이배로서 역사를 들먹이며 민중의 시야를 흐려 놓는다. 그들의 역사관 속에는 현재의 정치 안목과 국가의 안위 따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역사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거나 주입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론이나 국익에 목마른 대중들의 애국감정에 호소하여 역사의 본질을 꽤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 목적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근간이 사상이나 교양의 고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역사속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거취가 만들어 낸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부도덕하게 관리하고 세습한 결과로 불리우는 기득권을 수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이러한 기득권을 착취 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역사의 본질을 진보로 보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조망한 진보로 규정한다. 대중들이 현안의 본질에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두리를 집적거리는 이유도 과거를 충분히 조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없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역사에 빗대어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관을 통해 기득권이 착취되지 전에 지배 계급의 정략에 현혹되어 그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인양 합리적이지 못한 계급 동질화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권을 획득한 민주화의 노력을 마치 지배 계급의 아량으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모든 민주화가 이루어 졌고 그들은 역사적 책임을 다한 것 처럼 과거를 이해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남한 대중의 정치 수준은 남한의 민주화가 선거권이라는 공화주의의 형식을 갖춤으로서 완성되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지점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공화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갖추기 위한 인권과 인간성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다.
천박한 역사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들은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고' 라는 취미의 기준으로 현상을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한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은 부재하다. 대중들의 무지는 그 열띤 파쇼와 포퓰리즘이 속성도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반지성적 행위가 어떻게 책임을 전가하고 권력으로부터 무한한 보호를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일반 민중들의 양심과 의식에 지독하게 악랄하여 단기적으로 무마할 수 있으면 장기적으로 면책 되는 어두운 역사의 고리를 끊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옮바른 역사관은 청산하는 역사관이다. 전쟁을 벌인 자,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한 자,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옹호한 자들을 청산하는 것이 옮바른 역사관이다. 따라서 역사관은 기득권을 착취하고 반지성적인 지식인을 지배할 때 바로 선다.
Trackback URL : http://drunkenstar.x-y.net/tt/trackback/463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