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강도 높은 야근에 남아 나지 않는 건 체력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온데간데 없다. 마음은 급하고 즉석해서 신기술을 공부하며 장표에 그려내는 작업을 오래간만에 진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과는 정확하게 단절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부담이 교차되고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면 기름칠이 잔득 된 베어링에 가동되는 밀링머신과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끼니를 굶어 칼로리를 공급받지 못한 뇌는 여러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베어링을 돌리는데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노동과 가동의 차이가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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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여행자 2006/12/09 13:41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글이 산만합니다. 좀더 솔직한 글쓰기가 되려면 현학적이고 적절하지 못한 단어사용을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글도 있었지만 거부감이 드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상하지 않으셨길......죄송합니다
Jack 2006/12/09 17:17 편집/삭제 댓글 주소
적절치 못한 단어 사용이 컨셉인데, 역시 산만하군요...
야근해서 그런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