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하는 주체는 소비의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이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같을 때 얘기다. 어제 한겨례의 박노자 칼럼에서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TV 매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이건 논란거리도 아니다. 박노자씨가 약간은 이상적인 제시를 한 부분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 낸 고도의 언론 플레이와 상업 광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노자씨가 지적했듯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매몰 상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기능적이었던 불편한 것들이 심리적인 불안한 상태로 전이된 것을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군중속의 고독이라 본다면 이러한 류의 고독에서 예외적인 인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태를 겪고 있으면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 자체가 고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은 대게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현 체제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즉, 당신이 있는 그곳도 자본주의 체제와 제도가 움직이고 작동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곤 한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해로움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몇몇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완전 거부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와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제공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는 상태 즉, 적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의 인식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무경쟁의 상태라든지, 완전 분배의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과 불균형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리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원하고 보편 타당한 분배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을 경우에는 국지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해방의식이다.
형평성을 이룬다는 측면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해온 성장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마땅히 실패했다는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상태는, 자본이 원하는 체제유지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도시근로자들과 체제유지와 반공주의에 종속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 GDP 와 무역수지만이 유일한 성장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든 보수언론들의 책임은 이미 논할 가치조차 없어졌다. GDP 와 무역수지가 떨어지면 구성원들에게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대며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 조차 모르는 도시 근로자들의 의식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언제든지 자본의 구조속에서 중산증이라 생각한 알량한 지위가 빼앗길 수 있는 일련의 사례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하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를 견제하는 보수의 입장은 대체로 현체제의 붕괴를 염려하고 그러므로 발생하는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통해 공산주의화 되는 일련의 과정을 프로파간다 한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그들이 경계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일어 날지도 모를 공산주의화가 자생적 이념이 아닌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 생기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없어 졌을 경우, 붕괴 되었을 경우, 또는 통일이 되었을 경우, 그들의 주된 주장을 근거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한다.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민족적 소원의 붕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통일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섣불리 반대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고, 정작 통일의 방식이 민족자결에 의해 진행되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하는 북한의 존재와 미국에 대한 의존은 통일의 방식에서 조차 미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체제속으로 급속히 변질된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밀스럽게도 북한의 붕괴와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언한다고 했을 때 남한의 보수가 이를 반대할만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괴리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해소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여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통일을 논해야 하고 혁명을 진지하게 담론해야 하는 상황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작금의 문제를 좌와 우의 날개짓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세는 결국 사회대변혁을 요구 받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일어날만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자본주의가 더 그 해로움을 전파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판을 바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한시대를 풍미하며 살고자 희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마땅한 인간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몇몇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완전 거부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와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제공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는 상태 즉, 적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의 인식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무경쟁의 상태라든지, 완전 분배의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과 불균형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리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원하고 보편 타당한 분배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을 경우에는 국지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해방의식이다.
형평성을 이룬다는 측면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해온 성장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마땅히 실패했다는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상태는, 자본이 원하는 체제유지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도시근로자들과 체제유지와 반공주의에 종속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 GDP 와 무역수지만이 유일한 성장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든 보수언론들의 책임은 이미 논할 가치조차 없어졌다. GDP 와 무역수지가 떨어지면 구성원들에게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대며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 조차 모르는 도시 근로자들의 의식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언제든지 자본의 구조속에서 중산증이라 생각한 알량한 지위가 빼앗길 수 있는 일련의 사례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하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를 견제하는 보수의 입장은 대체로 현체제의 붕괴를 염려하고 그러므로 발생하는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통해 공산주의화 되는 일련의 과정을 프로파간다 한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그들이 경계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일어 날지도 모를 공산주의화가 자생적 이념이 아닌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 생기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없어 졌을 경우, 붕괴 되었을 경우, 또는 통일이 되었을 경우, 그들의 주된 주장을 근거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한다.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민족적 소원의 붕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통일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섣불리 반대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고, 정작 통일의 방식이 민족자결에 의해 진행되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하는 북한의 존재와 미국에 대한 의존은 통일의 방식에서 조차 미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체제속으로 급속히 변질된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밀스럽게도 북한의 붕괴와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언한다고 했을 때 남한의 보수가 이를 반대할만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괴리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해소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여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통일을 논해야 하고 혁명을 진지하게 담론해야 하는 상황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작금의 문제를 좌와 우의 날개짓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세는 결국 사회대변혁을 요구 받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일어날만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자본주의가 더 그 해로움을 전파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판을 바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한시대를 풍미하며 살고자 희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마땅한 인간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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