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나 FTA 처럼 미국이 꾸며가고 있는 체제가 그들이 행한 온갖 악행에 비해 중장기적이란 의미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인 자기 분열의 이론들이 유기적 합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일단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게 되면 책임 소재상 하이라키 구조의 상층부는 넓은 하단의 유기적 조합 때문에 소재를 규명할 수 없게 되고 좋던 나쁘던 그 영향은 구조의 하층부에 가장 포괄적인 영향이 미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점은 좋던 나쁘던 하층부에도 미쳐야 할 영향을 때어 내어 나쁜점 80%를 하층부에 지속시킨다는 점이고 좋은 영향을 취해가는 먹이사슬의 상층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구조체를 WTO 나 FTA 가 실행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 를 반대하는 세력은 이 협정의 전반적인 의제에서 볼 수 있듯, 거의 모든 경제구성체에 대한 포괄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계급의 입장에서 서로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반대 담론을 내고 있기 때문에 짐짓 범국민적인 여론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논리는 미시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미 FTA 를 반대하고 협상 중단를 요구하는 반대는, 공화적 공동체와 소수자 입장에서의 반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FTA 의 반대는 반미의 입장이 명확하게 들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구적 반공주의자들에게 친북세력이라는 색깔론을 듣기 마련이다. 소수자의 입장은 계급성과 관련이 없다 할 수 없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선험적 계급성으로서의 노동자와 농민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유령처럼 떠 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규정하던 소수자의 정의는 시민적 권리와 인권으로 이양되었고 그로 인해 투쟁의 주체는 광범위하게 억압 받고 있는 모든 개인으로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 - 여기에도 억압 받고 있고, 억압 받을 수 있는 시제의 규정이 있어야 겠지만 언어 도단을 피하고자 넘어가자 - 이러한 반대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적 체제에 생리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소수자를 절멸시킨다는 선견적 태도에서 나온 의지로 볼 수 있다. 한미 FTA 를 통해 소수의 지배 계급들이 누릴 이익과 권리를 다수의 권리 소수자와 공동체를 위해 분배되어야 하다는 점은 응당 한미 FTA 의 반대와 중지 요구자들의 이념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반대는 한미 FTA 가 액면적인 경제 협정이 아니라 평화정착을 저해하는 각종 안보적 요소들까지 함유하고 있다는 범위까지 통찰하게 됨으로써 FTA 찬성론자들인 신자유주의자들과 매파들에 의해 불순 분자로 매도 되는데, 이 지점이 세계를 혜안하는 안목이 미국에 쏠려 있는지 진정한 세계와 민족에 있는지 구분하는 명료한 잣대가 된다. 덧부치자면, 한미 FTA 반대, 중단론자들은 대체로 FTA 자체를 반대한다. 즉 다른 나라와의 FTA 도 반대한다. 열세적인 국가에 대한 공세적인 경제와 제도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 또한 공동체적 반대의 핵심이다.
황우석씨를 통해 홍역을 치루고 있는 국익 이론이 한미 FTA 반대 여론과 같이 한다는 점은 특이할 만한 내용이다. 지금 한미 FTA 를 하게 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대는, 역으로 국익이 된다면 다른 나라와(미국조차도) 체결하는 FTA 는 찬성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반대는 이를테면 한중 FTA 는 대체로 찬성하는데, 아직도 중국이 경제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못하다는 호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다. 한미 FTA 를 반대하지만 지금은 반대한다는 논리에서 쉽사리 FTA 지연의 논리를 도출한다. 이 협정을 천천히 진행하여 챙길 국익은 챙겨야 한다는 반대가 결국은 국익이 없으면 하지 말자는 강경한 자세로 변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러한 반대는 국가적 측면의 접근 방식을 통해 국가가 취하는 이익이 소수 이익집단에서 구가하는 이익일 뿐이라는 FTA의 근본 영향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공동체적 이익이 아니라 집단 이익의 계통을 밟아 간다는 점, 따라서 집단의 이익이 되는 다른 나라와의 FTA 는 찬성한다는 점은 보호 받아야 할 나라의 보호 받아야 할 민중들에게 피지배를 강권하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논리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우파적 반대라도 끌고 가야 한다는 담론이 있다. 수세와 공세의 논리에서 수적인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국지적 혁명 역사를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미 FTA 에 대한 팩트를 토론하는 몇몇 의미 있는 자리에서도 드러난 정부의 허구와 난무하는 추정치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선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서 계상된 지표는 오로지 자본의 성장과 유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탄력성이 적은 쪽은 찬성을, 많은 쪽은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계급을 불러 온다. 물론, 이러한 개급 관념이 반대 시위로 표출되는 시민운동의 현장에서도 대체로 동일하게 가지는 관념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계급과 집단의 논리가 지나치게 지배하는 반대 현장의 분위기는 소박한 개인이 접근하기에 다분히 위협적이다. 반대의 논리를 실질적 반대의 성과로 이끌기 위한 수(數)적 저항이 필요한 시기일 수록 그 캐즘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 또한 현장을 엄습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과 관념 때문임을 반성해야 한다. 그래도 강경한 한미 FTA 의 중지 선언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 계급적 연대감의 회복을 성장만으로는 풀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한미 FTA 를 추진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얄팍해지지 않기 위해서 조치해야 할 이익의 재분배 장치는 애당초 없는데다가, 그나마 추진되던 개혁이라는 소극적 이름조차도 연대감은 커녕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공동체를 부양하기도 전에 수구우파 세력에 의해 와해 되어가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내가 한미 FTA 를 반대하는 감수성은 그것의 중단과 FTA 체제 자체의 보이콧에 있다. 다만, 그 공동체의 경험이 집단이나 거대 깃발의 기치 안으로 무작정 스며들거나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혁명의 순간을 잃어버린 또 다른 광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에 대응하는 가치가 자본이 될 수 없음을 지향하는 세계관은 공동체에게, 개인이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마땅한 가치의 보존을 요구한다. 한미 FTA 처럼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자본의 역할을 증대하는 이러한 외부적 요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인격체의 인간으로서 적당한 지위를 찾지 못하고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는 공동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한미 FTA 를 반대하여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고귀한 지향은 개인이다. 개인으로서 그것을 반대하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저항, 개인에게 처해지는 집단의 능욕에 대한 저항, 대체로 권력이 개인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한미 FTA 는 자본을 도구도 중장기적으로 치루려 한다. 이것은 저항조차 거세한다. 천천히 지속적인 능멸을 통해, 익숙함과 달콤함을 번갈아 사용하는 자본의 힘을 통해 개인의 모든 것은 집단에 예속될 것이다. 개인이 지니는 모든 지향점은 집단의 폭력과 억압 앞에 무기력하게 파멸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대한다. 개인을 받아 들이는 모든 방식, 그 개인들의 열정과 저항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일 것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개인에 있어서도 말이다. 한미 FTA 와 FTA 체제는 그것을 무시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 FTA 를 반대한다.
Trackback URL : http://drunkenstar.x-y.net/tt/trackback/396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