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5년전에 무버블타입을 설치하면서 블로그를 하기 시작했으니, 그때 썼던 글들이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아카이브가 되었을 터였다. 무버블에서 피머신으로 옮기면서, 사랑에 치였고 역사는 잊혀지기 쉬운 곳으로 입양되었다. 그 역사에 아까운 것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나 사랑하고 이별하며 생겼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감정들이 그것이었다. 솔직히 그 보다 사랑하기 위해 따로 열심이었던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미루고 공부하고 정리해갔었던 수많은 업무 모델과 정신과학적인 모형들, 안국동을 쏘다니다가 문인들과 어울려 오랜 술에 쩔어 새벽을 맞게되면, 되도 않는 시를 낭송하거나 등단하겠다는 지망생들과 어울려 문파를 조직했던 일, 미술학원 두달 다닌 미천한 예술 경력에도 불구하고 집착 성향마저 보였던 서양 미술사 등이 있다.(생각해보니 이별하고 그리움 때문에 생긴 취미도 있다. 사진)
사랑해서 보신탕 맛을 알게 되었다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처럼,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비록 입양되어 그리울 수 밖에 없지만, 술이 깬 아침에 기억은 나지 않아도 몸이 지난 밤 한 일을 느끼는 것처럼 감정의 아카이브가 되어 사랑을 하지 않는 지금에도 삶의 온전한 일부가 되어 있다. 때때로 그 영위의 것, 예전에는 없었는데 사랑하다가 생긴 일부가 미래의 나를 가르키며 '그것이 되라' 던가, '그것을 해라' 던가 불쑥불쑥 얘기하는 통에 당황할 때가 있다. 그저 존재자로 낯설게 하지 않고, 나의 존재로써 내 적잖은 삶이 살아지는 동안 이탈하지 않고 꼭 안겨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갈등은 애초에 안착의 성질이 없는 것 같다.
안착은 차재하고 갈등은 말굽 자석처럼 완전히 다른 갈등을 간단히 끌어와 부쳐 버리는 성질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를 사랑하게 되어 현재 온전한 삶에서 갈등이 된 것들이 있다면, 정치시각과 언어관점은 이제 나서 한창 걸음마를 하는 갈등이다.
정치시각에 변화가 온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해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살아야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따로 따로 생각했던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꺼번에 고민하게 되었고, 따로 때어 냈을 때 무엇이 현상의 무엇으로 국한되었다면, 같이 고민했을 때의 무엇은 철학의 무엇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자연히 내 생각을 표출하는 이런 공간은 어떤 철학인가로 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행위가 한정되어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직한 표출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다시 한정하기 때문에 일단 표출하는 이런 공간에 생각을 배설하고 나면 가벼운 목로의 주점에서도 자유로운 행위 이전에 생각이 절제되고 절제된 만큼 이전에 분방했던 행위가 제한되어 갑갑함을 느낄때도 있다. 그래서 아직 성찰이 덜 된 탓이라, 아예 끝까지 술을 마셔버리고 태초의 인간의 되어 버리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몸은 갑갑해도 생각은 자유로워서 그냥 친구여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 웃음이 되어 버리던 이야기도 토론이 되곤 한다. 친구가 화장실이라도 가고 나면 왜 아직도 저런 비인권적이고 수구적이면서 투철한 자본주의적 생각만으로 제단을 할까? 앞으로 대화가 안되겠거니 하곤 했었다. 하지만, 좌파건 우파건 그들끼리 이념이 다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듯, 실은 이념시각 이전에 정치시각은 품위와 태도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깨닿는다. 그러고 보니 대화가 안통하던 친구가 있어 토론이 되고 바람 잘 날이 없기에 술자리도 재미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른, 즉 완전히 다른 시각이 존재하는 관계도 태도가 서로 공유된다면 마찬가지 일 것 같아 보인다.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시각이 달라서 어느 한쪽은 매장되어야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시각도 마찬가지지만, 언어관점은 특히나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긴 것이 아닌, 이제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선언하고 나선 대표격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컨설팅을 하면서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와 어감의 차이가 실제 살아온 삶과 생각의 바로미터가 되고, 더군다나 미래 소실점의 위치가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인 사용법이 아니라 정치시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유추되는 언어감정과, 그 언어가 만들어진 본래의 관점들을 조망해보는 의도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는 곧바로 갈등이 된다. 언어관점을 새로 바라보자니 시덥지 않은 것도 취향에 맞지 않은데다가, 그것을 따르자니 상당한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겠음을 많이 느끼게 된다. 그것이 미학이던, 경영학이든, 정치학이든지 간에, 언어를 통해 현상, 현안을 조망하는 다양한 관점의 기술은 지금 시작한다고 해서 나중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기원이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생겨난 것이므로 나의 오롯한 조망은 단지 꿈이거나 상상일수도 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필연적인 것 보다 대체로 우연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우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 날 수 있는 일이고, 아니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 하는 것.
언어의 조망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다른 상상을 기술하고픈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욕심에서 시작했기에 여러 사람이 같이 꿀 필요는 없다. 나의 사사로움을 읽고 다른 꿈을 꾸어도 그로써 멋지고, 아름다울 테니까.
사랑해서 보신탕 맛을 알게 되었다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처럼,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비록 입양되어 그리울 수 밖에 없지만, 술이 깬 아침에 기억은 나지 않아도 몸이 지난 밤 한 일을 느끼는 것처럼 감정의 아카이브가 되어 사랑을 하지 않는 지금에도 삶의 온전한 일부가 되어 있다. 때때로 그 영위의 것, 예전에는 없었는데 사랑하다가 생긴 일부가 미래의 나를 가르키며 '그것이 되라' 던가, '그것을 해라' 던가 불쑥불쑥 얘기하는 통에 당황할 때가 있다. 그저 존재자로 낯설게 하지 않고, 나의 존재로써 내 적잖은 삶이 살아지는 동안 이탈하지 않고 꼭 안겨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갈등은 애초에 안착의 성질이 없는 것 같다.
안착은 차재하고 갈등은 말굽 자석처럼 완전히 다른 갈등을 간단히 끌어와 부쳐 버리는 성질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를 사랑하게 되어 현재 온전한 삶에서 갈등이 된 것들이 있다면, 정치시각과 언어관점은 이제 나서 한창 걸음마를 하는 갈등이다.
정치시각에 변화가 온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해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살아야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따로 따로 생각했던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꺼번에 고민하게 되었고, 따로 때어 냈을 때 무엇이 현상의 무엇으로 국한되었다면, 같이 고민했을 때의 무엇은 철학의 무엇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자연히 내 생각을 표출하는 이런 공간은 어떤 철학인가로 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행위가 한정되어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직한 표출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다시 한정하기 때문에 일단 표출하는 이런 공간에 생각을 배설하고 나면 가벼운 목로의 주점에서도 자유로운 행위 이전에 생각이 절제되고 절제된 만큼 이전에 분방했던 행위가 제한되어 갑갑함을 느낄때도 있다. 그래서 아직 성찰이 덜 된 탓이라, 아예 끝까지 술을 마셔버리고 태초의 인간의 되어 버리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몸은 갑갑해도 생각은 자유로워서 그냥 친구여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 웃음이 되어 버리던 이야기도 토론이 되곤 한다. 친구가 화장실이라도 가고 나면 왜 아직도 저런 비인권적이고 수구적이면서 투철한 자본주의적 생각만으로 제단을 할까? 앞으로 대화가 안되겠거니 하곤 했었다. 하지만, 좌파건 우파건 그들끼리 이념이 다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듯, 실은 이념시각 이전에 정치시각은 품위와 태도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깨닿는다. 그러고 보니 대화가 안통하던 친구가 있어 토론이 되고 바람 잘 날이 없기에 술자리도 재미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른, 즉 완전히 다른 시각이 존재하는 관계도 태도가 서로 공유된다면 마찬가지 일 것 같아 보인다.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시각이 달라서 어느 한쪽은 매장되어야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시각도 마찬가지지만, 언어관점은 특히나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긴 것이 아닌, 이제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선언하고 나선 대표격이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컨설팅을 하면서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와 어감의 차이가 실제 살아온 삶과 생각의 바로미터가 되고, 더군다나 미래 소실점의 위치가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인 사용법이 아니라 정치시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유추되는 언어감정과, 그 언어가 만들어진 본래의 관점들을 조망해보는 의도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는 곧바로 갈등이 된다. 언어관점을 새로 바라보자니 시덥지 않은 것도 취향에 맞지 않은데다가, 그것을 따르자니 상당한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겠음을 많이 느끼게 된다. 그것이 미학이던, 경영학이든, 정치학이든지 간에, 언어를 통해 현상, 현안을 조망하는 다양한 관점의 기술은 지금 시작한다고 해서 나중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기원이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생겨난 것이므로 나의 오롯한 조망은 단지 꿈이거나 상상일수도 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필연적인 것 보다 대체로 우연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우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 날 수 있는 일이고, 아니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 하는 것.
언어의 조망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다른 상상을 기술하고픈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욕심에서 시작했기에 여러 사람이 같이 꿀 필요는 없다. 나의 사사로움을 읽고 다른 꿈을 꾸어도 그로써 멋지고, 아름다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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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후예 2006/02/24 00:5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그 멋진 글이 훈데르트 바서란 양반이 말한거였군요. 참여연대 슬로건인데... 좋아요! 우리 같이 꿈꿔여 !! ^^
jack 2006/02/24 02:53 편집/삭제 댓글 주소
같이 꿔서 현실이 되면, 어쩌나... 고민되는 것도 있는 법. 꿈은 같이 잔다고 같이 꾸는게 아닌 점이 매력인 듯...^^ 그러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