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쏘다닐 요량으로 7일정도 휴가를 내려고 했으나, 현재의 Role 과 시점 상 적절한 휴가가 아니라며 반려 당했다. 그리고 쏘다니기엔 너무 부족한 4일. 주말을 끼워 내일부터 제주도, 다음주는 일본 정도 다녀올 수 있겠다 싶다. 현재의 Role 과 시점에 부적절한 휴가란 무엇일까?
경영자와 노동자, 그 계급적 경계가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경영자 > 노동자이겠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선 노동자 > 경영자 이겠다. 나의 입장도 여전히 후자지만, 이제 경영자이니 적절한 휴가 시점을 찾으라는 새로운 미션은 뒷맛이 씁쓰름하다. 일년동안 노동했으면, 한 7일정도 쉬는 건 매우 합법적이면서 윤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매우 필요한 시간으로 봤는데, 경영자의 Role 이 주어지면 그게 안된다니, 이거 참 혼란스럽다. 안그래도 공평과 평등에 대한 사상이 뒤죽박죽인데다가 덜컥덜컥 세계화적인 결정을 하는 비겁함에 머리가 저려 빠진 머리칼을 줏어 심을 수도 없고...
내일 제주도에 가서도 자유로운 담론의 기회가 있겠지만, 박해 받는 계급에게 자유과 공평은 어디까지 주어져야 하는 가? 주어지는 자유와 공평은 결국 계급 우월자에게 나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월한 계급이 주는 똘레랑스로 자유와 공평을 배분하는 격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박해 받는 계급이 필요한 자유과 공평이 어느 정도 인지 알고? 지표라고 불리우는 기준은 제도 안에서 데이터를 토대로 세워진다. 그 지표의 결정은, 우월한 이데올로기가 아님에도 그에 순응하는 제도권, 절대로 우월한 계급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노무현이 정권을 걸고 대연정 제안을 했을 때, 이점 우월한 계급의 희생을 높이 산 혹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희생을 박해 받는 계급의 대상이 아니라, 우월한 계급보다 더 우월한 쪽에 희생을 바치려 했기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러운 것이 됐지만...
이런 면에서 본다면 황우석 교수 이슈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무엇을 하더라도 이건 넘지 말자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가이드 라인 이란 것이 있다. 그걸 넘으면 당장은 큰일이 안나더라도 나중에 작게 침범했던 논리들이 집합을 이룬다는 것은 역사가 충분히 조망하기 때문이다. 생명연구를 통해 난치병을 고치겠다는 숭고한 뜻이 가이드 라인을 침범했다. 난치병을 알고 있는 환자, 그의 가족들이 되보지 않고 말도 꺼내지 말라는 자격 논리에는 반대한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 모두에게 입이란 기관은 필요 없다. 지금 황우석 교수는 국익이란 잣대를 가진 자들이 yallow paper 를 통해 만들어 놓은 히트 상품이 되버렸다. 어느 누구도 그의 연구활동에 도전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버렸다. PD 수첩이 역사에 반역자가 되버렸으니 이는 포퓰리즘을 넘어 집단 광기에 다름 아니다. 아직은 현실되어 있지 않은, 거의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국익이라 밀어 부치는 정의가 겨우 경제적 판단에 근거했으니 이건 파쇼와 다르지 않다. 우월 계급자는 박해 받는 계급자의 자유와 공평을 판단할 수 없는 것 처럼, 황우석 교수는 난자 공여자의 난자 채취에 강압이 있고 없고, 동의가 있고 없고를 판단할 수가 없다. 따라서 가이드 라인을 지키라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가이드 라인은 윤리의 문제이고 보면, 그것은 그 어떤 국익보다 앞서야 하는 게 맞다.
다른 나라가 치고 올라와 행여 황우석 교수보다 더한 연구 성과를 내서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국익에 반한다는 생각은 박해 받은 계급은 계속 박해를 받아도 된다는 것과 다른 점이 없다. 어느 소설에서는 나옴직한 치졸한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는 세상이 되간다.
경영자와 노동자, 그 계급적 경계가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경영자 > 노동자이겠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선 노동자 > 경영자 이겠다. 나의 입장도 여전히 후자지만, 이제 경영자이니 적절한 휴가 시점을 찾으라는 새로운 미션은 뒷맛이 씁쓰름하다. 일년동안 노동했으면, 한 7일정도 쉬는 건 매우 합법적이면서 윤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매우 필요한 시간으로 봤는데, 경영자의 Role 이 주어지면 그게 안된다니, 이거 참 혼란스럽다. 안그래도 공평과 평등에 대한 사상이 뒤죽박죽인데다가 덜컥덜컥 세계화적인 결정을 하는 비겁함에 머리가 저려 빠진 머리칼을 줏어 심을 수도 없고...
내일 제주도에 가서도 자유로운 담론의 기회가 있겠지만, 박해 받는 계급에게 자유과 공평은 어디까지 주어져야 하는 가? 주어지는 자유와 공평은 결국 계급 우월자에게 나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월한 계급이 주는 똘레랑스로 자유와 공평을 배분하는 격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박해 받는 계급이 필요한 자유과 공평이 어느 정도 인지 알고? 지표라고 불리우는 기준은 제도 안에서 데이터를 토대로 세워진다. 그 지표의 결정은, 우월한 이데올로기가 아님에도 그에 순응하는 제도권, 절대로 우월한 계급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노무현이 정권을 걸고 대연정 제안을 했을 때, 이점 우월한 계급의 희생을 높이 산 혹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희생을 박해 받는 계급의 대상이 아니라, 우월한 계급보다 더 우월한 쪽에 희생을 바치려 했기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러운 것이 됐지만...
이런 면에서 본다면 황우석 교수 이슈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무엇을 하더라도 이건 넘지 말자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가이드 라인 이란 것이 있다. 그걸 넘으면 당장은 큰일이 안나더라도 나중에 작게 침범했던 논리들이 집합을 이룬다는 것은 역사가 충분히 조망하기 때문이다. 생명연구를 통해 난치병을 고치겠다는 숭고한 뜻이 가이드 라인을 침범했다. 난치병을 알고 있는 환자, 그의 가족들이 되보지 않고 말도 꺼내지 말라는 자격 논리에는 반대한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 모두에게 입이란 기관은 필요 없다. 지금 황우석 교수는 국익이란 잣대를 가진 자들이 yallow paper 를 통해 만들어 놓은 히트 상품이 되버렸다. 어느 누구도 그의 연구활동에 도전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버렸다. PD 수첩이 역사에 반역자가 되버렸으니 이는 포퓰리즘을 넘어 집단 광기에 다름 아니다. 아직은 현실되어 있지 않은, 거의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국익이라 밀어 부치는 정의가 겨우 경제적 판단에 근거했으니 이건 파쇼와 다르지 않다. 우월 계급자는 박해 받는 계급자의 자유와 공평을 판단할 수 없는 것 처럼, 황우석 교수는 난자 공여자의 난자 채취에 강압이 있고 없고, 동의가 있고 없고를 판단할 수가 없다. 따라서 가이드 라인을 지키라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가이드 라인은 윤리의 문제이고 보면, 그것은 그 어떤 국익보다 앞서야 하는 게 맞다.
다른 나라가 치고 올라와 행여 황우석 교수보다 더한 연구 성과를 내서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국익에 반한다는 생각은 박해 받은 계급은 계속 박해를 받아도 된다는 것과 다른 점이 없다. 어느 소설에서는 나옴직한 치졸한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는 세상이 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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