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

2005/10/01 17:48 / 기억
청계천에 새물이 흐르기 전부터, 그러니까 청계천 고가가 철거되던 날, 고층빌딩에서 이명박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들과 멀리서 함성 지르던 철거민을 보고 있었다. 엇그제 진정 새물을 흘린다는 청계천을 새벽 1시에 나가보았다. 나는 내려도 카메라를 내릴 수 없이 비가 왔다. 평화시장은 전태일의 흉부상에 네온싸인과 유행가를 쏟아 내고 있었다. 어디서 짜내는 섬유들인지, 지게에는 온통 한 더미씩 쌓여, 지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무게다. 모자를 눌러 쓰고 5가에서 6가를 채 걷지도 못하고 돌아 왔다. 빗방울 몇개에 어깨며 다리는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 몸이 다음날 밤이 되면 코카인에 중독된 모냥 일시적으로 살아나 소주 세 네병을 마시고 차는 어딘가에 버려두었는지 눈을 뜨면 1인용 침대 위다. 좁은 내 침대는 내가 가진 어떤 좁은 것보다도 용케 중독된 나를 떨어 뜨리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집트로 떠나신 날, 나는 많이 중독됐고 아팠다.
이제는 문학을 몰라 기대지 못하는 진정성과 감수성이 거슬려 아팠고, 차마 떠나지 못하던 현실이 마치 '하루끼'의 먼 북소리처럼 어느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어 아팠다.
우리가 서로 떨어져 나와 얼마나 아파했는지 조차 모르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너도 나도 이제 어디론가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잘못 걸린 전화에도 흠짓 놀라 몇 시간을 생각하다 비로서 되걸어보는 소심함은 네 앞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차마, 사랑은 여윈 네 얼굴 바라보다 일어서는 것,
묻고 싶은 맘 접어두는 것, 말 못하고 돌아서는 것
하필, 동짓밤 빈 가지 사이 어둠별에서,
손톱달에서 가슴 저리게 너를 보는 것 문득,
삿갓 등 아래 함박눈 오는 밤 창문 활짝 열고 서서
그립다, 네가 그립다, 눈에게만 고하는 것
끝내, 사랑한다는 말 따윈 끝끝내 참아내는 것

- 홍성란 '따뜻한 슬픔'



단조로운, 잔잔한 목소리가 그리워지는 것은 역시 나를 위로하기 위함으로, 천천히 나를 스쳐가는 바람속의 말에 너를 그리다, 나의 꿈은 오로지 하오의 솔섬에서 붉게 자라는 우묵가사리의 정막함뿐이다. 네가 행복하게 부르는 휘파람 소릴 들을 수 있도록 붉게 자란 정막함이 오로지 나의 꿈임을...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천양희 '어떤 일생'



태양의 서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빌리를 따라 통통배에서 바다낚시를 하다보면 그곳이 서쪽일까? 삶이 서쪽에서 요약된다면 태양과 같고 하루와 같고, 어느날 무릎사이에 파 묻은 고단한 머리가 눈을 뜨고 보는 단풍나무와 같고, 가는 날짜마다 샘을 하는 내 인생의 남루함과 같다. 늙고 붉어진 빈 소주병이 쪼그리고 앉은 화려했던 술판과 같다. 10월, 다시 술판이 시작된 내 인생은 지난 날의 절망의 내용을 다 까먹어 버렸다. 오로지 잘못이 없는 사랑의 추억만 고스란히 부표를 타고 서쪽으로 홀로 떠다닌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 기형도 '10월'
2005/10/01 17:48 2005/10/01 17:48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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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구려후예 2005/10/06 18:0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형침대는 정말 작지...
    그거땜에 아직 형이 솔로인지도 몰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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