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고도의 시대에 하루는 정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 분절의 단위는 내일에 종속되고 내일은, 또 내일을 참조하며 분절의 단위를 넓혀간다. 분절의 간격은 긴장의 밀도를 증발시킴으로써 '대충, 까이꺼' 로 희화된다. 하지만, 정밀한 하루동안 두,세번쯤 기절할만한 유머의 필요성은 그것이 그만큼 고단하고 삶의 단위가 하루로는 표현하지 못할만큼 단조롭기 때문이 아닐까? 뭉쳐야 뭔가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부터 하루는 일상의 단위로써 가치절하 된다.
하지만, 하루를 기꺼이 마무리하는 시점이 어떤 시간이라면 시사투나잇은 그 시점에 하닐없이 볼 수 있는 것중에 가장 거북스러운 것이다.
시사투나잇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욕망이 들끓는 자들 뿐인 듯 하다. 그 욕망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사고는 맥아더 장군이 굽어 보시는 인천 앞바다에 뜻도 이념도 없이 지 피와 내장을 쏟아낸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수많은 이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름을 기억할 줄 알았던 자들, 이제는 노병이 된 그들은 그 이름을 죽여버린(노병들은 그들의 이름을 잊어 버린 듯)자를 향해 고도의 경례를 부친다. 고맙다는 뜻인지, 잘했다는 뜻인지 도무지 알길 없다. 병사는 죽여졌으며, 사라졌고, 노병은 정신이 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고도의 변화를 겪는 현재의 병사들이(군대는 없어야 겠지만, 김일병의 제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기에)사라지지 않는 노병들에게 배울 점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장에 내 팽겨쳐져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름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맥아더 라면 비틀린 마음은 은폐, 엄폐하고 손가락은 왜곡된 애국심에 떨려온다. 그들의 애국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두고 온 이름 때문에 씁쓸 하다.
원자재론을 펼친 서울대 총장의 욕망 또한 욕망이 없던 자들에게 고하는 지루한 하루다. 교육에 있어서 현 정권의 개혁 성향은 '그때 그때 달랐다', 사실 현 정권은 교육 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에 적용되던 개혁의 사전적 의미를 유권해석 하면서 주어진 집권기를 모두 보낼 모양새다. 평등이 있는 것도 아니며, 경쟁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오십세주식 이데올로기로 일관한다. 그런 정권과 교육은 너무도 닮아 있다. 정치적 입지로써의 대학의 자율화를 통한 서울대 총장의 발언은 폭력과 성적에 시달리는 원자재에 대한 공포교육의 천명이다. 사회에 쓸데 있는 인간성와 교양의 양성을 고등학교에 무한 전가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이미 상아탑을 부수고 자본주의 윤리에 무한 복종하는 인간성 양성소로 변한 대학에서 사회적 양심을 가진 인간이 배출될리 없다. 되려 자본주의에 포커스된 지식은 사회에 나와 하나 쓸모가 없다. 그동안 좋은 원자재는 하나도 없었던 말인가? 욕망이 너무 지나치다. 현 정권이 욕망이 지나쳐 주먹구구로 타협을 하며 개혁의 유권해석을 늘려 가는 것 처럼 말이다.
하루의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이부자리가 편할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사투나잇의 남자 앵커가 마지막에 '시사츄나잇' 이라고 웃기는 발음을 선보였다.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 여성 앵커와 서로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어제 가장 재밌었던 유머였다.
하지만, 하루를 기꺼이 마무리하는 시점이 어떤 시간이라면 시사투나잇은 그 시점에 하닐없이 볼 수 있는 것중에 가장 거북스러운 것이다.
시사투나잇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욕망이 들끓는 자들 뿐인 듯 하다. 그 욕망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사고는 맥아더 장군이 굽어 보시는 인천 앞바다에 뜻도 이념도 없이 지 피와 내장을 쏟아낸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수많은 이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름을 기억할 줄 알았던 자들, 이제는 노병이 된 그들은 그 이름을 죽여버린(노병들은 그들의 이름을 잊어 버린 듯)자를 향해 고도의 경례를 부친다. 고맙다는 뜻인지, 잘했다는 뜻인지 도무지 알길 없다. 병사는 죽여졌으며, 사라졌고, 노병은 정신이 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고도의 변화를 겪는 현재의 병사들이(군대는 없어야 겠지만, 김일병의 제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기에)사라지지 않는 노병들에게 배울 점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장에 내 팽겨쳐져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름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맥아더 라면 비틀린 마음은 은폐, 엄폐하고 손가락은 왜곡된 애국심에 떨려온다. 그들의 애국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두고 온 이름 때문에 씁쓸 하다.
원자재론을 펼친 서울대 총장의 욕망 또한 욕망이 없던 자들에게 고하는 지루한 하루다. 교육에 있어서 현 정권의 개혁 성향은 '그때 그때 달랐다', 사실 현 정권은 교육 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에 적용되던 개혁의 사전적 의미를 유권해석 하면서 주어진 집권기를 모두 보낼 모양새다. 평등이 있는 것도 아니며, 경쟁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오십세주식 이데올로기로 일관한다. 그런 정권과 교육은 너무도 닮아 있다. 정치적 입지로써의 대학의 자율화를 통한 서울대 총장의 발언은 폭력과 성적에 시달리는 원자재에 대한 공포교육의 천명이다. 사회에 쓸데 있는 인간성와 교양의 양성을 고등학교에 무한 전가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이미 상아탑을 부수고 자본주의 윤리에 무한 복종하는 인간성 양성소로 변한 대학에서 사회적 양심을 가진 인간이 배출될리 없다. 되려 자본주의에 포커스된 지식은 사회에 나와 하나 쓸모가 없다. 그동안 좋은 원자재는 하나도 없었던 말인가? 욕망이 너무 지나치다. 현 정권이 욕망이 지나쳐 주먹구구로 타협을 하며 개혁의 유권해석을 늘려 가는 것 처럼 말이다.
하루의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이부자리가 편할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사투나잇의 남자 앵커가 마지막에 '시사츄나잇' 이라고 웃기는 발음을 선보였다.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 여성 앵커와 서로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어제 가장 재밌었던 유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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