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나날이 간행하는 기록의 의미는 새삼 새롭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포퓰리즘적 편집증에 가까운, 사람들은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고 흔적을 생산한다. 퓰리쳐가 사망한 1917년에 기록이란 의미는 아마도 '기록적인 어떤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기록적인 것과 나날이란 의미가 현학적으로 파생하여 저널리즘이란 포괄적인 단어가 탄생했고, 수백년동안 그 단어는 매스 미디어의 횡포에 앞잡이 역할을 했다.
미디어와 기록의 생산자가 동시에 멀티의 개념, 권력의 이동, 을 가지면서 기록적인 어떤 것은 매스 미디어의 특징 즉, 기록을 순식간에 사회적 합의점으로 이끄는 획일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획일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근대 저널리즘의 한 축(기금을 조성해서 상을 만들었다고 한 축이 될 수 있나?)인 퓰리쳐, 퓰리쳐상의 매스주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멀티 미디어는 기계적 다중화라는 축소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모반적 반기의 개념이다. 매스 미디어가 저널리즘을 앞세워 기득권을 수호하며 스스로를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시키는 것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초의 개인 권력이 바로 멀티 미디어다.
멀티 미디어는 개인 이라는 다양한 유니버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제된 저널리즘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기반은 초극의 다양성으로 기득권이 보수하는 민족주의적 공공선에 대항하는 태생임을 증명한다. 매스 미디어는 그 반대의 개념이 된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바보가 된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미덕이다. 미국의 저널리즘, 미국적 저널리즘인 퓰리쳐가 과거의 영수증을 오늘의 반성으로 기록하지 못하고 표현 그 자체로 미국적 저널리즘, 나아가 제국주의의 목소리를 2005년 퓰리쳐 어워드를 통해 내고 있음을 개인 유니버스의 멀티 미디어니어로써 심히 유감을 쌔린다.
AP 의 이라크 전쟁 사진에게 돌아간 2005 퓰리쳐 상(Breaking news photography 부문)은 제국주의 전쟁의 충견을 휴머니즘으로 견실하게 포장한 카메라 옵스쿠라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 사실의 기록에 대해서 상을 주는 아이러니가 있기에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필름의 윤곽은 뚜렷이 전쟁이다. 하지만, 온데간데 없는 인권과 파괴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적 감성과 강대국의 폭압적 우월주의로 부터 시작하여 재기 발랄함으로 마무리가 된다. 시퀀스가 없어도 사실의 사진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말하는중 임을 들을 수 있다. 침묵하고 있지 않은 표현의 자유가 죄책감을 덜어주기라도 한다는 듯, 퓰리쳐는 한껏 뽐을 낸다.
침묵은 지적 자유도, 중간자의 미덕도 아니다. 퓰리처의 표현은 침묵과 표현의 자유가 별개라는 것을 말해준다. 침묵은 비판받지 않는다. 고작, 말을 해라, 정도다. 표현은 그 자유가 보장될 수록 다른 의견에 대해서 비판받을 준비와 주장의 모반과 반성의 기저를 동시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의 역사적 위대함은 침묵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것은 퓰리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퓰리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국인, 최소한 미국 언론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 전제로된 어워드의 정체성이 역사적 위대함과 그 자체의 권위와는 관계없이 그 사회의 기득권과 권력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바로미터로 보여주는 사례다. 보도 사진의 지적 존재는 사실을 전이시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사실은 있되 전이의 과정엔 사상이 전제되는데, 이때의 사상이 무엇을 조망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마땅히 그래야할 사실이 다른 전이현상을 가지게 된다.
한 사진을 보며 다른 전이를 느끼는 것이 멀티 미디어니어의 기본 덕목이라면 죽은 동료의 유품 앞에선 청년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아니 군대가 없고, 전쟁이 없었다면,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바벨탑의 이야기를, 타클라마칸 사막의 고운 모래를, 그곳에 핀 한줄기 무지개와 죽지 않았을 동료를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퓰리쳐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가?
미디어와 기록의 생산자가 동시에 멀티의 개념, 권력의 이동, 을 가지면서 기록적인 어떤 것은 매스 미디어의 특징 즉, 기록을 순식간에 사회적 합의점으로 이끄는 획일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획일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근대 저널리즘의 한 축(기금을 조성해서 상을 만들었다고 한 축이 될 수 있나?)인 퓰리쳐, 퓰리쳐상의 매스주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멀티 미디어는 기계적 다중화라는 축소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모반적 반기의 개념이다. 매스 미디어가 저널리즘을 앞세워 기득권을 수호하며 스스로를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시키는 것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초의 개인 권력이 바로 멀티 미디어다.
멀티 미디어는 개인 이라는 다양한 유니버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비정제된 저널리즘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기반은 초극의 다양성으로 기득권이 보수하는 민족주의적 공공선에 대항하는 태생임을 증명한다. 매스 미디어는 그 반대의 개념이 된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바보가 된다는 것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미덕이다. 미국의 저널리즘, 미국적 저널리즘인 퓰리쳐가 과거의 영수증을 오늘의 반성으로 기록하지 못하고 표현 그 자체로 미국적 저널리즘, 나아가 제국주의의 목소리를 2005년 퓰리쳐 어워드를 통해 내고 있음을 개인 유니버스의 멀티 미디어니어로써 심히 유감을 쌔린다.
AP 의 이라크 전쟁 사진에게 돌아간 2005 퓰리쳐 상(Breaking news photography 부문)은 제국주의 전쟁의 충견을 휴머니즘으로 견실하게 포장한 카메라 옵스쿠라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 사실의 기록에 대해서 상을 주는 아이러니가 있기에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필름의 윤곽은 뚜렷이 전쟁이다. 하지만, 온데간데 없는 인권과 파괴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적 감성과 강대국의 폭압적 우월주의로 부터 시작하여 재기 발랄함으로 마무리가 된다. 시퀀스가 없어도 사실의 사진은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말하는중 임을 들을 수 있다. 침묵하고 있지 않은 표현의 자유가 죄책감을 덜어주기라도 한다는 듯, 퓰리쳐는 한껏 뽐을 낸다.
침묵은 지적 자유도, 중간자의 미덕도 아니다. 퓰리처의 표현은 침묵과 표현의 자유가 별개라는 것을 말해준다. 침묵은 비판받지 않는다. 고작, 말을 해라, 정도다. 표현은 그 자유가 보장될 수록 다른 의견에 대해서 비판받을 준비와 주장의 모반과 반성의 기저를 동시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의 역사적 위대함은 침묵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것은 퓰리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퓰리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국인, 최소한 미국 언론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 전제로된 어워드의 정체성이 역사적 위대함과 그 자체의 권위와는 관계없이 그 사회의 기득권과 권력에 의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바로미터로 보여주는 사례다. 보도 사진의 지적 존재는 사실을 전이시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사실은 있되 전이의 과정엔 사상이 전제되는데, 이때의 사상이 무엇을 조망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마땅히 그래야할 사실이 다른 전이현상을 가지게 된다.
한 사진을 보며 다른 전이를 느끼는 것이 멀티 미디어니어의 기본 덕목이라면 죽은 동료의 유품 앞에선 청년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아니 군대가 없고, 전쟁이 없었다면,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바벨탑의 이야기를, 타클라마칸 사막의 고운 모래를, 그곳에 핀 한줄기 무지개와 죽지 않았을 동료를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퓰리쳐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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