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2005/03/14 22:19 / 생활
아침뉴스가 난데없는 선언을 하고 나섰다. 오늘부터 봄이라고. 출근을 하는 중에 라디오에서도 부산을 떨었다, 오늘부터 봄이라고. 징후가 없는 변화를 명확하게 선언할 수 있는 배짱도 좋고, 순수하기까지한 대중매체가 많은 우리나라의 상서로움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반복되는 Groundhog day 처럼, 계절은 여전히 오토리버스 중인 것 같은데도...
무엇을 명확하게 끊어 버린다, 는 것은 부러 찾아 다니지 않는다, 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내가 드라마 같은 것을 끊어 버린 명확한 지점은 모래시계 이후가 된다. 모래시계 이후엔 어떤 드라마도 쫒아 다니며, 부러 찾아 다니며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를 잠시 끊어 버린 고현정씨가 컴백한 드라마 '봄날' 이 어제 종영되었다. 앞에 내용은 죄다 남에게 듣고 19회, 20회만 봤지만, 어째됐던 마지막 두편은 쫒아 다니며 본 격이 됐다. 마지막 두편만 본 나로서는 서정은, 고은호, 고은섭은 결국 끊지 못하는 존재들의 상처, 고은호는 서정은과의 사랑을 끊은 대신 배신감과 안타까움으로 매듭 짓고, 고은섭과 서정은은 고은호에 대한 서로의 인연에 상처를 주어가면서 매듭 지어버린 '봄날' 이 됐다. 매듭지어서 모두가 봄날을 맞이 하게 됐거나, 될 것이라고 봐도 될까?

끊지 못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못한 것도 없다. 끊음으로써 자유롭지만, 그것만큼 정치적인 판단도 사상도 인간성까지 위협 받는 것도 없다. 하지만, 끊지 못하는 현재의 의지로 미래가 자유롭지 못한다고 하여 냉정함이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늘의 냉정함이 미래의 후회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다가, 추억으로부터의 격리가 자유의 반납보다 낫다는 생각을 아직은 하지 못하겠다.

순진하게 봄을 선언 당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은지도 모를일이다. 고은섭의 말처럼 숨을 쉬려면 서로가 아무는 시간이 필요할테고, 황망한 들판에 봄이 찾아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다가 피던 꽃 모가지가 동강동강 끊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렇게라도 난데없이 봄날이 왔다고 말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봄날은 간다 던 기형도의 시가 누렇게 오줌핀 자폐의 다락방 벽을 손가락으로 구멍내도 좋을 봄이 왔으니, 지금 만나러 가도 된다고 말해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5/03/14 22:19 2005/03/1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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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펌] 봄날

    Tracked from live is life 2005/03/18 08:43 Lös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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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ans 2005/03/15 10:3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The Promise of Winter of the Soul..
    봄은 그약속이 이루어지는 계절이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he Waste Land
    T.S. Eliot

  3. Jack 2005/03/15 19:26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5월도 잔인한 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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