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주문서

2004/11/29 15:35 / 생활
널부러진 양말과 팬티 쪼가리들을 세탁기에 넣으며 나는 왜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일까, 데낄라 냄새를 풍기던 아침에 첫눈이 와서 전화가 폭주하던 다른이의 상상이 나에겐 그저, 녹은 눈의 질퍽함을 탓하는 현실일 뿐이다.
지루함에 과다노출된 내 일상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 부정하지 않을 뿐, 나의 세계는 온통 무정부적인 허무에 시달리고 있다.
보고서는 북북 찢지만 않았을 뿐, 이젠 영감조차 없다. 수북히 쌓이길 바라던 사람들을 조롱하듯, 첫눈 조차도 금새 녹아 '난 첫눈이자너' 라며 존재를 일깨우는데, 긴 고독은 식물인간처럼 식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모두 잃어 버린채 질기게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운명론의 허무주의야 말로 향정신성 중독보다 깊고도 빠르게 나를 하나의 사물로 취급하도록 이끌어 간다. 그때마다 내가 받는 슬픔이란, 일정액을 지불한 주문된 일생이 아닐까, 라는 것이다. 못과 나무와 노동의 댓가를 지불하고 재단되는 의자 같은 인생의 주문서 안에 슬픔의 댓가는 얼마일까? 사랑의 댓가는? 외로움이나 행복의 댓가는?
결국 우리는, 영수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긴 줄, 어디쯤에 와 있는가?
2004/11/29 15:35 2004/11/29 15:35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Trackback URL : http://drunkenstar.x-y.net/tt/trackback/112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

« Prev : 1 : ... 398 : 399 : 400 : 401 : 402 : 403 : 404 : 405 : 406 : ... 473 : Next »